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6장. 하오문 산동지부 - (6)
위일청이 독고령에게 맞은 배를 어루만지며 은약벽의 옆에 앉았다.
“심법을 전수해주신겁니까?”
“그래요.”
“어지간히 독고 소저가 마음에 드셨나봅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광마한테는 받은 게 많으니깐요.”
“그렇군요.”
“그보다 요즘은 뭘 하고 지내시나요? 어젯밤엔 물을 겨를이 없었네요.”
은약벽이 어젯밤, 위일청과 나눴던 정사를 떠올린 듯 요염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위일청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근자에도 뭐 똑같지요. 도움을 청하는 여성 분을 돕고 지냅니다.”
“위 공자도 참 여전하군요. 독고 소저 또한 그 중 하나고요?”
“네. 마침 극양의 기운을 다루는 심법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안 그래도 관영이한테 들었는데 왜죠?”
“얼마 전에 보타문에서 검후님의 제자와 만났는데 그 분의 제자가 좀 특이합니다.”
“어떤 점이 그러한지요?”
은약벽이 세세하게 캐묻자, 위일청의 눈이 탁상에 잔뜩 쌓인 서책으로 향했다.
“… 서책에 쓰실 건 아니시지요?”
“당연히 쓸 거랍니다? 위 공자와의 밤일은 즐겁지만, 어디까지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겠지요.”
은약벽이 여전히 침대에 누은 채 손을 휘두르자 서랍이 열리며 전낭이 튀어나왔다.
허공섭물로 그 전낭을 끌어당겨 위일청의 앞에 떨어뜨린 뒤, 은약벽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검후의 제자가 어떤데요?”
“… 이렇게까지 많은 돈은 필요없습니다.”
“글쎄요. 어젯밤 위 공자와 밤 일을 치룬 저희 문도들의 내공을 생각하면 오히려 부족하다고도 느끼는데요?”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뭘.”
“좋아서 하는 일에 돈까지 벌린다면 더 좋겠군요?”
“…”
은약벽이 계속 밀어붙이자, 위일청은 결국 그 전낭을 받아들었다.
“잘 쓰겠습니다.”
“그래주면 더 좋고요. 그래서 검후의 제자가 왜요?”
“그… 여인의 몸인데 양기가 좀 많습니다.”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네요?”
“그리고 절맥도 앓고 있고요.”
“… 네?”
은약벽은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절맥증은 과한 음기 때문에 생기는 거 아니였나요?”
“… 맞습니다. 근데 양기도 많아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저도 놀랐고, 검후 님도 처음보는 증상이라 많이 혼란스러워 하셨습니다.”
“그게 왜 양기의 심법과 이어지는 건가요? 아니…, 잠시만요.”
그 때, 은약벽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 설마요.”
“예?”
“아니예요. 그냥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한 얘기인지라.”
은약벽이 알고있는 바에 의하면 검후 서교는 무당파와 은밀한 교류 관계가 있었다.
‘넘치는 음기에 의한 절맥증, 동시에 과한 양기까지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제자. 극양의 심법….’
보타문은 오직 여성 문도로만 이루어진 역사있는 문파였으니 분명 타고난 음기를 살리는 방향의 심법이 존재할 터이다.
그 모든 연결고리를 하나로 잇자, 은약벽의 생각은 자연스레 하나의 결말로 이어졌다.
‘양의심공(兩意心功). 음양지체(陰亮之體).’
기나긴 무당파의 역사 중 오직 개파조사였던 장삼봉 진인만이 이루었다는 경지.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다루며 진정한 태극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전설 속의 이야기.
‘… 무당파와 보타문에 정보원을 늘려야겠네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강호가 무섭다 생각하면 은약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감시의 눈을 부릅 뜨고 있더라도 어디선가 괴물이 튀어나오곤 한다.
‘재밌군요. 요 근자에 즐거운 일이 이리 많아서야 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어요.’
광마 독고진의 여체화.
보타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
당문의 기이한 움직임.
그리고 마교의 내분까지.
“위 공자.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쉽게도 할 일이 생겼네요.”
“… 제 얘기로 뭔가가 떠오르셨나 봅니다.”
“꼭 그런 건 아니구요. 제가 검후를 좀 도와볼까 싶어서요.”
“빚을 지우시려 그러십니까?”
“글쎄요? 위 공자가 저희 하오문에 입문하시면 알려드릴 수도 있는데요?”
“… 괜찮습니다. 어디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없군요.”
“아쉽네요.”
은약벽이 침대에서 일어나 서책이 가득 쌓인 탁상 앞에 앉아 붓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금세 서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하자, 위일청이 일어나 방을 나서려던 순간.
은약벽이 그를 멈춰세웠다.
“위 공자.”
“예, 하오문주.”
“어디에 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하신 거 말이예요, 여인도 포함인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한 명의 여인에게 마음을 줘서 백년가약을 맺고 가정을 이룰 생각은 없으시냐고요.”
“어… 문주님과요?”
그 말을 듣자, 은약벽의 붓이 멈춰섰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저 말고요. 저는 아이를 가지기 싫답니다.”
“그러십니까? 아쉽군요. 문주님을 닮은 따님이라면 분명 어여쁠텐데 말이죠.”
“그래서 더더욱 싫고요.”
“예?”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위 공자. 언젠가 정착할 생각은 없나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위일청은 난처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방랑벽도 있고, 하나의 여인에게 오롯이 제 모든 사랑을 주기엔 제 마음이 너무 넓습니다. 가능한 많은 여인을 사랑하고 싶군요.”
“… 위 공자는 언젠가 여인의 칼에 맞아 죽을 거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여인의 질투심이 그리 무섭다 들었습니다.”
“남 얘기하듯이 말하네요.”
“…”
위일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 공자.”
“네, 하오문주.”
“저는 가끔 궁금하답니다. 위 공자가 진심으로 여인을 사랑해본 적이 있는지 말이죠.”
“저는 저와 밤을 보낸 모든 여인을 사랑한답니다. 하오문주를 포함해서요.”
“… 그렇군요. 대답이 됐습니다. 저는 언제 이 곳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위공자께서는 원하시는 만큼 지부에서 머물다 가시지요.”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밖으로 나간 위일청을 바라보며 은약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군요, 위 공자.”
그와 밤을 보낸 모든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 한 이의 발언이었다.
진짜 사랑을 하는 이는 오직 한 명에게만 꽂혀 다른 이를 돌아볼 여유도 없고, 자나깨나 정인만 떠오르며, 끝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독약이다.
위일청이 정말 사랑을 겪어봤다면 방금과 같은 발언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영이와 소현 아기가 불쌍하네요. 어쩌다 저런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서…’
진즉에 위일청의 본성을 궤뚫어 본 은약벽은 그렇기에 그의 양물에 마음을 쏟더라도, 위일청이라는 사람 자체를 아껴본 적은 없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듯한 선인이지만, 누구도 사랑해본 적 없는 이. 그래서 더욱 위험한 자.’
행동이 뻔히 보이는 지금은 제어하기 쉬운 패지만, 만약 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찌될까?
은약벽은 쉬이 그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기에 그를 위험하다 생각했다.
“하아…”
괜히 서책에 집중이 안 되자, 은약벽은 잠시 붓을 내려놓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멍하니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는 혼인을 할 생각이 없답니다, 위 공자.”
은약벽은 무림이 싫었다.
힘이 있다고 남의 생명을 우습게 보는 약육강식의 비정한 곳.
한 때는 그녀 또한 약자였지만, 전대 하오문주에게 도움을 받아 거둬들여진 이후 그녀는 강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와 동시에 은약벽은 가정을 이루고 평화를 즐기는 평범한 삶을 살길 포기했다.
어차피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기엔 글렀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업을 이루고 죽겠다는 포부를 가슴 속에 간직하며 살아왔다.
전 무림을 없애버리는 것.
처음부터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그러자 은약벽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또 하나의 인물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감정적인 이. 강자에게 한없이 도전적이고, 가지지 못한 이에게 한없이 약한 이. 오늘 처음 본 자를 위해 눈물도 쏟을 선인이자 원수에겐 한없이 잔혹한 악인.’
광마 독고진.
복수라는 가장 강렬한 감정으로 전 강호를 뒤집어 엎으면서도 무공을 배우지 못한 양민을 해쳤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기이한 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자이면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신조가 있는 괴물.
그래서 잘못 다룰 경우, 더 위험한 자.
‘…하필 위일청. 하필 독고진.’
이 둘의 접점이 강호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은약벽은 너무나 궁금했다.
어쩌면 찻잔 속의 폭풍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잘하면 전 강호를 없앨 수 있는 폭풍이 되지 않을까.
‘운명이면 좋겠군요….’
은약벽이 다시 멈춘 손을 움직이며 서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용한 내실에는 그녀의 붓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
“후우…, 시발….”
몇 번이고 내실을 뒤돌아보며 혹시나 위일청이 따라올까 걱정하며 독고령은 기루의 밖에 위치한 장원으로 나왔다.
‘아니, 시발. 이 개 같은 몸은 뭔데 이리 발정이 나는거지?’
위일청을 보는 순간 하단전이 욱씬거리며 어제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는 금세 분홍색이 되었고 동시에 음기가 온 몸을 따라흐르기 시작했다.
그 변화가 독고령에겐 더 없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위일청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 아무 감정이 없다…. 아무 감정이 없어….’
무를 수련하기 가장 좋은 상태, 명경지수의 마음을 이루고자 독고령은 몇 번이고 스스로를 되뇌였다.
‘나는 위일청에게 아무런…’
그 때, 그녀의 머리가 자연스레 어제 일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위일청의 손길.
위일청의 다정한 말투.
위일청의 기분좋은 혀…
“캬아아악!!!”
독고령이 발작하듯 검을 휘두르자, 자연스레 음기가 끌어오르며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시발!! 좀 잊어!!!”
노련한 무인답게 혼란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착실히 무공을 펼쳐내고 있었다.
수라나찰도법을 검에 맞게 변형한 5개의 초식.
백리소현에게 배운 사일검법의 7개 초식.
그리고 꿈에서 깨달음의 단초를 잡았던 마지막의 절초.
“흐읍…!”
끓어오르는 음기를 검에 실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절초를 펼쳐냈지만, 여전히 어딘가 마음에 안 들었다.
“… 시발, 뭐지?”
구결도 알고 있고, 형도 알았으며, 무공에 담긴 의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실제로 검을 휘두를 때 내공만 받쳐주면 금세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마지막 절초만은 그녀의 뜻처럼 되지 않았다.
“아니, 시발…. 이게 이렇게 되야하는데…?”
“뭐가 말입니까, 소저?”
“히익…!!”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독고령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 그렇게까지 저를 피하시니 상처받는군요.”
“또 쳐맞으려고 왔냐?!”
위일청이었다.
독고령의 날선 말에도 평소에는 담담히 웃으며 받아치는 위일청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침울해보였다.
“…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엑?!”
“… 그 반응을 보니 제가 뭔가를 저지르긴 했군요. 부디 사죄할 기회를…”
“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위일청이 한 걸음씩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그녀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분명 어제의 일은 은약벽이 한 짓이었지만, 독고령의 머릿 속에는 위일청의 모습과 목소리로 각인되어 있었다.
위일청을 볼 때마다 자꾸만 어제의 일이 떠오르며 하단전이 욱씬거렸다.
“하오문주께서 말하기를 제가 소저를 희롱하였다 들었습니다.”
“허… 허튼 소리야! 무시하도록!”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몹시 빨갛습니다.”
“아… 아니이…!”
자신의 얼굴이 빨갛다는 얘기를 듣자 독고령은 황급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분홍색이었다.
‘또…! 이 망할 놈의 음심…!’
부끄러움에 당황한 나머지 독고령은 머리카락을 붙잡고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이딴 머리…!”
독고령이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카락을 잘라내려는 순간,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칼이 살을 파고드는 감촉.
“… 여인에게 머리는 더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눈을 뜬 독고령이 본 것은 자신의 칼을 손으로 붙잡은 위일청의 모습이었다.
“야… 너…”
“괜찮습니다. 그리 깊이 들어오진 않았군요. 그보다 제 호신강기를 뚫을 정도의 검기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미… 미친 놈아! 너 피난다고!”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금방 낫겠지요.”
“아… 아니이…! 좀…!”
독고령의 심장이 거칠게 뛰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시발. 수없이 많이 본 피인데 왜…!’
분명 몇 번이고 봤다.
이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적도, 입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위일청의 손이 자신의 칼에 베인 모습을 보이자 진정할 수 없었다.
“너… 옷…. 붕대…!”
“소저… 좀 진정을…”
“금창약! 금창약 있…”
“독고 소저!”
위일청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독고령이 정신을 차렸다.
“… 저 괜찮습니다. 진짜 별 거 아니예요.”
“미… 미안.”
독고령이 축 늘어지자 그녀의 머리카락도 금세 평소처럼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차게 식었다.
침울해진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이 웃었다.
“독고 소저도 그런 표정을 지으실 줄 아시는군요.”
“뭐… 뭐?!”
“참 신기한 분이시군요, 독고 소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으시네요. 아까까진 화를 내시다가 지금은 침울해지시고. 갑자기 머리카락도 베려드시고요.”
“… 시발. 좆 같잖아, 분홍색.”
“어여쁘지 않습니까.”
쿵.
위일청의 말을 듣는 순간, 또 다시 독고령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뭐지? 독인가? 눈치채지 못 하게 환술이나 사술에라도 걸렸나?’
아까부터 마음이 멋대로 날뛰었다.
이 당황스러운 감정 때문에 독고령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 때, 위일청이 말했다.
“독고 소저.”
“ㅇ… 왜?”
“혹시 사랑해본 적 있으십니까?”
“후엥?!”
독고령의 머리가 또 다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