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5장. 예절교육 - (2)
끝없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독고령의 눈에 검로가 보였다.
쉬익!
찔러 들어가는 검격을 위해 적의 눈을 현혹시키는 6개의 초식.
허초(虛招).
그리고 6개의 초식에 현혹된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한 마무리 초식.
절초(絶招).
하지만 어딘가 아쉬웠다.
‘고작 이 정도일까?’
사일검법.
천제의 아들인 10개의 태양들이 장난으로 한날한시 지상을 비추기로 하였다가 백성들이 그 더위를 못 이겨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활의 명수 후예가 9개의 태양을 쏘아버렸다는 신화에서 탄생한 검법.
그 신화를 되뇌이며 독고령은 자연스레 기존의 7개 초식에 어울리는 마지막 절초를 떠올렸다.
마지막 절초는 아마 그 설화의 절정인 9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트리는 것이 아닐까.
‘후예사일(后羿射日)’
독고령의 팔이 움직이며 동시에 몸의 사혈 9개를 찔러들어가는 검로가 완성되었다.
‘조금 부족한가?’
그녀가 만들어낸 검로 또한 다른 이가 보면 훌륭하다 여겼겠지만,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독고령이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여 초식을 개량하려던 순간, 그녀의 세계가 흔들렸다.
한 차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며 독고령은 눈을 떴다.
“아…, 시발.”
“일어났어, 령 매?”
흔들리는 바닥과 함께 독고령의 뒤통수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 옷에 감춰진 부풀어오른 두 개의 봉우리였다.
독고령이 손으로 그 봉우리를 툭툭 치자 그 너머로 백리소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 어디냐, 여긴?”
“배 안이야. 몸은 어때? 관영이가 조금 걱정하던데.”
“아, 시발.”
그제서야 독고령은 떠올렸다.
객잔에서 은관영을 손 봐주겠다고 덤벼들어갔다가 역으로 반격을 당하고 정신이 잃었던 기억이.
“하…, 옘병.”
“많이 아파?”
“… 아냐. 물이나 줘.”
“응.”
독고령이 몸을 일으키자 백리소현이 일어나 물을 가지러 갔다.
잠에서 막 깨어나 멍한 머리로 독고령은 자신이 꾸웠던 꿈을 되뇌였다.
‘… 뭐지, 그거.’
사일검법의 마지막 절초가 슬쩍 보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에 불과했다.
내력을 같이 운용하지 않는 이상 속이 비어있는, 고작해야 따라하기 밖에 안 되는 반 쪽짜리 검술이었다.
‘분명… 이렇게….’
독고령이 꿈에서 잡았던 절초의 편린이라도 기억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그녀는 금새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을 깨달았다.
‘아, 시발. 왜 또 안 움직이냐….’
분명 잘 움직이던 하단전의 음기가 또 다시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회혈에 위치해있는 상단전의 양기를 끌어쓰고자 하니 저 미친 음기가 또 다시 날뛰면서 양기를 잡아먹으려 들길래 결국 독고령은 포기했다.
그 때, 선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아, 일어나셨군요.”
“… 색마.”
위일청이었다.
*
위일청이 다기와 함께 독고령의 맞은 편에 앉아 차를 우려냈다.
“둔치는?”
“은 소저와 바다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안 그래도 배 위에서 바다를 보고 싶어했는데 독고 소저가 걱정이 되서 내내 구경을 못 했거든요.”
“…”
백리소현에게 괜히 미안함 감정을 느끼며 독고령은 뺨을 긁적였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마 같은 질문인 듯 하군요.”
말이 튀어나온 건 동시였다.
“”노극명은?” 어떻게 잡으셨습니까?”
먼저 말한 것은 위일청이었다.
“노극명은 혈도를 제압해서 조금 떨어진 숲에다가 버려두고 왔습니다. 지금쯤은 일어났겠죠.”
“… 놈이 쫓아올 확률은?”
“높겠지요. 하지만 죽여서 평생의 원수를 만드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시발…. 찝찝하군.”
“독고 소저는 어떻습니까?”
“…”
독고령은 잠시 고민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할까.’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이라면 항상 3할의 힘을 숨기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힘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 일단 노극명에 관해서 말인데.”
“예.”
“내가 제압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새끼가 생각보다 약골이였어.”
“… 그럴 리가요. 노순평 선배의 자제입니다. 후기지수 중에서도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인데 약골일리가요.”
“남의 평가와 실제 만나본 뒤의 평가는 다르지. 안 그런가?”
“그렇다고 객관적인 사실이 바뀌지는 않죠.”
위일청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객잔에 남아있던 바닥이 패인 자국을 보았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노극명 소협이 약한 게 아니라 소저가 강한듯 하던데요.”
“아, 시발.”
독고령이 이마를 탁 쳤다.
“그게 있었네.”
“… 속여넘기려고 하셨습니까?”
“속이는 것도 뭘 알아야 속여넘기는거지. 나도 몰라.”
“예?”
“그냥 그 새끼가 갑자기 덤벼들었고, 내가 그걸 제압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공을 쓸 수 있었고 그래서 제압했다.”
“… 완맥을 짚어봐도 되겠습니까?”
“해 봐.”
숨길 것도 없다 생각하며 독고령이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럼 잠시….”
위일청이 독고령의 완맥을 짚자, 그녀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읏….”
“불편하십니까?”
“아… 아냐. 계속 해.”
“… 예. 혹시나 불편하시면 얘기해주시죠.”
위일청의 손에서 내력이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독고령은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시발… 왜….’
위일청이 자신의 완맥을 짚으려고 몸을 가까이 하자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그저 완맥을 짚게끔 팔을 내어주는 행동인데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감기라도 걸렸나….’
독고령이 자신이 느낀 이상한 감각을 무시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자신의 혈도를 따라 도는 위일청의 진기를 느끼고 있던 찰나, 그녀의 하단전이 욱씬거렸다.
“야…, 색마.”
“잠시만 조용히….”
“손 떼. 빨리.”
“예?’
“기를 거둬들여! 어서!”
다급한 독고령의 말을 듣고 위일청이 기를 거둬들인 뒤, 손을 뗐다.
“왜 그러십니까, 독고 소저?”
“… 잠깐만. 나도 이 상황을 좀 이해해보려고 하니깐.”
위일청의 진기가 독고령의 몸 안에 들어오는 순간, 하단전의 음기가 움직였다.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음기 때문에 혹시나 위일청에게도 퍼질까 당황해서 손을 떼라고 했으나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 내 하단전에 음기가 갑자기…”
“아, 그건 당연하겠지요.”
“엥?”
“하단전의 음기가 끓어오르신 거 때문에 당황하신거 아닙니까?”
“어…, 맞긴 한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음심(淫心)이 끓어오르신 겁니다. 다행이네요. 독고 소저께서도 소녀경에 적응하고 계신듯 합니다.”
“…”
독고령은 잠시 멍하니 위일청의 말을 곱씹었다.
‘음심이 끓어올랐다고? 그래서 음기가 일어났다고?’
그 말은 즉슨, 독고령이 위일청의 기운을 받아들이자 야한 짓을 하고 싶어졌단 얘기와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독고령의 얼굴이 터질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자연스러운…”
“뒤져!!!”
“으헛!”
독고령이 주먹을 휘두르자, 위일청이 당황하여 그녀의 주먹을 피했다.
“오…, 소저. 또 다시 내공을 자연스레…”
“닥치고 뒤져엇!!”
“머리도 다시 연분홍으로… 으헛! 주먹이 매섭군요! 역시 박투에 재능이…”
“캬아아악!!”
결국 독고령의 난동은 선실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찾아온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말리기 전까지 이어졌다.
“하아… 하아… 시발!!”
“아, 착한 말 쓰시라니깐요오?”
“닥쳐!”
“히이잉….”
“령 매…, 조금만 침착하고…”
“캬아악!!!”
“…”
백리소현이 독고령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고 있음에도 그녀는 쉬이 진정하지 못 했다.
‘내… 내가… 시발…!!!’
음심이 끓어올랐다고?
남정네한테?
독고령은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터질듯이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당장이라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다에 뛰어들려던 것을 몇 번이고 다른 일행들이 말리고 난 뒤에도 여전히 진정하기 힘들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원래의 안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백리소현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령 매?”
“…”
“말을 안 해주면 나는 몰라….”
“맞아요오…, 매번 그렇게 날뛰시면 저희도 곤란하다고요오.”
“시발….”
독고령은 잠시 위일청이 나간 선실의 문을 노려다보았다.
그녀가 죽일듯이 위일청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일단 그를 밖으로 빼냈기에 현재 방 안에는 여성만이 모여있었다.
‘… 음심이 끓어오르면 음기가 움직인다고?’
독고령은 내공이 필요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내공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모든 무공의 기본인 발경(潑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는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들은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방대한 양의 정순한 음기가 담겨있었다.
그 음기를 움직이기 위해선 음심이 끓어올라야한다.
이게 진짜 맞는 일인가 싶었다.
독고령은 광마 독고진이던 시절도 일부러 여성을 멀리하고 단 한 번도 음심을 주체하지 못 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기분이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다.
“… 말 안 할거야, 령 매?”
“그…”
“응응. 언니한테 다 말해봐.”
“하아…, 시발.”
결국 독고령은 답답함을 참지 못 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꺼냈다.
“그… 시발… 하아…, 시발….”
“천천히 말해도 돼, 령 매.”
“… 니들은 그… 그거 할 때 말이야. 그거.”
“그거?”
“그게 뭔가요오?”
“아니…, 시발….”
독고령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곤 웅얼거렸다.
“으… 음양교합 말이야.”
“아, 네. 그게 왜요오?”
“… 그거 안 할 때도 음심이 끓어오르냐?”
“당연하죠?”
“그렇지.”
“엥?”
독고령은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 평상시에도?”
“그럼요오. 하루 종일… 은 아니지만 자는 시간 외에는 내내 달아올라있죠.”
“응…, 밤만 기다리고 있지.”
“… 음탕한 년들.”
“소녀경 때문에 그런거야?”
백리소현이 자신의 마음을 읽은듯 소녀경을 언급하자 독고령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어떻게 알았냐?”
“령 매가 위 오라버니랑 무슨 일이 있고난 뒤에 머리도 분홍색으로 바뀌고, 갑자기 내공도 좀 쓰다가 평소에는 얘기도 안 하던 야한 얘기를 꺼내서?”
“… 시발.”
“령 매.”
“왜?”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허리를 뒤에서 꼬옥 껴안고는 그녀의 하복부를 지긋이 눌렀다.
“여기가 욱씬거려?”
“… 가끔.”
“그렇구나, 후훗.”
“… 왜 웃냐?”
“아니. 령 매도 여인이구나 싶어서.”
“그게 왜…!”
“나도 그래.”
백리소현의 숨결이 독고령의 목에 닿으며 그녀를 간지럽혔다.
“소녀경은 있지…, 남자의 양기와 여성의 음기가 교합을 이루게 하는 심법이야.”
“… 근데?”
“그 과정에서 축기의 효율을 높여 남자 쪽의 내공량을 늘려주기도 하지만…, 여성의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
“그 첫 단계로 일단 여성의 몸은 남성의 양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야해. 령 매는 그 준비가 된 거야.”
“… 그 다음 단계가 뭔데?”
“운우지락?”
“캬아아악!!!”
독고령이 발작하듯 일어나며 백리소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은관영이 말했다.
“그냥 위 오빠에게 몸을 맡기면 내공도 쓰게 되고, 기분도 좋아질 건데요오….”
“닥쳐엇!!”
“히잉….”
“나… 나는… 절대 남자 새끼한테 다리 벌릴 생각이 없엇!!”
“다들 말은 그렇게…”
“갈!!”
독고령이 내공을 실어 사자후를 내뿜자 선실이 삐걱거렸다.
“…내공은 어찌저리 잘 다루는지.”
“정말 재능 덩어리라니깐요오….”
“개소리 집어치우고!! 시발…, 나는 나간다!”
“어디로 가시게요오?”
“몰라, 시발! 어디든지 있겠지.”
독고령이 당차게 선실의 문을 여는 순간, 문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어떤 새끼가…!”
“밖에는 못 나갈 거 같습니다, 독고 소저.”
고개를 들자, 그 곳에는 홀딱 젖은 상태의 위일청이 서있었다.
“바… 바다에 빠지기라도 했냐?”
“아닙니다. 날씨가 갑자기 사나워졌더군요. 비가 쏟아집니다. 풍랑에 조심하며 선실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합니다.”
“읏…!”
독고령이 얼굴을 붉히며 위일청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몇 안 되는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배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꺄악!”
“어이쿠…. 괜찮으십니까, 소저?”
앞으로 넘어질뻔한 독고령을 붙잡아 껴안으며 위일청이 물었다.
그녀의 심장이 또 다시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 시발….”
독고령의 하단전이 또 한 번 욱씬거렸다.
“일단 지금은 방법이 없으니 얌전히 안에서 기다리지요.”
위일청이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 참에 독고 소저에게 이것저것 가르쳐드릴 것도 많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