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2장. 색마지약 - (6)
넘어온 강가에서 비연과 노인의 시체를 발견하고, 독고진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시발 새끼들…!”
살려주겠다고 약조했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한 사람이라 굳이 건드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비연을 칼로 찌르는 순간까지도 당황했지만, 너무나도 평온한 모용벽과 노순평의 표정을 보고 정말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바보 같았다.
씁쓸한 감정을 느끼며 둘의 시신을 수습해 강가 주변에 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두고, 그 앞에서 독고진은 다짐했다.
“… 약조하마. 나는 저 개새끼들을 반드시 조져놓으마.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절대 약속을 허투루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짐하며 독고진은 한 노인과 한 소녀가 파묻힌 무덤을 떠났다.
이후 독고진은 모용세가의 세력이 널리 퍼진 요녕을 지나 천진에 찾아갔다.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정보세력, 개방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였다.
개방 천진 지부에 쳐들어간 독고진이 원한 것은 당연하게도 정보였다.
가족의 원수인 당문과 스스로가 내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모용세가에 관련된 정보.
하지만 개방 또한 모용세가와 당문과 함께 같은 무림맹에 속한 일원이었기에 당연하게 정보를 내어주지 않았고, 독고진은 또 다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개방의 장로를 만나 죽을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줬던 것이 하오문주였다.
“… 넌 누구지?”
“하오문의 소문주이자 차기 문주, 은약벽이라고 해요.”
“… 나를 왜 구해준거지?”
“당신이 필요해서.”
“하…. 또 이 지랄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독고진은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몸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은약벽이 웃었다.
“운이 좋은 줄 아세요. 개방의 장로에게 덤벼 살아난 거 자체가 천운이랍니다.”
“그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리는군. 그 놈의 악운이니 뭐니….”
“그럼 좀 더 솔깃한 정보를 알려드릴까요?”
“관심없어. 살려준 건 고맙지만, 너 같이 속이 음흉한 년과는….”
“당문의 비기라고 불리는 ‘절독’의 제조지는 어떤가요?”
“!!”
그 말을 듣자, 독고진이 눈을 부릅떴다.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아니…, 왜 나한테 가르쳐주려고 하는 거지?”
“저는 어리답니다. 하오문은 약하고요.”
“…”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하오문주를 보고, 광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틈이 필요하단 얘기랍니다.”
“틈?”
“저희 하오문은 오고가는 정보를 사고 팔죠. 기녀, 마부, 도둑들과 같이 강호의 밑바닥에 서식하는 인간들이 모인 문파고요.”
“… 그게 왜?”
“정보의 가치는 높을수록 좋은데…, 애석하게도 저희가 아는 정보는 개방도 알더군요. 다른 이가 아는 정보에는 가치가 없죠. 해서….”
은약벽이 부채를 펼쳐 자신의 입을 가렸다.
“저희만 아는 정보를 직접 만들어서 팔까 싶더군요. 그래서 개방의 빈 틈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랄났군. 내가 깽판을 치면, 내 정보를 팔겠다?”
“그렇답니다.”
독고진의 표정이 사나워진 것을 봤음에도 은약벽이 웃었다.
“광마 대협께서는 이유는 모르지만, 당문을 멸문시키고자 하고, 저희는 개방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취하고 싶습니다. 서로 이해가 맞는 관계 아닌가요?”
“…”
“원하는 정보를 모두 제공해드리죠. 어디까지나 대협이 원하실 경우에만요.”
“대협, 대협…. 좆 같은 소리 집어치워.”
“…”
“그냥 독고진이라고 불러라.”
“계약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 그래. 다만, 한 가지 기억해두도록.”
“경청하겠습니다.”
독고진이 이를 내보이며 살기를 드러냈다.
“나는 약속을 어기는 새끼들을 싫어해. 죽일만큼 싫어하지.”
“어머.”
그의 흉폭한 기세를 맞이하면서도, 은약벽은 대범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그렇답니다.”
“뜻이 잘 맞겠군.”
그렇게 하오문과 광마의 계약이 성립하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하시죠.”
“모용벽은 얼마나 강하지?”
“… 모용 가주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죠?”
“내가 그 새끼를 족쳐야하거든.”
“…”
은약벽이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대협께서는….”
“독고진. 대협이란 단어가 좆같으면 하다못해 다른 단어를 선택해. 대협이란 소리만 들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군.”
“… 실례지만, 손님께서 왜 모용 가주와 은원이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개새끼가 나를 태우려던 뱃사공과 그 손녀를 죽였다.”
“…”
지금까지 미동도 없던 은약벽의 가면에 살짝 금이 갔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바로하며, 은약벽이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 손님께서는 정말 주제를 모르시는군요.”
“뭐?”
“… 모용 가주는 신, 선, 존, 제, 왕, 군, 성의 ‘검존’입니다.”
“뭐야, 그건?”
광마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자, 은약벽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밖에서 기녀가 나와 붓과 종이를 가져다주었다.
붓을 든 은약벽은 종이를 붙잡고, 독고진을 쳐다보았다.
“무림 백대고수라고 들어보셨나요?”
“무림맹에서 10년에 한 번씩 발표하는 개지랄이지.”
“하지만 동시에 강호인들에게 선포하는 것과도 같죠.”
“… 선포?”
“함부로 대들지 마라. 우리 무림맹에 속한 무인들은 이렇게 강하다, 하고요.”
“지들끼리 치고 박아서 정한 것도 아닌 그 순위를 누가 믿는다고, 하!”
“하지만 그 순위는 꽤나 정확하답니다?”
은약벽이 제일 위에서부터 한자를 하나씩 적어나갔다.
“같은 정파 무인끼리 싸워서 힘을 결정할 수는 없으나, 가장 위의 강자가 그 아래에 있는 무인들의 순위를 정해준다면 아무 문제 없겠죠. 그래서 전대 무림맹주부터 이러한 제도를 도입했답니다.”
은약벽이 제일 처음에 ‘신(神)’이라는 한자를 써내렸다.
“검신, 투신, 권신.”
그 다음에 적은 한자는 ‘선(仙)’이였다.
“검선, 독선, 도선. 권선. 화선. 묵선.”
마지막으로 ‘존(尊)’을 썼다.
“존자들은 많죠. 그 중에서도 모용 가주는 ‘검존’. 단순히 계산해도 백도 무림에서 20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가 바로 모용 가주입니다.”
“… 나는 어디쯤이지?”
“순위에 없습니다.”
쾅!
광마가 주먹을 내려치자, 은약벽이 또 한 번 얼굴을 구겼다.
“… 기루를 부수지 말아주세요.”
“미안하군. 내가 광증이 있어서.”
“…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으신데요?”
“여튼. 이해가 안 가는군. 그럼 노순평은?”
“… 모용세가의 비수, 노순평 대협은 ‘검왕’입니다. 위에서부터 셀 경우에 무림백대고수 중 중간보다 아래 쯤에 위치하겠군요.”
“…”
으득.
생각보다 자신과 노순평에 대한 평가가 많이 밀리자, 무림백대고수의 순위를 믿지 않으면서도 독고진의 마음 속에 불만이 차올랐다.
“시발, 좆 같군.”
“… 손님께서는 아마 제대로 순위를 매긴다면 그래도 ‘도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깐 순위에 없다며.”
“… 무림맹에서 발표하는 거니깐, 무림맹 소속이 아닌 무인들은 당연히 제외되어 있답니다?”
“시발….”
입으로는 툴툴대면서 독고진은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손님이 목표하는 자는 ’독선(毒仙)’이시죠?”
“… 그 개새끼를 쳐죽이는 데 인생을 바치고 있지.”
“갈 길이 멀군요.”
“…”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하는 은약벽을 보고 독고진이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은약벽은 독고진의 사나운 인상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대로 당문에게 덤비신다면 손님께서는 개죽음을 당할 거랍니다. 아직은 약하시니깐 당문이 별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옳겠군요.”
“… 좆같은 말이지만, 사실이군.”
“…”
독고진이 담담하게 인정하자, 은약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후후…, 생각보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뭐가?”
“아니랍니다. 소녀의 실언이니 흘려들으시지요. 그래서…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은약벽이 서책을 내밀었다.
“… 뭐지, 이건?”
“무림백대고수의 명부랍니다. 그들의 대략적인 거주지에 대해 적어뒀죠.”
“… 이걸 왜 주는 거지?”
“제일 아래의 ‘성’급부터 차근차근 깨부수고 올라가시죠.”
“… 이렇게 해서 너는 뭘 얻지?”
“모든 걸 얻는 답니다.”
은약벽이 다시 한 번 부채로 입을 가렸다.
독고진은 은약벽이 웃을 때마다 부채로 입을 가리는 게 참 특이하다 생각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 더 설명이 필요한가요?”
“…”
하지만 은약벽이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자, 독고진은 그냥 서책을 받아들였다.
“가서 조지면 끝인가?”
“가능하면 싸우기 전에 기루라도 들러서 저희에게 얘기해주시면 좋겠네요. 필요한 경비는 저희 쪽에서 지불하죠.”
“굳이 안 얘기해도 된다는 소리군.”
“그렇답니다.”
“… 알았다. 하지. 대신 당문과 모용세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라.”
“그러지요.”
은약벽이 일어서고는 고개를 숙이며 독고진에게 인사하였다.
“부디 손님께서 오랫동안 죽지 않고, 가능한 큰 파란을 일으키시길 소녀가 기원합니다.”
“… 지랄 맞은 년에게 걸린 거 같군.”
“손님께서도 지랄맞으시답니다, 후후.”
“…”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저희 아이들을 불러주세요. 물론 밤이 외로우실 때도 마찬가지랍니다. 너무 거칠게만 다루지 말아주세요.”
“… 필요없어.”
“후후, 그럼.”
은약벽이 나가자, 독고진은 다시 침소에 누워 그녀가 남기고 간 서책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독고진의 미소가 깊어졌다.
“쳐죽일 새끼들이 참으로 많군.”
그렇게 독고진은 무림백대고수의 서열을 새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고, 모용세가의 본가에 쳐들어간 날.
애석하게도 모용벽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독고진은 모용세가의 무인 300여명과 ‘검왕’ 노순평을 꺾고 강호무림으로부터 새로운 별호를 받게 되었다.
‘추혈광마’.
피를 쫓는 미친 마귀.
*
눈을 뜬 독고령은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좆 같은 꿈을 꾸었군….’
오랜만에 노순평을 만나서 그런지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목이 타는 갈증과 함께 머리가 아팠다.
독고령이 손을 들어 머리를 부여잡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손에 묶인 붕대를 보았다.
“…응?”
언제 이런 걸 묶어놨지라고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집중하여 주변을 확인하던 독고령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흐읏… 읏….”
여인의 신음소리였다.
“…시발.”
독고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도 조금 집중하자, 그새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널부러진 옷 가지, 백리소현의 신음소리, 보이지 않는 색마, 깨질 것 같은 머리.
독고령은 금세 자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 술 먹다 잠들었군.’
자기 전까지 내내 술을 퍼마셨던 것은 기억나지만, 그 뒤의 기억이 없다.
“물….”
객실 내에 물을 놔둔 곳을 찾아 독고령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애석하게도 물은 그녀의 객실 안에 없었다.
‘… 시발.’
다시 한 번 집중하여 소리를 듣자, 백리소현의 신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둘의 열락의 시간이 끝났다 생각한 독고령은 당당하게 색마의 문을 열어재꼈다.
“색마, 물 좀 마시…자?”
문을 열고 들어간 독고령은 다시 세차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문에다 대고 소리 질렀다.
“야… 야이 미친 새끼야!”
“… 소저, 야밤에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시면 곤란합니다.”
“아니…, 그…. 시발….”
“물을 마시고 싶으시면 들어오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미쳤냐! 거기 들어가게?!”
그 짧은 순간, 독고령은 많은 것을 보았다.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백리소현,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희멀건한 액체.
그리고 위일청의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양물.
‘미… 미친 새끼. 뭐 저리 크냐, 시발….’
독고령은 괜히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나체의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손을 붙잡았다.
“… 령 매, 물 줘?”
“아… 아니. 나중에.”
“… 응? 술 때문에 갈증이 있었던 거 아니였어?”
“괘… 괜찮으니깐 나중에!”
독고령이 어떻게든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떼어내려고 하던 순간, 위일청이 입을 열었다.
“그냥 들어오시죠, 소저. 할 얘기도 있으니 말입니다.”
“꺼… 꺼져, 미친놈아! 옷부터 입고 다시 불러!”
“… 어차피 언젠가 보실 건데 미리…, 아.”
위일청이 씨익 웃었다.
“백리 소저.”
“… 응?”
“독고 소저를 붙잡아주시죠.”
“…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