〈 45화 〉6장. 하오문 산동지부 - (7)
은약벽의 내실에서 나오던 위일청의 귓가에 하오문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군요, 위 공자.”
그 말을 듣자 위일청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섰다.
‘… 내가 말이오?’
무슨 뜻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하오문주의 혼잣말을 몰래 엿들었던 것을 실토하는 짓이 되는지라 잠시 망설여졌다.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은 군자가 할 짓이 못 된다.
그냥 귀에 들린 것이라 변명이라도 해볼까 싶었으나 결국 위일청은 하오문주의 혼잣말을 스스로 고민해보기로 결심했다.
‘… 사랑이라.’
위일청의 주변에 달라붙는 여인은 모두가 하나같이 ‘당신을 사랑하노라’라며 연심을 고백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하오문주의 말을 들은 이후 위일청의 마음 속에 작은 의심의 씨앗이 피어났다.
‘나는 그 모든 여인들을 사랑하는가? 아니…, 애시당초 사랑이란 무엇인가?’
위일청은 좀 더 원론적인 답변을 얻고 싶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그녀를 위해 정성을 다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였는가.
이 논리대로라면 하오문주의 말은 틀린 것이다.
하지만 위일청은 어딘가 가슴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해소감보다 갑갑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위일청은 결국 지나가던 한 하오문도를 붙잡았다.
“혹시 이 근처에 사색하기 좋은 곳이 있습니까?”
“아…, 저 쪽의 장원으로 나가보시지요. 그 곳에 소나무가 보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오문도의 안내를 받고 장원으로 나서자 그 곳엔 그의 말대로 그 위세가 대단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한 소녀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독고 소저가 미리 와 계셨군요.’
그러고보니 하오문주가 그녀에게 무공을 전수해준듯 했다.
새로 얻은 무공을 바로 시험해보기 위해 나왔으리라 생각하며 위일청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머릿 속에서 아까까지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고민이 떠올랐다.
‘… 사랑이라.’
위일청이 살면서 본 모든 이들 중, 가장 감정적인 인물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그게 바로 독고령이었다.
어쩌면.
혹시 독고령이라면.
사랑에 대해 알지 않을까?
“아니, 시발…. 이게 이렇게 되야하는데…?”
마침 독고령의 수련이 끝난듯하자 위일청은 가볍게 말을 걸었다.
“뭐가 말입니까, 소저?”
“히익…!!”
여전히 참 격한 반응을 보이는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은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손이 조금 베였지만, 오히려 이걸 빌미삼아 독고령에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 위일청은 자신의 의문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독고 소저.”
“ㅇ… 왜?”
“혹시 사랑해본 적 있으십니까?”
“후엥?!”
독고령의 머리가 또 다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음…, 그게 말입니다. 잠시 제 고민을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내가 왜!!”
“윽… 손이….”
위일청이 갑자기 독고령에게 베인 손을 붙잡고는 움츠렸다.
“지랄할래?”
“…죄송합니다. 그래도 조금 쓰라리긴 하군요.”
“시발.”
독고령은 여전히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말했다.
“뭔 시발, 갑자기 궁상을 떨고 그러냐?”
“… 그렇게 보이십니까?”
“색마라는 새끼가 ‘사랑’이 뭔지 모른다고 그러니깐 우스워서.”
“하하…, 그도 그렇군요.”
“…”
위일청이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어딘가 공허해보이는 웃음이었다.
“이 새끼…, 진짜 뭐가 있긴 있나보네?”
“잘 아는 분한테 말입니다. 제가 사랑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근데?”
“약간 혼란이 오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랑을 저는 충실히 이행한다고 여겼습니다.”
“… 그게 뭔데?”
“뭐긴 뭐겠습니까. 운우지락이지요.”
“이익!!”
독고령의 머리가 다시 한 번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 소저. 예전에는 상스러운 말도 잘 하시더니 요즘 따라 감정 기복이 잦으십니다?”
“다… 닥쳐!!”
하오문주가 축골공으로 위일청의 얼굴과 목소리로 변한 뒤, 자신을 희롱했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말이 궁해진 독고령이 발을 휘둘러 위일청을 쫓아냈다.
“개소리할거면 꺼져!”
“알았습니다. 독고 소저의 머리색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도록 하지요.”
“… 시발 새끼.”
“그래서 말입니다, 소저.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소저가 생각하는 사랑은 뭡니까?”
위일청이 대답을 해주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갈 일이 없어보이자, 독고령은 난처해졌다.
‘아, 시발. 이 새끼가 왜 이러지, 갑자기….’
신의(神醫) 운영이나 할 궁상을 위일청이 떨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독고령은 아무 대답이나 던져주고 치워야겠다 생각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도 모르냐? 애새끼야?”
“소저의 혜안을 가르쳐주시지요.”
“혜안까지야…. 그냥 시발, ‘아! 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다!’하면 그게 사랑이지.”
“그건 측은지심 아닌가요?”
“뭐?”
위일청이 칼을 꺼내더니 바닥에 한자를 적어내려가며 말했다.
“맹자께서 얘기하신 인간의 4개 본성 아닙니까.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고 나아가 그를 돕기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의인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건 사랑이라 불리기 모자라군요.”
“…”
대충 위일청을 쫓아내려고 했으나 그가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반박하자 독고령도 살짝 짜증이 치솟았다.
“… 시발. 그거랑 같냐? 그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잖아.”
“뭐가 다르지요?”
“예를 들어… 어…. 그래. 너 둔치가 어려울 때만 둔치를 구해주고 싶냐?”
“예.”
“에… 엥?”
예상치 못한 답변이 튀어나오자 독고령은 당황했다.
“… 평상시에는?”
“어려움이 있다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지요. 그 전에 돕는 것은 오히려 백리 소저를 무시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 미친 새끼네, 이거.”
“예?”
“야, 이 새끼야. 사람이 어떻게 항상 도움을 요청하고 지내냐.”
“… 그렇다고 무턱대고 백리 소저를 내내 업어다닙니까?”
“아니, 시발. 얘기가 왜 거기로 가냐!”
독고령은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냥 시발 네가 ‘와, 이 새끼 없으면 큰일나겠다!’ 싶으면 그게 사랑 아니냐고?!”
“…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너 느그 아버지 안 사랑하냐?”
“예.”
위일청이 덤덤히 말하자, 독고령이 눈을 내리깔았다.
“…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별 거 아닌 얘기니깐요.”
“아니…, 이 시발 새끼가 진짜. 말하기 존나 힘들게 만드네.”
“그냥 사랑이 ‘딱 이거다!’ 하고 대답하실 수는 없으신가요?”
“아잇, 시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해봤어야 알지, 시발 거.”
“… 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위일청이 놀라 입을 벌리자,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의 짜증이 한층 더 치솟았다.
“아니, 시발 놈이. 쳐묻길래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더니 좆같은 표정을 짓네?”
“… 죄송합니다. 그보다 그 언어에 좀 주의를…”
“닥쳐, 병신아. 여튼 개소리 끝났으면 좀 꺼져. 혼자 있고 싶다.”
“하아…, 예. 알겠습니다. 쉬이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닌가 보군요.”
“나 말고 차라리 둔치나 하오문한테 묻지 그러냐.”
“그래야겠습니다. 그럼…”
위일청이 몸을 돌려 다시 기루로 들어가려던 순간, 누군가 달려나왔다.
“위 오빠아!! 독고 소저도 같이 있네요오. 다행이에욧!”
“… 무슨 일 있습니까?”
“빨리 숨어야해요!”
“예?”
“황보세가가 찾아왔어요오! 빨리요!”
“그게 왜…?”
“하북팽가도 같이 왔단 말이에욧!”
“…”
그 말을 듣자 위일청이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독고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하, 시발.”
*
광마 독고진은 대부분의 무림인들과 사이가 안 좋고, 그 중 7할 이상은 정파인이다.
마교는 만나볼 기회조차 거의 없었으며 딱 한 번, 마교의 정보조직 수장이란 년이 찾아와서 입교하라는 둥 헛소리를 내뱉길래 쫓아내준 적이 있던 적을 제외하면 그는 인생 대부분을 정파의 무인과 사파의 무인들을 두들기며 살았다.
하지만 무림인이란 참으로 변태같은 족속이라 사람을 패더라도 실실 웃으며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는 미친 놈들도 더러 있었다.
이 말을 좋게한 놈이 현 무림맹주, 남궁진이었다면 이 말을 아주 징그럽게 하는 놈이 바로 하북팽가의 가주, 팽우덕이었다.
광마 독고진이 만약 자신의 별호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지목할 대상이 바로 팽우덕이었다.
이 미친 놈은 독고진이 어딜가든 따라와서 끈덕지게 들러붙는다.
한 번만 붙어달라고.
“크하핫! 독고진! 나와 생사결을 붙어다오!”
“… 또 왔냐? 시발, 나 목욕중인데.”
“상관없다! 오늘도 또 한 번! 칼춤을 춰보자꾸나!!”
“하아…, 징그러운 새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냐?”
“당문을 조지러 오지 않았겠는가! 그대가 알 수 없는 연유로 당문을 증오함은 내 잘 알고 있다네.”
까드득.
독고진이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당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가 옷을 걸칠 생각도 않고 욕조의 옆에 놔둔 참마도를 집어들자, 팽우덕이 사납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독고진이 내뱉었다.
“… 오늘은 곱게 못 돌아갈 거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다네! 가능한 오늘이 내 기일이 되면 좋겠군!”
“미친 새끼!!”
귀찮아서라도 진즉에 죽이고 싶었지만, 또 독고진을 환장하게 만드는 점은 팽우덕의 실력이 출중했다.
“지난 번보다 실력이 늘었구만, 자네!”
“좀… 뒈져!!”
“좋은 일격이다!”
과연 오대세가의 문주라고 할 정도로 강했고, 은근히 봐주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도존이라 불렸지만, 독고진과 칼을 섞다보니 어느새 그는 도선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강호에서 10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대강자.
그게 바로 팽우덕이었다.
“… 하, 시발.”
독고령이 그 시절을 떠올리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시발. 그 찰거머리 새끼는 또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거지?’
팽우덕이 좆 같은 점은 남의 사정을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찾아와서,
아무튼 한 판 붙자고 말하고,
사람을 아주 피곤하게 만들고나서야 지 혼자서 기분 좋은 웃음을 한 채 돌아간다.
짜증난다고 죽이기엔 너무나 강하고,
그렇다고 싸움을 받지 않기엔 매 싸움에서 얻는 것들이 너무나 컸다.
독고령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자, 그 모습을 보고 위일청이 물었다.
“… 팽가와도 사이가 나쁘십니까?”
“좋아…, 괜찮지…. 근데 시발 싫어.”
“… 예?”
“그 미친 새끼들은 죄다 ‘도(刀)’에 미친 새끼들이거든. 내 생각에 그 미친 새끼들은 원수라도 도객이면 봐줄거다.”
“그…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무인이 서로 무에 대한 교류를 나누면…”
“아니, 시발! 어느 정도가 있지!!”
독고령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미친 놈들이 사람이 똥을 싸든, 잠을 자든 지들 꼴리는 시간대에 찾아와서 ‘도(刀)를 아십니까?’ 쳐묻고는 도객이면 옳다꾸나 칼부터 휘두른다니깐? 십새끼들이 체력도 존나 좋아서 몇 날 며칠을 싸우게 만들고는 마지막에 지 혼자 상쾌한 웃음으로 떠나는 게 더 사람 빡치게 만들고!!”
“… 팽가의 전통이군요. 백인비무행.”
“미친 새끼들이야. 상종하면 안 돼. 빨리 떠나자.”
독고령이 질린 얼굴을 하며 은관영을 쳐다보았다.
“야, 하오문. 여기 비밀통로 같은 거 있지?”
“네에. 바로 그 쪽으로 모실게요.”
“그래, 빨리 도망치…”
꾸르릉!
마른 하늘에 벼락 소리가 들리자, 독고령이 식은 땀을 흘렸다.
“… 하오문.”
“네에….”
“… 황보세가주도 왔냐?”
“… 네에.”
“시발.”
독고령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크윽…!”
텅 빈 장원에 강렬한 뇌기가 내달리며 번개 속에서 거한이 걸어나왔다.
“허허…, 여기들 계셨구려.”
“뇌력권존(雷靂拳尊)...”
그와 동시에 갑자기 기루에서 큰 소리가 나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크하하핫! 독고진은 어딨지?! 딸은?!!”
“… 무애도선(無碍刀仙).”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현금과 함께 은약벽이 나타났다.
“미치셨나요, 다들?”
“크하핫! 화내지 말게, 음존! 내 다 셈을 치루겠네.”
“허허…, 노부는 잘못이 없다네?”
은약벽이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자, 독고령의 목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그 때, 팽유덕이 독고령과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누가 독고진의 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