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4장. 청니와 - (7) (31/225)



〈 31화 〉4장. 청니와 - (7)

독고령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환골탈태 이후 미친년 같아 보이는 빨간 머리에 정신이 나갈듯 했지만, 독고령은 꾹 참고 있었다.


헌데 이제는 머리가 분홍색이 되었다.

“아니, 씹…. 이게 무슨 미친 일이야?”

혼란에 빠진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이 입을 열었다.


“… 아무래도 말입니다. 제가 소저의 병을 잘못 판단한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어쩌면… 소저는 구음절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뭐?”

위일청이 팔짱을 끼며 고심했다.

“… 소저는 절맥증과 비슷하지만, 다른 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뭔데?”
“… 저야 모르죠.”
“이 새끼가…!”


독고령이 발작하며 욕을 내뱉자, 은관영이 일어나 손가락을 요망하게 움직였다.

“어? 나쁜 말 하면 뭐라고 그랬죠오?”
“아니… 좀! 이 ㅆ….”
“뭐라구요오?”
“…”


독고령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악!!!”
“지… 진정하시죠, 독고 소저.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법?!”
“… 산동 아래에 강소성으로 가면 그 곳에 의녀문이 있습니다.”
“아… 그 ‘신의(神醫)’의 제자들?”
“예. 제가 그 분들과도 인연이 있기도 하고, 보타문으로 가는 길이니 한 번 들려서 정확한 병증을 확인해보는  어떻습니까?”
“…”

독고령은 갑작스런 자신의 신체 변화에 짜증이 나면서도 꾸욱 참았다.


‘… 그러고보니 신의가 있었군.’


독고진이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신의였다.


그라면 현재 자신의 상황을 알려 남자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천축까지 가지 않고도 남자가 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독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렇게 하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깐.”
“네. 그럼 이제 같이 식사하시죠.”
“식사는 무슨. 지금 밥이 넘어가게 생겼냐?!”
“어! 지금 화내시는 거에요오?”
“캬아아악!!!”


은관영이 입을 열 때마다 독고령은 답답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

‘시발…  년은 내가 반드시 조져놓는다! 반드시!!’

입을 열자니 어제의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고, 그렇다고 다물고 있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자리에 남아있으면 다시 광증이 도질  같아 결국 독고령은 밖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위일청이 백리소현을 쳐다보았다.


“하아… 백리 소저. 독고 소저를 부탁합니다.”
“… 응.”


백리소현이 독고령을 쫓아 밖으로 나가자, 위일청은 은관영을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는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독고 소저가 얌전해진겁니까?”
“헤헤헤…, 그러니깐 말이죠오….”
“호오….”

위일청은 은관영의 말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매우 흥미롭게 들었다.




“… 령 매.”
“왜.”
“… 무슨  있었어?”
“없었어, 시발.”
“… 또 그런다. 관영이 앞에서는 나쁜 말 안 하더니….”
“하아….”

한적한 공터에 도착하자 독고령이 팔을 털어 연검을 꺼내들었다.

챙.

“몸이나 좀 움직이자. 아무 생각없이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군.”
“… 그래.”


백리소현이 그녀를 마주 보며 검을 뽑아들었다.


“… 선공은 양보해줄까?”
“큭… 크큭….”
“… 응?”


독고령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 차라리  깨물고 뒤져야하나.’


무림에서 선수를 양보하겠다는 것은 ‘내가 그대보다 강하니 그 쪽이 먼저 공격하시오’ 라는 뜻이다.


먼저 무공을 배운 선배의 배려 같은 것이었다.


독고령은 이제 백리소현 같이 젊은 여인에게도 동정받는 나약한 존재였다.

당장 어젯밤만 하더라도 은관영에게 희롱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들이 자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점이었다.


혹여나 악의를 품은 존재들을 만난다면…

‘… 살아날 방법이 안 보이는군.’

당문가주 독존, 모용가주 검존.


만약에 그들을 마주친다면 독고령이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죽어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빨리… 다시 힘을…’


그 때, 고심에 빠져있던 독고령을 백리소현이 일깨웠다.

“… 내가 먼저 할까,  매?”
“아…, 미안하군.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응….”

독고령이 자세를 잡자, 백리소현이 먼저 달려들었다.

“하앗!”


깔끔한 백리소현의 일격을 막아내며 독고령은 감탄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올곧군. 아….’

여전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이 평가를 내리는 자신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독고진인가 아니면 독고령인가.’


 육체는 잠시 거쳐갈 육체인지 아니면 이대로 평생을 함께할 새로운 육체인지.

백리소현의 검술을 감상하면서도 독고령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 나는 남자인가 아니면 여자인가. 이대로 남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백리소현의 날카로운 찌르기를 흘리며 독고령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백리소현이 멀찍이 떨어져 잠시 파고들 틈을 살폈다.

‘… 강자였던 독고진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야하는가…. 나는 이제 약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독고령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 안 덤비고 뭐해, 둔치?”
“려… 령 매.”
“응?”
“… 갑자기  이리 세졌어?”
“뭐?”

어이가 없어서 백리소현을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 움직임이 엄청 좋아졌는데?”
“엥?”
“… 왜 하나도  닿지?”
“…”

생각해보니 방금까지  생각을 하면서도 백리소현의 공격을 단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게?”
“…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령 매? 갑자기 머리색도 바뀌고….”
“… 야, 둔치.”
“소현 언니.”
“됐고. 잠시 호법 좀 서줘라.”
“히잉…. 알았어.”


백리소현이 자신의 옆에 서자 독고령은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았다.

객잔에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세맥이 살아났군.’


대맥은 양유맥 외에 여전히 막혀있었지만, 자잘한 맥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가장 인상깊은 것은…


‘음기가 운공이 되네?’

그동안 말을 안 듣던 하단전의 음기를 운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방금까지 백리소현과의 비무 도중 평소처럼 자연스레 내공을 끌어올려 싸웠던 것 같았다.


‘… 아니. 얘가 왜 갑자기 움직이지?’


여자로 변한 날부터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단전에 틀어박힌 음기들을 움직이려고  번이나 노력해도 안 되다가 갑자기 음기가 움직여졌다.

비록 양유맥 하나로 밖에 운공하지 못 하지만, 워낙 정순한 기운이라 어지간한 일류 급의 무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을   있게 되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양기였다.

‘… 음기가 양기를  잡아먹네?’

천회혈에 자리잡고 있던 양기와 회음혈에 위치한 음기가 서로 싸우지 않았다.

둘이 닿기만 하면 그대로 음기가 미쳐날뛰어서 천회혈까지 음기로 꽉 채워버릴까 두려워 기를 운공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서로가 신경쓰지 않았다.

두 기운이 여전히 서로 융합되지는 않고 각기 따로 놀았지만, 상단전과 하단전의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었다.

‘… 참 기괴한 몸이 되어버렸군.’

중단전에 쌓아둔 내공은 하나도 없는데 삼화취정을 이룬 뒤에야 뚫린다는 상단전은 이미 열려있고, 내공을 담기에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는 하단전은 정순한 음기가 꽉 들어차있었다.

다시 눈을 뜬 독고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새로운 성취를 시험해보았다.

“… 령 매?”
“잠깐 떨어져있어봐.”
“… 응.”

독고령이 연검을 뽑아 바닥에  늘어뜨렸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은 뒤.

쉬익.

칼을 휘둘렀다.

‘수라나찰도법’

원래는 어지간한 성인 여성 크기 정도 되는 참마도로 휘두르던 도법이었지만, 독고령은 신경쓰지 않고 연검으로 도법을 펼쳤다.


‘… 된다!’


도법을 검으로 펼쳐내는지라 어색한 부분이 많았지만, 총 10개의 초식 중 5개는  수 있었다.


“… 뭐야, 그거? 검법이 아닌 거 같은데….”


옆에서 지켜보던 백리소현이 묻자, 독고령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수라나찰도법.”
“아…, 광마 어르신의 독문무공?”
“그래. 후우….”


한 차례 검을 휘두르고 나자, 독고령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내공을 쓸 수 있게 됐다.”
“전에 양유맥이 뚫렸다매?”
“… 그거 말고. 하단전에 모여있던 내공이 내 뜻대로 움직여.”
“진짜?”
“어. 그래서 말인데 둔치, 부탁이 있다.”
“응?”


독고령이 백리소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일검법을 가르쳐다오.”
“… 아까 그걸로 부족해?”
“안 돼.”

내공을 쓸  있다고 해도 독고령을 노리는 놈들 상대로는 워낙 약했다.


아니, 독고령을 노리는 자들이 워낙 강한 탓이었다.


‘알아둘 수 있는 모든 것은  알아둔다.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고작 내공을 끌어쓸  있음으로 만족할 생각따위 없었다.

어떻게든 전성기의 무공을 되찾고 싶었다.

게다가 여성이 된 이후로 아무리 생각해도 수라나찰도법은 지금의 몸에 맞지 않았다.

결국 베기 위주가 되는 도법은 공격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찌르기가 필요했다.

검이라는 무기가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쓸 수 있는 방법.

독고령은 다시 한 번, 백리소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 사일검법을 가르쳐줘. 그냥 찌르기가 들어간 초식만 있어도 되니깐…”
“응, 그래.”
“그렇게 간단히?”
“말했잖아. 가르쳐준다고.”
“…”

고개를 든 독고령은 마침 햇빛을 등지고 역광 속에 서있던 백리소현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가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고맙다.”

백리소현에게 대인의 풍모를 느낀 독고령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포권했다.


무공은 결코 쉽게 얻을  있는 것도 아니며, 함부로 남에게 가르쳐 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인부전(非人不傳).


인격적으로 모자란 자에겐 함부로 기술을 전수하지 말라는 선인의 격언이 독고령의 머릿 속에 떠올랐다.

“… 나한테 가르쳐줘도 정말 괜찮겠냐?”
“응? 왜?”
“내가 그 무공을 배워서 뭘 할지 알고.”
“왜 그래, 령 매. 오늘따라 자신이 없어보이네?”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애 취급하지 말라며 손을 떨쳐냈겠지만, 그녀의 손길에서 자애로움이 느껴져 독고령은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 무림을 박살낸다매?”
“…”
“광마가 되겠다매? 그치?”
“어. 그럴 거다.”
“그럼 됐지, 뭐.”

백리소현이 마치 독고령의 생각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비인부전. 인격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기술을 전수해주지 말란 말이래. 들어봤어?”
“못 들어봤을 리가.”
“근데 있지…, 세상에는 저 말을 못 지키는 사람들이 참 많아.”
“… 그렇지.”
“하지만 령 매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손을 붙잡았다.

“열심히 가르쳐줄게.”
“… 고맙다.”


독고령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신뢰를 보여주는가 싶었다.

“그러니깐 있지….”
“응?”
“… 언니.”
“…”


아, 시발.

이걸 잊고 있었네.

“언니라고 불러, 이제부터는. 알았지?”
“… 꼭 불러야하냐?”
“무림에서 배분을  따지면 안 되잖아.”
“아니…, 시발….”

‘배분으로 따지면 내가 느그 아버지보다도 높을텐데’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떽. 령 매, 언니한테 그런 나쁜 말 쓰면 되요? 안 되요?”
“…”

독고령의 몸이 조금씩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백리소현은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밀어붙였다.


그녀 또한,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할 생각이 일절도 없었기에.


“따라해 봐. 언. 니.”
“언…. 크윽…!”

독고령은  번이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악 물기를 반복했다.


‘언니’라고 한  부르는 것은 별 거 아닌 일이었다.


까짓거 무공을 가르쳐준다는데 개 같은 당문 새끼들도 아니고 이 정도 수모야 기꺼이 감수해주리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자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독고령의 내면에 깃든 무언가가 격렬히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

 때,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손을 놓았다.


“… 그렇게 싫으면 안 불러도 돼.”
“어…?”

의외로 순순히 백리소현이 포기하자 독고령의 표정이 환해졌다.


하지만 금세.

침울해져있는 백리소현의 표정을 보고 독고령이 표정을 굳혔다.

“… 나는 있지, 단 한 번도 같은 문파 사람들에게 이름을 불려본 적이 없어.”
“그… 그래?”

갑자기 무거운 얘기가 튀어나오길래 어떻게든 주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백리소현은 느릿느릿하지만, 중요한 순간엔 빠른 여인이었다.

“맨날 장문인의 딸…. 아버지에게도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어. 그 아버지란 자도 내 가족이 아니었지….”
“그… 그렇구나. 근데 지금은…”
“그래서 가족이 가지고 싶어. 하지만….”

백리소현이 침울한 얼굴로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 나는 위 오라버니의 아이를 가질 수 없어.”
“…”
“그러니깐 하다못해 동생이라도 가지고 싶었어…. 의자매든, 사매이든….”

독고령은 그제서야 백리소현이 그  것도 아닌 호칭에 왜 그리 집착했나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미칠것만 같았다.

‘아니, 시발…. 아무리 그래도…! 그치만… 이 시발!!!’

독고령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냥 까짓거 한  언니라고 부르자’와 ‘그래도 이건 좀…’ 이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서 격렬히 격돌하고 있던 와중.


백리소현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녀가 살짝 젖은 눈매로 독고령의 손가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 진짜로 가족이라 생각 안 해도 되니깐, 한 번만이라도….”
“…”


독고령은 결국  말에 넘어갔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거절하는 놈이 오히려 나쁜 놈이었다.


결국 독고령은 거친 숨을 내쉬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수치심을 이겨내기 위해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함께 입을 열었다.


“어…”
“소현. 이름이랑 같이.”
“소… 소현 언…”
“응?”
“… 소현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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