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3장. 파저강 - (8)
쫓아오는 무인들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독고령과 일행은 청니와를 향해 경신술을 이용하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 오빠, 생각보다 잘 따돌리셨네요?”
“내내 파저강으로 향하게끔 유인했으니깐요. 덕분에 엄청 먼 거리를 오갔습니다.”
“헤헤…, 알았어요. 이따 밤에는 저랑…”
“음탕한 년아!”
“히잉….”
위일청의 등에 엎혀있던 독고령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위일청이 이마를 찡그렸다.
“독고 소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시는 건…”
“왁!”
“… 제가 죄송합니다.”
독고령이 다시 한 번 위일청의 귀에 대고 큰 소리를 내자, 그의 귀가 먹먹해졌다.
위일청이 조용해지자 독고령은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 소녀경이라.’
가진 정보가 너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인 궁금증이 해소가 되지 않아 답답했다.
심법은 결국 자신의 내부로 기를 쌓는 것인데, 어떻게 소녀경은 타인의 내공을 쌓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가.
소녀경의 구결이라도 알게 된다면 조금은 편해질텐데….
백리소현과 은관영은 소녀경을 위일청에게 배운 것일까?
위일청의 독문 무공이 아니였나?
무수히 많이 떠오르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
독고령이 멍하니 위일청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금세 엊그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시발.’
위일청만 보면 자꾸만 ‘그 일’이 떠올라서 말을 걸기가 두려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천하의 독고진이?’
검신과 검선이 같이 사는 남궁세가의 대문짝을 부수고 쳐들어갈 때도 이렇지 않았다.
숨만 쉬어도 폐부가 따끔거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가 뭉글뭉글 샘솟던 당문세가와의 전투에서도 이렇게 겁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별 거 아닌 가벼운 질문 하나에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독고령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심이 올라왔다.
“짝!”
“… 독고 소저?”
독고령이 갑자기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떄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색마, 물어볼 게 있다.”
“하시죠.”
“내가… 소녀경을 배운다면 너처럼 내공을 쌓을 수 있냐?”
“… 예?”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위일청의 목소리를 들으며, 독고령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물어봤다.
“… 그러니깐! 내가 너랑 떡을 치면….”
“아~, 이해했습니다. 소녀경은 저 밖에 못 씁니다.”
“… 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독고령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발, 아까 백리소현이랑 은관영도 소녀경 익혔다매?”
“둘 다 기초 심법은 다른 걸 익혔습니다. 대성하기 오래 걸리는 심법들을 익혀서 그런지 따로 운공하면서도 축기는 소녀경으로 쌓는 편입니다.”
“뭔 소리야?”
“소녀경은 기를 좀 더 정순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게 다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내공은 원래 익힌 심법으로 쌓아두고, 제가 소녀경으로 기를 정순하게 만들어 다시 쌓는거죠. 그 과정에서 제가 내공을 좀 받기도 하고요.”
“… 채음보양 아니냐, 십새끼야?”
“… 단기적으로 내공의 양은 줄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정순한 기를 쌓으며 몸 내부의 탁기가 줄어드는 것이니…”
“채음보양 맞네, 새끼야.”
독고령이 위일청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새끼, 그래도 좀 착하게 살아서 왜 욕 처먹는가 궁금했는데 색마라 불릴만했네.”
“… 왜 그러십니까, 진짜. 탁기 배출에도 도움이 된다니깐요? 저와 열 밤만 보내면 벌모세수가 따로 없습니다.”
“에라이, 새끼야. 야, 하오문! 남자로 변해!”
“예에? 저요?”
“그래, 너 이 새끼야.”
“히잉…, 그냥 위 오빠 등에 엎히면 안 돼요?”
“시발, 이 새끼 등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히이잉….”
은관영은 투덜대면서도 몸을 꾸물거리더니 아까 그 수염난 거한의 외형으로 변했다.
“… 너는 그걸로 밖에 못 변하냐?”
“변하려면 그 사람의 혈도 위치나 뼈 위치를 잘 알아야해서요오…. 익숙한 게 편해요.”
“… 시발.”
독고령이 훌쩍 뛰어올라 은관영의 목에 팔을 걸자, 그녀가 두 손으로 독고령의 엉덩이를 받쳤다.
은관영의 손이 독고령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며 말했다.
“아, 독고 소저는 엉덩이도 복스러우시… 케엑!”
“뒤진다…!”
“사… 살려주세요오.”
독고령이 은관영의 목을 조르다가 놔주었다.
“… 입 닥치고 가자. 알겠지?”
“후에엥….”
은관영의 등에 엎혀가면서 독고령은 고민했다.
‘… 심법이라.’
결국엔 스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심법을 쌓을지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
빠악!
노순평의 손이 움직이자, 노극명의 얼굴에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노극명은 담담히 그의 주먹을 인내했다.
“이…! 이 멍청한 녀석…!!!”
“…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 잡은 원수의 딸을 놓쳐?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네 놈이 앞서서 지키고 있어야지!!”
“죽여주십시오….”
“죽여?! 내가 너를?!!”
노순평의 몸에서 살기가 일었다.
“죽음으로 도망치려 들지 마라! 더군다나 내 자식이면 더더욱!!”
“…”
“오늘부로 네 놈은 모용세가의 일원이 아니다.”
“아버지!!”
“갈!!”
노순평이 소리쳤다.
“아버지기 이전에 모용세가의 장로다! 장로로서 내리는 판단이니 달게 받아들여라!”
“허… 허나….”
“그 년을 쫓아라. 네가 다시 돌아올 방법은 그 뿐이다.”
“…”
노순평의 선고에 노극명은 허탈감에 그저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광마의 딸을 붙잡았을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모용세가가 오랜 은원을 해소할 줄만 알았다.
광마와 싸우다가 힘에 부쳐 도망가신 아버지가 매일 밤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다 봐왔던 노극명이기에 그 또한 독고진에게 어마어마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라도, 그 딸년에게라도 치욕을 주고 싶었다.
허나 가둬둔 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 년의 몸이 꿀렁이더니 남자로 변했다.
그제서야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쥐며, 노극명이 입을 열었다.
“… 반드시 그 년의 목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헛소리. 그 옆에 붙어있을 색마는 네 상대가 아니다.”
“… 알고 있습니다. 허나, 반드시 광마의 딸 년의 수급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노극명이 핏발 선 눈으로 노순평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순평이 돈이 든 전낭을 그에게 내던지며 말했다.
“가라.”
“존명.”
멀어지는 노극명의 등을 보며 노순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색마는 물러터진 놈이었다.
그 많은 모용세가의 무인과 싸우면서도 중상을 입은 무인은 있어도 목숨을 잃은 무인은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죽지 않게 상해를 입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노순평은 새삼스레 색마의 무공 수위에 다시 한 번 놀랐다.
‘… 젊은 나이에 어찌 그리 고강한가….’
아들이 죽지 않으리라는 약간의 기쁨과 함께, 장로의 위치에 선 자로서 이런 처분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갑갑함이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쳤다.
“외숙부님.”
“2공자….”
뒤에서 들리는 모용준의 목소리를 듣고, 노순평이 그를 바라보았다.
“… 극명이를 저리 보내셔도 괜찮겠습니까?”
“별 수 없지요. 자신의 과오를 되잡을 기회를 준 것이니 저 놈도 다행이라 여길 겁니다.”
“가끔 보면 외숙부님이 아버지보다 더 엄하신 듯 합니다.”
“허허, 그럼 가주님께 부탁드려 앞으로 2공자를 더 엄히 다뤄달라 청해야겠군요.”
“예, 그리 말해주십시오.”
모용준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 오늘의 치욕을 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물론 그러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용세가의 핏줄 답지요.”
전의를 불태우는 모용준을 잠시 바라보다, 노순평은 다시 자신의 아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저 놈은 왜 저 곳으로 간 게야…. 고작해야 작은 어촌이 있는 곳이거늘.’
노순평은 잠시 고민하다가 금세 신경을 껐다.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니 알아서 하겠거니와 하며.
*
강호 어딘가의 한적한 객잔.
객잔의 1층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저 졸고 있는 노인과 어린 꼬마 하나 뿐이었다.
그 허름한 객잔에 한 젊은 사내가 들어서자, 노인이 눈을 슬쩍 뜨고는 그를 쳐다봤다.
“…”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객잔의 2층을 가르키자,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가장 구석진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곳엔 한 여인이 있었다.
온 몸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어 기품이 넘쳐보이면서도, 동시에 그 눈매가 요사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뺐는 여인이었다.
누구든 그녀를 보면 자연스레 ‘경국지색’이라는 찬사가 떠오를 미녀였다.
그 미녀가 바로 하오문주이며, 경국이라 불리는 강호사절화의 일원이자, 무림맹에서 음존(音尊)이라 부르는 여인, 은약벽이었다.
은약벽을 마주치는 순간,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문주님.”
“어서와요, 은호. 차를 마시겠어요?”
“주시면 받겠습니다.”
“이리로.”
차를 권하는 가벼운 손동작 하나에도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이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은호라 불린 사내는 이에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하여 마음이 진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은약벽이 입을 열었다.
“은호.”
“… 예, 문주님.”
“그동안 수행이 조금 부족했나보군요. 마음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여요.”
“…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사천은 어떘나요?”
“…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흐음…, 손님께서 실망하시겠군요.”
은약벽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서책을 넘기며 그 곳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아, 참. 소식은 들었나요?”
“… 독고진 어르신의 여식 말입니까?”
“맞아요. 참 재밌는 소문이죠?”
“…”
개방의 묵선과 무림맹주 검선이 공인한 이야기를 ‘소문’으로 치부하는 그녀를 보며, 은호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저…, 그….”
“하아…, 은호. 하오문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를 가려내는 눈이라고 몇 번을 말했나요. 무공은 그 뒤라도 상관없어요.”
“… 죄송합니다, 문주님.”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
은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그녀에게 말했다.
“… 진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무림맹과 개방이 보증한 정보입니다. 거기에 빙제와 녹림채도 한 몫 끼었다고 들었고요.”
“쯔쯔쯧.”
은약벽이 혀를 차자, 은호가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 죄송합니다, 문주님.”
“한 번 만 더 사과하면 진짜 다시는 안 부를 줄 알아요.”
“예! 부디 아둔한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광마의 여식이 가짜라고 생각해요.”
은약벽이 서책을 한 장 넘기고, 또 그 곳에 무언가를 써내려가며 말했다.
“내가 직접 보고, 얘기를 나눈 독고진이란 자는 야수였어요. 전장을 쫓아다니고, 원수를 쫓아다니고, 무뢰한들을 쫓아다니죠.”
“…”
“그래서 그의 마음에 파고 들어갈 여인이 없었어요. 그거 아나요?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독고진이 동자공을 익혔다 생각했어요.”
“몇 번 얘기하셨습니다.”
“천하에서 저를 그냥 지나가는 여성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 셋이나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안 드네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을 복수를 위해 떠돌아다니던 자가 가정이 생긴다는 것은 마음의 안식을 얻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않겠어요?”
“… 그렇게 생각합니다.”
은약벽이 서책을 접고는, 또 다른 서책을 꺼내들어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손님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끊긴 곳에서, 여자에게 관심도 없던 이가, 제 눈을 피해서 어여쁜 딸 아이를 키웠고, 그 딸을 무림맹에게 들켰다….”
“…”
“우연이라 생각하나요?”
“… 수상하긴 하군요.”
“그래서 은호, 당신을 보내고 싶군요.”
“… 거기엔 사매가 있지 않습니까? 옥면공자랑 같이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서책을 써내려가던 은약벽의 손이 멈춰섰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은호를 쳐다보자, 그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 은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문주님!”
“제 말에 대꾸를 한 것은 죽을 죄가 못 되요. 하지만 소문주 경쟁을 시작도 안 하고 포기하는 못난 이가 제가 키운 제자 중에 있는 것은 조금 화가 나네요.”
“… 저는 문주 감이 못 됩니다.”
“하아….”
은약벽이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누르며 자신이 방금까지 쓴 서책을 은호에게 던졌다.
“광마 독고진, 옥면공자 위일청, 점창의 백리소현에 대한 정보예요.”
“… 예.”
“관영이가 광마의 여식과 함께 산동으로 온다더군요. 그 마지막 장에 광마의 딸이라 자청하는 독고령이란 소녀에 대한 정보를 채워오세요.”
“목숨을 바쳐서 성공시키겠습니다.”
“… 목숨까진 필요없고요. 가봐요.”
“예!”
은호가 허리를 깊히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것을 보고 은약벽은 또 다른 빈 서책을 꺼내들어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손이 멈춰섰다.
‘… 하필 위일청. 하필 독고진.’
하필이면 강호에서 제일 위험한 두 인물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은약벽의 입에 미소가 머물렀다.
어느 쪽이든, 그 사이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하오문일 것이었다.
‘부디 관영이가 잘 해주길.’
은약벽이 다시 멈춘 손을 움직이며 새 서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