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5장. 예절교육 - (1)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독고령은 백리소현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었다.
“이런 옷 밖에 없냐?”
“히힛…, 예쁜데 왜?”
“하아….”
나풀거리는 소매는 걸리적거렸고, 아래가 훤히 뚫린 치마는 적응이 안 됐다.
‘이딴 옷을 입고 용케도 돌아다니는군….’
무엇보다 가슴 부분이 헐렁한 게 짜증났다.
옷을 입다만 기분이라 찝찝하기 그지 없었다.
“시발…, 씻어라. 나는 밥이나 먹어야겠다.”
“같이 안 먹을거야?”
“그럼 빨리 씻고 나오던가.”
“응.”
백리소현이 배실배실 웃으며 욕실로 들어가자, 독고령은 객잔의 1층으로 나와 적당한 자리에 앉아 점소이를 불렀다.
“어이, 점소이.”
“예에!”
“술… 말고 차나 좀 줘. 음식은 일행이 온 뒤에 시키지.”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멀어지는 걸 보며 독고령은 머리를 긁적였다.
‘시발…, 불안해서 술을 못 마시겠군.’
지금의 몸은 몇 번이고 되뇌이지만, 광마 독고진 시절의 강대한 육체에 비하면 너무나도 나약했다.
술을 먹고 겪는 숙취하며 그 때마다 불쾌한 일들을 겪었던 독고령은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차를 시켰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 고마워.”
“좀 있다가 일행 분이 오시면 다시 불러주십쇼.”
독고령이 차를 잔에 따라 들어올리는 순간, 객잔에 누군가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손님은 바로 점소이부터 찾았다.
“… 점소이.”
“예, 손님.”
“이 쪽으로.”
점소이가 손님에게 다가가자, 그 손님이 무언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 뭐지?’
독고령이 별 생각없이 슬쩍 귀를 기울이자, 손님의 귓속말이 그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 혹시 붉은 머리의 갓 약관을 넘은듯 보이는 여인과 남정네가 이 곳을 찾지 않았나?”
“!!”
그 말을 듣는 순간, 독고령이 휙 고개를 돌렸다.
‘저… 저 새끼가 왜 여기에?’
객잔에 찾아온 손님은 노극명이었다.
*
노순평에게 독고령을 잡으라는 말을 들은 뒤, 노극명은 머리를 굴렸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도피처는 그들이 처음 만난 객잔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 곳으로 다시 도망치면 모용세가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극명은 금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니다…, 본가의 무인 중 부상당한 인물들 또한 있다. 그렇다면 그 곳엔 아직 본가의 무인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노극명은 다시 생각했다.
‘어디를 가려고 했을까…, 목적지가 어딜까….’
분명 처음 잡았을 때, 독고령은 독고령이었다.
객잔에서 만난 그 예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쾌한 말투.
세상 모든 것을 오시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어느 순간 바꿔치기 당했다.
‘… 그렇다면 첫 목적지는 분명 파저강이 맞았다. 왜지?’
단순히 파저강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파저강을 넘기 위해서였을까?
‘단순히 파저강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그들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아니지….’
노극명은 관점을 바꿔보았다.
도망치는 입장에서 지금 가장 머무르기 싫은 곳은 어디일까?
‘요녕, 길림, 흑룡.’
이 세 곳은 명백히 모용세가의 권역이었다.
게다가 요녕의 옆에는 개방의 본거지인 천진 또한 있다.
개방이 광마에게 가진 은원 또한 만만치 않으니 광마의 딸은 그 곳을 지나기를 꺼릴 것이다.
백만 개방도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거니와 그 겉모습이 너무나도 요란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노극명의 흐릿했던 머릿속이 점차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피한다면… 배가 제일이다!’
배로 지나간다면 그들이 어디를 목표로 향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모용세가와 개방의 권역은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결론을 내린 노극명은 빠르게 움직였다.
‘해안가에 어촌 마을이 몇 개 있으니 그 모든 곳을 뒤지기 시작하면 금세 찾을 것이다…!’
그리고 노극명의 생각은 맞았다.
두 번째로 방문한 청니와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의 객잔에 들어서는 순간, 피곤함을 느끼면서도 노극명은 점소이부터 찾았다.
“… 혹시 붉은 머리의 갓 약관을 넘은듯 보이는 여인과 남정네가 이 곳을 찾지 않았나?”
그 때, 객잔에 앉아있던 한 여인이 몸을 휙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아차렸다.
천하를 오시하는듯한 건방진 눈매.
색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요란한 머리색.
절대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큭…. 크큭. 아닐세, 점소이….”
“예?”
“아니라고. 가서 일이나 보게.”
“… 예.”
노극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독고령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오, 소저?”
“시발. 어떻게 찾아왔냐?”
“머리는 또 왜 그 꼴이오? 아…, 또 사술을 썼소?”
노극명이 자연스레 차가 든 다기를 들어 자신의 입에 털어넣었다.
“와, 시발…. 안 뜨겁냐?”
“전혀.”
쾅.
거칠게 다기를 내려놓으며 노극명이 으르렁댔다.
“네 년에게 당한 내 속에 천불이 났거든.”
“큭… 크큭…, 이야…. 멋있다. ‘저 뒤지고 싶어요.’를 그렇게 말할 줄도 알고.”
“그 알량한 사술을 믿고 계속 까불어보거라….”
노극명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색마와 같은 고수가 그녀를 지키고 있다한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가문의 원수가 있었다.
어차피 아버지인 노순평이 원한 것은 그녀의 목.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 한 여인의 수급을 취하는 것은 노극명에게 쉬운 일이었다.
“죽어랏…!”
노극명은 자신이 생각해도 깔끔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검격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 응?”
손맛이 없었다.
여리여리한 독고령의 살을 파고들며, 그녀의 목 뼈를 단번에 갈라내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지랄났다. 지랄났어….”
독고령의 목소리는 탁자의 아래에서 들렸다.
“이익…!”
노극명이 급하게 칼을 들어 탁자와 함께 독고령의 몸을 베려들었다.
퍼석!
하지만 이번에도 독고령의 몸을 베는 감각이 아닌 그저 나무를 가르는 감각만이 느껴지자 노극명은 당황했다.
“이… 이건 무슨 사술이냐?!!”
그의 등에서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마지막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독고령은 내공 하나 다루지 못 하는 일반인이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노순평의 육합전성에 구토를 하며 어지러움을 느끼던 독고령의 모습이 증명했다.
게다가 파저강에서 다시 만난 순간.
독고령을 몇 차례 후려패면서 확신했다.
그녀의 야들야들한 살은 필시 무공은 커녕 몸도 제대로 안 움직여본 연약한 근육이었다.
하지만…
“사술이 아니라 보법, 병신아. 노순평한테 기본도 안 배웠냐?”
“이익…!”
갑자기 등 뒤에서 독고령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극명은 당황하며 칼을 휘둘렀다.
상체만 돌리며 검을 휘둘렀기에 발이 꼬이자, 독고령은 또 다시 비아냥거렸다.
“어이구? 검수라는 놈이 발이 꼬이는구나.”
“커억!”
독고령의 발이 노극명의 오금을 찔러들어오자 그의 균형이 무너졌다.
노극명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자, 그 위로 독고령의 몸이 뛰어올랐다.
“일단 맞자.”
“크헉!”
척추가 끊어지는 고통이 노극명에게 찾아왔다.
독고령의 주먹이 벼락같이 내리꽂히며 노극명의 등을 후려치자 그가 바닥에 꽂혔다.
“새끼가…. 감히 네 까짓게 나를 패?”
“끄… 끄으윽…!”
“이제 한 대인데 뭘 벌써 죽는 소리야?!”
독고령이 다리를 벌리며 노극명의 위에 섰다.
우드득.
그녀의 손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노극명의 등을 내리쳤다.
쾅!
“…”
노극명의 몸이 객잔 바닥 밑으로 파묻혔다.
그가 잠시 몸을 가늘게 떨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 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독고령이 노극명의 옆에 앉아 그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야…, 야야.”
“…”
“아, 시발. 조졌네…. 뒤진거야?”
독고령이 손가락을 노극명의 코 밑에 가져다대자 다행히도 미세한 숨결이 느껴졌다.
“시발, 깜짝이야.”
괜히 짜증이 올라온 독고령은 기절한 그의 뺨을 몇 대 후려쳤다.
하지만 여전히 노극명이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독고령은 다시 의자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발, 더럽게 약하네…. 분근착골(分筋錯骨) 정도는 3일 밤낮을 버틸 줄 알았구만.”
노극명이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 소리를 태연하게 하며 독고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새끼는 또 왜 여기까지 와서… 쓰읍. 어이! 점소이!”
“예…. 예! 사… 살려만 주십시오!”
“… 내가 널 왜 죽여?”
“예…?”
“음식이나 좀 가져다주라. 배고프다. 계산은 그… 알지? 내 동행한테 청구하고.”
“예…! 그…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점소이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주먹을 내질러서 그런지 어깨가 조금 뻐끈했던 독고령은 팔을 돌리며 어깨를 풀어주었다.
“아~, 시발. 그래도 몸 좀 움직이니 개운하…네?”
그녀의 시야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아… 아니, 시발…. 이… 이게 왜 다시 빨개졌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은 독고령은 당황했다.
그 때, 백리소현이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며 그녀를 불렀다.
“령 매. 나 왔…어?”
“야, 둔치. 이거 봐봐. 나 머리 빨개졌지? 그치?”
“…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아?”
“아니, 시발. 저 새끼는 됐고, 내 머리 빨간 거 맞지?! 그치?!”
“응….”
“하, 시발. 이거 뭐지? 미친 년도 아니고 머리색이 막 바뀌네.”
“그… 그보다 저 밑에 저 사람은…”
“노극명. 노순평 아들.”
“…왜 저러고 있어?”
“내가 잠시 조져놨어. 약골이라 두 대에 기절하드라. 하, 시발. 몸도 덜 풀었는데….”
“…”
백리소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위 오라버니…. 령 매는 역신이 맞나봐….’
이 일을 어떻게 위일청에게 설명해야할지 고민하며 백리소현은 말을 꺼냈다.
“… 일단 객실에 좀 다녀올게.”
“왜? 속이 안 좋아?”
“… 밧줄로 묶어놔야지.”
안타깝게도 백리소현은 이미 그런 독고령에게 적응하고 말았다.
이게 위일청과 은관영이 오기 전까지 있었던 사건의 전말이었다.
*
“…이해했어? 위 오라버니?”
“하아…, 정말이지.”
위일청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야, 색마.”
“예, 독고 소저.”
“그냥 이 새끼 토막쳐서 바다에 버리면 안 되냐?”
“… 모용 세가랑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실 생각입니까?”
“쳇.”
“…”
진심으로 아쉬운 듯 혀를 차는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은 피로감을 느꼈다.
‘… 광마 어르신. 도대체 따님을 어떻게 키우신 겁니까….’
독고령의 진실을 모르는 위일청은 그저 광마 독고진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위 오빠, 그냥 여기다 두고 가는 건 어때요오?”
“… 그게 제일 무난한 선택지겠지요.”
그러자 독고령이 발작하듯 일어났다.
“아니! 굳이 살려보내자고?”
“죽이면 지옥 끝까지 노 선배가 쫓아올 겁니다.”
“쫓아오라고 해! 콱 씨….”
“독고 소저어~.”
은관영이 손을 들어올리며 요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댔다.
“예쁜 말만 쓰자니깐요오?”
“크하핫! 아…, 우리 하오문이 소식이 느리네.”
“네?”
자신이 예상한 반응과 전혀 다른 반응을 독고령이 보이자, 은관영은 조금 당황했다.
그런 은관영을 보며 독고령이 씨익 웃었다.
“말보다 행동이 빠르겠지. 와라, 내가 오늘 네 년에게 예의를 가르쳐주마.”
“…”
독고령이 거만하게 턱을 들며 손바닥을 은관영에게 내보였다.
그리고는 먼저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은관영이 슬그머니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 위 오빠.”
“하아…, 심해지면 말릴테니 두 분이서 해결하시죠.”
“네에.”
은관영이 자세를 잡는 순간, 독고령이 이를 드러냈다.
“일단 가볍게 한 대 맞고 시작하자!”
독고령은 자신감이 넘쳤다.
노극명을 후려패면서 자신의 무공 수위가 지금 어느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정도라면 은관영은 약간 힘들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지금 좀 다져놔서 관계를 재정립해주마…!’
한 번 제대로 주먹맛을 보여주면 다시는 못 깝죽거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독고령이 손을 휘둘렀고….
“어?”
“… 독고 소저. 또 내공 없이 박투로 하는 거였나요오?”
“어… 어라? 이게 왜….”
독고령은 혼란에 빠졌다.
‘아니… 왜 내공이….’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쓸 수 있었던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독고 소저어. 이번에는 약속 안 했으니깐 저는 내공 쓸게요오?”
“자… 잠깐만! 이건…!”
“예절 교육은 제가 열심히 해드릴게요옷!”
번개처럼 날아오는 은관영의 주먹을 보며, 독고령은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주먹은 보였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곧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며 독고령이 뇌까렸다.
“시발….”
격통과 함께 그녀의 의식이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