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4장. 청니와 - (8)
“… 소현 언니.”
결국 독고령이 언니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 백리소현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히힛…, 잘 했어.”
“시발….”
독고령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 백리소현에게 말했다.
“사일검법!”
“응, 히힛. 가르쳐줄게, 령 매.”
“… 어.”
“잘 봐?”
백리소현이 검을 뽑아들고는 자세를 취했다.
손은 배꼽 가까이 댄 채, 칼을 하늘에 세워 검면에 이마를 기대며 백리소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사일검법은 신화에 등장하는 궁수, 후예가 해를 쏘아 떨어트린 일화에서 나온 검법이야.”
백리소현이 칼을 휘두르며 7개의 초식을 선보였다.
그 모든 초식을 다 천천히 감상한 독고령은 감탄했다.
‘역시 명문세가의 비전무공은 그 저력이 다르군.’
백리소현이 펼쳐내는 초식들은 어딘가 아쉬운 부분이 느껴지면서도 충분히 그 위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미묘했다.
‘… 이게 진짜 상승무공이 맞나?’
초식이 담고있는 신묘함의 편린은 독고령이 슬쩍 보고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상승의 무공이라고 보기엔 너무 깊이가 얕았다.
“… 이게 다야?”
“… 실은 있지. 마지막 하나가 더 있어.”
“역시…. 그게 절초겠군. 보여줘.”
“저기…, 령 매.”
“뭘 뜸들이고 그래.”
“… 미안.”
백리소현이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 마지막 하나의 초식은 장문인 외엔 몰라.”
“아, 시발.”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초식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파훼당하기 쉽다.
그렇기에 꽁꽁 숨겨두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하아…. 둔치.”
“응….”
“이것저것 다 요구해놓고 마지막 절초는 모른다고?”
“그치만… 진짜 모르는 걸.”
“캬아아악!!”
“히이익!”
독고령이 다시 발작하려고 들자, 백리소현이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백리소현이 들고 있는 주머니를 쳐다보고 독고령이 물었다.
“… 뭐냐, 그거?”
“아….”
“줘 봐.”
“시… 싫어.”
“빨리.”
“안 되는데….”
“안 돼?”
독고령이 씨익 웃고는 팔을 휘둘러 연검으로 그 주머니를 낚아챘다.
“앗…!”
“콱 씨, 안 되긴 뭐가 안 돼.”
주머니를 열어보자 그 곳에는 잘 빚어놓은 환단이 여러개 들어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자, 독고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왠지 익숙한데 이거.”
“나… 나는 몰라….”
“어쭈?”
뭔데 이렇게 백리소현이 쩔쩔매는가 싶어서 손으로 환단을 굴려보던 도중, 독고령이 그제서야 이 환단이 뭔지 깨달았다.
“… 이거 수면단이지?”
“헤… 헤헷…. 령 매~.”
“어디 콧소리를 내면서 무마시킬려고 하고 있어, 콱.”
“히잉…. 그치만… 령 매가 날뛰면 진정시킬 방법이 이거 밖에 없잖아….”
“뒤질라고. 이건 압수.”
“…”
독고령은 수면단이 든 주머니를 자신의 허리에 차며 말했다.
“그보다 구결이나 읊어봐.”
“… 응?”
“내가 이런거까지 설명해줘야하냐….”
독고령이 백리소현을 바라보며 세 손가락을 펼쳤다.
“단순히 형(形)을 따르는 무술은 그저 삼류.”
독고령이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그 속에 담긴 의(意)를 따르면 이류.”
마지막으로 단 하나의 손가락만 남기며 독고령이 말했다.
“거기에 역사가 더 해지면 일류.”
“오….”
“지금 그 무공을 쓰는 놈들은 머저리일지 모르나, 일단은 대종사가 만든 무공이다. 그렇다면 분명 숨겨진 의미와 역사가 있겠지. 그걸 아무나 쉽게 알아차리지 못 하게 숨겨놔서 자신의 제자들만 알 수 있게 해둔 게 ‘구결’이란 거야.”
“… 몰랐어.”
“야이씨…, 넌 무인이란 게 그것도 몰랐냐?”
“누구한테 가르침을 받아본 적은 없어서….”
“… 미안하다.”
백리소현의 표정이 어두워지려하자 독고령은 금세 사과했다.
“여튼… 구결이나 얘기해 봐. 듣다보면 실마리라도 잡겠지.”
“응. 그러니깐…”
그 후로 한참을 독고령과 백리소현은 바닷가에 앉아 열띤 이야기를 펼쳤다.
다시 객잔으로 돌아갈 때 즈음.
독고령은 사일검법을 어느정도 익숙하게 쓸 수 있었다.
객잔에 도착하자 백리소현은 일단 씻기를 원했다.
“령 매, 씻을거야?”
“그래야지.”
“그럼 같이…”
“캬아아악!!”
“… 령 매가 사람의 말을 잊어가고 있어….”
“닥쳐! 혼자 씻을테니깐. 누굴 씻지도 못 하는 병신으로 보나….”
“… 알았어. 옷은?”
“…”
독고령이 멈춰섰다.
여인의 의복은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여전히 입는 것이 어색했다.
“… 한 다경(15분) 후에 찾아와.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들고오고….”
“응, 히힛.”
“…”
배실배실 웃는 백리소현을 뒤로한 채, 독고령은 욕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위일청의 방문이 보이자, 그녀는 잠시 그 앞에 멈춰섰다.
‘… 에이, 설마.’
혹시 낮부터 은관영과 떡을 치고 있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기막을 펼쳐두고 쾌락을 즐기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독고령의 하단전이 욱씬거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조금씩 빨라지며,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 그냥 색마가 안에 있나없나 확인만….’
함부로 남의 객실을 엿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대장부가 할 짓이 못 된다.
하지만…
쳐다보고 싶었다.
독고령의 몸이 저절로 움직여 객실의 문 틈을 살포시 붙잡았다.
“…”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조심히 문을 열어 문 틈새로 그 안을 엿보았지만….
“없네.”
객실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시발, 어디 간거야. 이 새끼는….”
독고령이 괜히 멋쩍은 마음에 혼잣말을 툭 내뱉으며 다시 욕실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리소현과 땀을 흘려가며 사일검법의 초식을 익히며 토론하느라 그녀는 눈치채지 못 했다.
속곳을 적신 물기가 그저 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
독고령이 백리소현과 함께 땀흘리며 무공을 수련하고 있을 무렵.
은관영과 위일청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객실에 들어서자, 창가에는 졸린 눈을 한 부엉이가 앉아있었다.
“… 어머. 하오문에서 서신이 왔나보네요오.”
“이 부엉이도 오랜만에 보는군요.”
졸린 눈을 한 것이 귀여워서 위일청이 손을 뻗어 부엉이의 부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하자, 부엉이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그의 손을 부리로 쪼아댔다.
“하하…, 미움 받고 있군요.”
“아앗! 그러면 안 되요오!”
은관영이 부엉이의 목을 낚아채 다리에 묶인 서신을 빼냈다.
“빨리 가서 자렴.”
부엉이는 은관영의 말을 알아들은 듯 날개를 펼쳐 멀리 날아갔다.
은관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신을 읽고 있자, 위일청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은 소저?”
“아…, 하오문에서 사형을 보내겠다네요.”
“사형이요?”
“네. 은호 사형이요.”
“호오…. 하오문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분 아닙니까?”
“사형은 그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할걸요?”
“듣던 것과 다른 분인가 보군요.”
은관영이 촛불로 서신을 불태워 허공에 날리며 말했다.
“음…, 우직하고, 든든하죠. 하오문에는 안 어울리는 분이에요오.”
“하핫, 그렇습니까?”
“네에….”
말로는 별 거 아닌 듯 얘기하고 있었지만, 은관영의 속은 조금 복잡했다.
하오문이 보낸 서신에는 두 가지의 명령이 적혀있었다.
하나는 은호와 협력하여 광마의 여식, 독고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위일청을 안전하게 안가로 데려오라는 것.
‘… 문주님이 산동으로 오시는 건가?’
명령문에는 별도로 어디 안가인지 얘기가 없었으니 강호에 이리저리 퍼져있는 하오문의 안가 중 산동으로 데리고 오라는 얘기일 터였다.
은관영의 마음이 복잡한 이유는 하오문주보다 독고령 때문이 더 컸다.
‘… 독고령과 문주님을 만나게 해도 될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난폭하기 그지없는 싸움닭.
독고령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은관영의 머릿 속에서 저런 것들이 떠올랐다.
기품이 넘치는 문주님과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독고령이 만난다?
“으으….”
“추우십니까, 은 소저? 몸을 떨고 있습니다.”
“아니요오…, 끔찍한 상상을 했어요오….”
은관영은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어떻게든 독고 소저를 사람답게 만들어겠어요오!’
남아있는 수는 많았다.
일단 열심히 가르칠 수 있는 만큼 예의를 때려박는 수 밖에 없었다.
“은 소저.”
“넷?!”
“…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아무 것도요.”
“혹시라도 고민거리가 있다면 언제든지 털어놓으시죠, 제가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요!”
“그… 그렇습니까?”
“네. 위 오빠는 아무 것도 안 하셔도 되요! 관영이가 알아서 할게요!”
“… 네, 알겠습니다.”
위일청이 웃으며 은관영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믿고 있겠습니다, 은 소저.”
“… 네.”
“그럼 밖으로 가볼까요? 오늘은 배가 도착했을지 모르겠군요.”
위일청이 항구로 향하자, 은관영이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항구에 도착하자 위일청의 얼굴이 밝아졌다.
“배가 있습니까?”
“아, 그렇다니깐. 오늘 밤에 산동으로 향하는 배가 하나 있다네.”
“혹시 네 명이 동승해도 되겠습니까?”
“돈만 충분하다면 상관없지.”
“감사합니다.”
“… 헌데 선실은 하나 밖에 없다네. 괜찮은가?”
위일청은 잠시 망설였으나, 은관영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은 소저…, 독고 소저가….”
“위 오빠, 어차피 독고 소저도 저희랑 같이 지내다보면 익숙해져야할 문제잖아요?”
“그렇긴 하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독고 소저도 그 쪽에 재능이 있다니깐요? 이 참에 위 오빠께서 먼저 손을…”
“은 소저.”
위일청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 죄송해요오.”
“독고 소저와는 약조를 했으니 굳이 깰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 네.”
은관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위 오빠도 답답하게…, 그냥 눈 딱 감고 덮치시지….’
동침만으로 막대한 내공을 얻을 수 있을텐데 바보같이 원칙을 지킨다.
남들은 그깟 내공을 위해 얼마나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지 너무나도 많이 보고 들어왔던 은관영이었기에 위일청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런 위일청이기에.
누구보다 약속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기에 더 좋아했다.
은관영이 뱃사람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럼 저녁만 먹고 오면 될까요?”
“그러시게. 헌데 바다에 약한 동행이 있다면 너무 많이 먹이지는 말게나.”
“괜찮아요. 저희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 글쎄요. 독고 소저가 어떨지 모르니….”
“이따 가서 물어볼게요오.”
“그럽시다. 정 안 되면 또 재워야겠죠.”
“넵. 그럼 좀 이따 올게요.”
“들어가시게.”
다시 객잔으로 돌아가던 와중, 은관영이 위일청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음? 왜 그러십니까, 은 소저?”
“위 오빠, 배에 타기 전에 미리 이것저것 챙겨두는 게 어떨까요?”
“예를 들면요?”
“… 독고 소저의 옷가지요.”
“제가 배려가 짧았군요.”
“아무래도 소현 언니의 옷은 너무 크고, 제 옷은….”
은관영의 손이 자연스레 자신의 가슴께에 올라갔다.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위일청이 피식 웃었다.
“더 자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런 거 아니예요!”
“크큭, 네. 갑시다.”
“히잉….”
돌아가는 길에 포목점에 들린 은관영은 독고령의 옷가지를 몇 개 샀다.
혹시 몰라서 장신구도 적당히 산 뒤, 객잔으로 돌아갔다.
“독고 소저~, 소현 언니~. 저 왔어…요?”
“아, 왔냐.”
“독고 소저… 맞죠?”
“그럼 다른 놈이겠냐?”
“위… 위 오빠아!!”
은관영이 당황하여 위일청을 부르자, 그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독고 소저가 또 사고라…도?”
객잔에 도착한 위일청은 눈 앞의 광경에 당황스러웠다.
“… 밑에 깔린 자는 누구입니까?”
“노극명. 노순평 아들놈.”
“크윽…! 죽여라!!”
“라고 하는데 어쩔까?”
독고령이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자, 위일청이 막아섰다.
“… 그렇게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겁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지금 참고 있는 거고.”
“그리고…”
위일청이 독고령의 머리를 가르키며 말했다.
“… 머리는 왜 다시 빨개지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