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3장. 파저강 - (4)
여자의 몸으로 돌아온 은관영을 보며 독고령은 신기했다.
‘… 축골공이 실존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크기 조절이 마음대로 가능하다니. 게다가 체모의 색마저 변하지 않는가?’
은관영은 자그마했다.
독고령의 눈가에 겨우 닿을만한 자그마한 키.
그에 어울리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 자그마한 가슴.
그리고 무엇보다 은색의 머리카락과 사람을 홀릴듯이 요망한 붉은 눈이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은관영의 모습이 워낙 신기해서 독고령이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은관영은 자신의 가슴을 두 팔로 가렸다.
“… 작다고 생각하셨죠?!”
“뭐?”
“… 크게 만들 수 있거든요!”
“… 누가 뭐래, 새끼야?”
독고령이 팔을 들자, 은관영이 잽싸게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며 몸을 움츠렸다.
“때… 때리지 마세요오…!”
“…”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새끼…, 존나 강한데 이러니깐 또 약해보이네.’
독고령은 새삼스레 강호의 오랜 격언인 ‘무림에서는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를 조심하라’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귀여운 소녀였지만, 다름 아닌 ‘그 은약벽’의 제자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줄여서 경국 ‘은약벽’의 제자가 은관영이었다.
성까지 받은 걸로 보아 분명 아끼는 제자일테고,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비범함을 갖추고 있는 무인임이 틀림없다.
그러자 은관영을 바라보는 독고령의 시선이 바뀌었다.
‘… 엄청나게 약해보이는 게 오히려 무기인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어 오히려 허점을 찌르는 타고난 무인이 아닌가.
지금 당장은 큰 옷이 작아진 몸에 맞지않아, 허우적대며 옷을 털어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얼빵한 모습도….
“꺄악!”
철푸덕.
은관영이 결국 옷을 벗지 못 하고, 거창하게 바닥에 넘어지는 꼴을 보며 독고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 백리소현이 둔치가 아니라 네가 둔치구나.”
“도… 도와주세요, 독고 소저!”
“이 멍청한 년!”
은관영이 누워서 버둥거리고 있는 꼴을 보다 못한 독고령이 그녀를 일으켜세워줬다.
“고… 고맙습니다, 소저.”
“…”
독고령은 확신했다.
얘는 그냥 무공을 좀 잘하지, 어딘가 어설픈 아이다.
“… 내가 너를 믿고 도망치는 게 맞는 지 모르겠다.”
“자… 자신 있어요! 저 진짜 하오문의 기재랍니다?”
“… 하오문에 인재가 다 뒤졌나보구나.”
“아… 아니에요!”
은관영이 얼굴을 붉히며 독고령에게 항의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독고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옷이나 입어라.”
“… 네.”
은관영이 방금까지 자신이 입었던 옷을 뒤적거리더니 그 안에서 자그마한 전낭을 하나 꺼냈다.
전낭에서 검은색으로 둘둘 말린 무언가를 툴툴 털어내더니, 금세 잠행복의 형태가 되었다.
“… 뭐냐, 그거? 엄청 신기하네.”
“히힛, 독각화망의 표피랍니다.”
“… 뭐?”
뿔이 하나 달린 어마어마한 크기의 영물이 독각화망이었다.
그 피부는 철보다 단단하여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감히 뚫을 수도 없었고, 속에 품고 있던 독은 절대고수의 호신강기도 뚫고 나오며, 몸에 품고 있는 환단은 누가 먹든 천고의 영약이 되는 영물이 독각화망이었다.
“… 진짜로?”
“네. 이것도 문주님께서 주셨답니다, 후훗.”
“…”
자랑하듯 으시대는 은관영을 보자, 독고령은 괜히 심통이 나 그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떠오른 바를 그대로 실행하고자 한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녀는 손에 허전함을 느꼈다.
“… 내 연검!”
“네?”
“아까 씨…, 연검. 하아…, 그거 존나 좋은 칼이던데….”
“챙겨놨는데요?”
“어?”
챙!
은관영이 발을 허공에 털자, 독고령의 연검이 다시 나타났다.
“제가 미리 챙겨놨지요, 후후후.”
“… 고맙다.”
“별 말씀을요.”
은관영은 알면 알수록 독고령을 헷갈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멍청한가 싶으면서도 영특하고, 뭔가 얼이 빠졌다 싶으면서도 세심하고.
‘… 제일 짜증나는 부류네.’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인종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뭐 어쩔건데?”
“땅을 팔 거예요!”
“땅?”
“네. 그리고 땅 아래에서 숨어있을 거랍니다!”
“… 뭐?”
독고령이 당황하자, 은관영은 또 어디선가 잘라둔 대나무 두 개를 꺼냈다.
“자! 이걸 숨통으로 쓰고, 저희는 땅 밑에서 옥면공자가 오기를 기다리는거죠!”
“… 걔가 오는지는 어떻게 아는데?”
“아마 노순평 대협에게 쫓겨오지 않을까요? 그럼 주변이 시끄러울테고, 그 때 저희가 짜잔! 하고 나타는거죠.”
“… 나타나서는?”
“도망쳐야죠.”
“…”
앞이 보이지 않는 계책이었다.
“… 우리는 고작 네 명. 그 중에서 나는 전력이 못 되니 사실상 세명. 적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무인의 포위망에 추격대도 있는데 뚫을 수 있냐?”
“어?! 스스로 전력이 못 되는 걸 알고 계셨어요?”
“이게 뒤질라고!”
“히이잉….”
독고령이 또 다시 주먹을 들어올리자, 은관영이 머리를 두 손으로 막았다.
“… 그러면 어떻게 해요. 사실이잖아요오….”
“… 시발.”
은관영의 말이 맞았다.
독고령은 지금 무능하고, 무력했다.
도움이라고 되지 않는 짐덩어리였다.
“시발…. 내가 기어코 되찾고만다.”
“… 뭘요?”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짐 덩어리는 시체처럼 흙바닥 밑에서 쳐자고 있으면 되냐?”
“… 그렇게까지 자조하시지는 마시고요오….”
“뭐, 어쩌라고!”
“히이잉….”
“…”
독고령이 윽박질러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백리소현과 달리 은관영은 사사건건 슬프게 반응했다.
‘피곤한 년이네, 이거….’
독고령이 아무 짓도 안 하자, 은관영이 스리슬쩍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귀식대법 해드릴게요.”
“… 너 가만보니깐 별의별 무공을 다 안다?”
“헤헤…, 제가 잡기에 좀 능해서요.”
“…”
귀식대법(龜息大法)은 단순히 호흡만 멈추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가사 직전의 상태로 만드는 특이한 무공이었다.
보통 살수들이 장기간 숨어있을 때 쓰는 수법이었고, 귀식대법을 행한 사람의 몸은 몇날 며칠을 먹지도 않아도 되며 인기척도 사라진다.
‘… 색마가 오기를 기다리기엔 확실히 최고의 방법이군.’
그래도 다 계획이 있다 생각하며 은관영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 미리 소피는 보셔야해요. 안 그러면 자는 도중 새어나오더라고요.”
“… 경험담 같이 얘기한다?”
“앗! … 비밀이에요?”
“하아….”
은관영에게 뭘 믿고 시켜도 되나 모르겠다.
귀식대법을 맡겨놨다가 그대로 자신이 죽지 않을까 걱정하며 독고령은 자리를 떴다.
“어… 어디 가세요?!”
“오줌 싸러! 네가 보고 오라매.”
“아…,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
별 걸 다 걱정한다 싶었다.
*
백리소현과 함께 도망치던 위일청은 주변을 잠시 살피고는 멈춰섰다.
“후우…, 여기서 잠깐 쉬어가죠.”
“응….”
잠시 나무에 몸을 기대고 백리소현이 바닥에 앉자, 위일청이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마시겠습니까?”
“… 응. 고마워.”
백리소현이 물을 마시고는 돌려주며 말했다.
“… 미안해, 위 오라버니. 내가 약해서….”
“… 아닙니다. 백리 소저가 약하기보다는 모용세가의 2공자가 강한 거지요.”
“… 그래?”
“망나니라고는 하나 명문세가의 도련님입니다. 어릴 적부터 영약도 많이 먹으며, 좋은 스승 아래에서 벌모세수까지 받았겠죠.”
“… 내공은 나도 많잖아.”
“하지만 아직 무공에 익숙하진 않으니깐요. 너무 상심하지 마시죠.”
“… 응.”
백리소현이 무릎을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령 매의 사저가 되고 싶은데…. 이래서 될 수 있을까?”
“풉, 도망치는 건 걱정이 안 되시나봅니다.”
“… 그거야 위 오라버니가 같이 있으니깐.”
“신뢰받고 있는 거 같아 기분이 좋군요.”
“… 응.”
위일청이 손을 내밀었다.
“다시 출발할까요? 금세 쫓아올 겁니다.”
“… 응. 힘낼게.”
백리소현이 위일청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려는 순간, 그 사이로 비도가 날아왔다.
챙!
위일청이 연검을 휘둘러 비도를 쳐냈다.
비도가 날아온 방향을 보자, 그 곳에 있떤 다수의 무인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벌써 쫓아왔는가…!’
위일청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그의 눈이 옆에 있는 백리소현에게 향했다.
“백리 소저. 체력은 어떻습니까?”
“… 괜찮아.”
“솔직하게요.”
“… 정말로 괜찮아.”
“…”
위일청이 크게 칼을 휘두르자, 나무들과 함께 몇몇의 무인들이 베였다.
“커억!”
“요사한 검술이다! 조심하라!!”
위일청의 검기에 무인들이 주춤거리자, 그 모습을 보며 그가 잽싸게 전음을 보냈다.
[백리 소저, 이대로 파저강으로 먼저 가십시오.]
[… 위 오라버니는?]
[이대로는 추격대가 끝까지 쫓아올 것입니다. 시간을 벌어야죠. 백리 소저 혼자는 괜찮지만, 독고 소저까지 껴안고 탈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괜찮아?]
걱정스러운 백리소현의 전음을 듣고, 위일청이 미소지었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약조하지요.]
[… 응.]
백리소현은 위일청을 잠시 바라보다가 금세 몸을 날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일청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알기에 믿고 움직였다.
“한 년이 도망친다!”
“쫓아라!!”
도망치는 백리소현을 보고 몇몇의 무인들이 더 달려들었지만, 위일청이 그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검을 길게 늘어뜨리며 백리소현의 뒤를 막는 무인들을 막아섰다.
“칙칙한 남정네에게 둘러쌓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저랑 어울려주시지요.”
“노옴! 어딜 입을 놀리는게냐!!”
“… 저는 가능한 모용세가와 은원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위일청이 모용세가의 무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은원을 질 일이 있다면…, 철저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만두실 생각은 없습니까?”
“가문의 원수를 보호하고 있는 자를 어찌 그냥 보내겠는가?”
“… 노 선배. 그새 쫓아오셨습니까?”
“광마의 딸 년을 잡기 위해서라면 중원의 어디라도 쫓아갈 수 있다네.”
스르릉.
노순평이 칼을 뽑아들으며 말했다.
“죽어서라도 원귀가 되어 쫓을 터이니 자네가 포기하는 게 어떤가?”
“… 어쩔 수 없군요.”
위일청이 다시 칼자루를 고쳐잡는 것을 보고 노순평이 외쳤다.
“쳐라!!”
“와아아!!!”
달려드는 모용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면서도 위일청의 마음은 계속 등 뒤로 향했다.
혹시나 백리소현을 쫓는 이가 있을까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허억… 허억….”
모용세가와 위일청의 싸움은 밤새 이어졌다.
위일청이 적당히 무인들을 가로막아 큰 검기를 휘두른 뒤, 그들을 주춤거리게 만들고는 도망치고, 다시 쫓아오고.
때로는 흙을 퍼올려 시야를 가로막고,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길을 막고, 그것마저 안 되면 다시 멈춰서 한동안 싸움을 반복했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 노순평이었다.
노순평은 나이를 헛먹은 것이 아니라는 듯, 끝까지 조심스럽게, 천천히 위일청을 압박해들어왔다.
다른 무인들의 틈에 섞여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다가 위일청의 자세가 무너지는 한 순간을 향해 찔러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위일청은 기겁을 하며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했다.
하지만 위일청의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는지, 쫓아오는 무인의 수는 점점 적어졌고, 결국 남은 것은 노순평과 십 여명이 채 안 되는 무인들 뿐이었다.
“허억…, 후우….”
위일청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물을 마시기 위해 물 주머니를 꺼냈다가, 안에 든 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 빨리 싸움을 끝내야겠군.’
막대한 내공을 가진 그였으나 상대의 수가 수인지라 내공이 많이 드는 큰 공격 위주로만 감행했고, 도망치는 내내 경신술을 극성으로 펼쳤으니 위일청도 슬슬 남은 내공이 위험했다.
그 때, 그의 귓가에 물소리가 들렸다.
‘… 강가 근처군. 그렇다면…!’
위일청이 근처의 나무들을 둘러보자, 나무 중 하나에서 하오문이 남긴 표식을 찾았다.
아마 은관영이 남긴 표식이리라 생각하며 표식을 따라가자, 자세히 보지 않고는 쉽게 찾을 수 없는 대나무 두 개가 땅 아래에서 솟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위일청이 대나무에 다가가 그 숨통을 틀어막자, 잠시 후.
“… 시발! 커헉…, 켁…!”
독고령이 흙바닥을 뚫고 튀어나왔다.
“아이, 씨발…. 뒈지는 줄 알았네…. 왔냐?”
“하… 하핫….”
위일청이 독고령을 보고 웃었다.
“… 뭐야? 왜 웃어?”
“아…, 아닙니다. 한결 같으신 독고 소저를 보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왜 네가 나를 욕하는 거 같지?”
“정말 아닙니다. 하아…, 한 시름 놓았네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위일청을 보며, 독고령이 물었다.
“… 색마.”
“예.”
“… 둔치는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