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화 〉1장. 광마였던 소녀 - (6) (7/225)



〈 7화 〉1장. 광마였던 소녀 - (6)

“그래서, 색마.”
“네, 말하시죠.”
“어제 못  얘기나 하지. 거래 얘기 말이야.”
“…”


위일청이 차를 후루룹 마시고는 말했다.

“식사를 끝내고 하시죠.”
“굳이?”
“제가 방금 아침수련을 마치고 와서 땀을 흘린 상태입니다. 좀 씻고 싶군요.”
“옘병. 무인에게 땀 냄새가 흉이 된다고 생각하나?”
“소저도 씻으셔야죠.”

위일청이 독고진의 소맷자락을 가리켰다.


독고진이 고개를 숙여 소매를 확인하자 그 곳에는 검붉게 말라 붙은 피가 있었다.


어제 밤, 조창을 토막내며 묻은 피였다.


“…아, 젠장.”
“백리 소저에게 의복을 빌리시죠.”
“그래.”
“거래에 관한 건 그 뒤에 얘기하겠습니다만, 미리 물어볼 게 있습니다.”
“해 봐.”


위일청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진맥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 굳이?”
“중요한 일입니다.”
“…”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위일청이 진지하게 말하자 독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군.”
“…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독고 소저의 건강 상태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양신공?”
“거래 조건은 소저의 절맥을 낫게 하는 것이였죠.”
“구음절맥도 고쳐봤다매? 그럼 다른 절맥도 다 쉽게 고치는 거 아냐?”
“… 사실 소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응?”
“구음절맥을 고쳐보긴 했는데…,  딱 한 번이 전부입니다.”
“…”


까드득.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시발, 그럼 그렇지. 이딴 새끼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하지만 직접 만나게 해드린다고 했잖습니까. 보고 판단하시죠.”
“… 어딨는데?”
“여기요.”


위일청이 옆에 앉아있던 여인, 백리소현을 가르켰다.

“백리 소저가 바로 그 환자입니다. 구음절맥에 걸렸다가 지금은 완전히 나았죠.”
“…”

백리소현이 배실배실 웃었다.

“… 어이, 색마.”
“예, 독고 소저.”
“저 년은 절맥의 부작용으로 백치가 된 거냐?”
“… 원래 말을 좀 느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어이, 둔치.”

독고진이 백리소현을 부르자, 그녀가 가까이와서 앉았다.


“… 둔치 아니야.”
“너 존나 느리잖아. 그럼 둔치지.”
“… 나 빠른데….”
“아, 시발. 모르겠고, 손  봐.”

독고진이 진맥을 잡기 위해 손을 뻗자, 백리소현이 위일청을 쳐다봤다.


“…”

위일청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백리소현이 순순히 손을 건네주었다.


백리소현의 완맥을 붙잡고 독고진이 눈을 감았다.


‘…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딱히 아무 문제 없군.’

독고진이 다시 눈을 뜨자, 위일청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 너 사기 치는 거 아냐?”
“그렇게 여길만큼 정상인의 맥처럼 느껴지시죠?”
“그냥 정상인이잖아.”
“백리 소저.”
“… 응.”
“오… 옷을 왜 벗어? 야, 미친 년…아?”


백리소현이 윗 옷을 벗자 배에 흉흉한 상처가 있었다.


“… 뭐야, 이거?”
“… 백리소저가 절맥이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입니다.”
“미친 새끼가…!”

독고진이 밥상을 엎으려고 하자, 위일청이 지긋이 누르며 그녀를 막아세웠다.

“제가 한  아닙니다.”
“어떻게 믿지?”
“… 소저께서는 무림에 대해 전혀 모르십니까?”
“뭐?”


위일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백리 소저의 성을 생각해보십시오.”
“백리세가가 왜?”
“… 현 점창파의 장문인과 성이 같죠.”
“뭐?”
“… 백리소저는 현 점창파의 장문인, 백리종의 자제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르십니까?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은 정순한 음기를 몸에 품고 있는 영약입니다. 영물처럼 단전에 내단이 생긴다더군요,”

위일청의 말을 들은 독고진은 백리소현의 하복부에 나있는 상처를 보았다.


마치 몸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꺼낸 것만 같은 소름끼치는 상처를.

“… 아니지?”
“…”
“시발….”

독고진이 젓가락을 집어던졌다.


“식사는 다 했군.”


*

“…”

기분을 잡친 독고진은 결국 밥을 다 먹지 못 하고 씻으러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그는 절맥증에 대해 다시 떠올려봤다.

‘절맥…, 과도한 음기로 인해 기맥이 틀어막히는 불치병.’


하지만 그 말은 그만큼 엄청난 음기를 품고 있단 얘기다.


실제로 독고진 또한 잠시 눈을 감자 단전에 자리잡고 있는 정순한 음기가 느껴졌다.

‘… 음기가 배출되지 않고 몸에만 쌓이기만 한다면….’

그게 바로 영약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소위 기연이라 말하는 영물들의 내단도 짐승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끌어모은 정순한 기운의 집약체다.

내기를 운공할 줄 아는 사람이 모은다면 오히려  강력한 내단이 될 것이다.

“시발 새끼들….”

눈을 감자 백리소현의 상처가 떠올랐다.


‘백리종…,  개새끼.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지.’

운남까지 갈 일이 없어서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독고진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였다.

‘사람 같지 않은 새끼. 만나면 반드시 토막쳐서 죽여주마.’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순간,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 안에 있어?”
“둔치냐?”
“… 나 둔치 아니라니깐….”
“크큭, 그렇다고 치자.”

백리소현이 들어왔다.


“…  오라버니가…, 표정이 안 좋아보이니 살펴보라고 했어….”
“그렇냐?”

독고진이 욕조의 물을 떠 자신의 얼굴에 끼얹었다.

“괜찮다.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 왜?”
“응?”

백리소현은 욕조의 물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독고진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 왜 화났어?”
“…”

백리소현의 멍한 눈을 잠시 바라보던 독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미안하구나.”
“응?”
“세상에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어. 왜 사과해?”
“나…, 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어떻게 무림에 뛰어든지 아느냐?”
“… 광마?”
“그래. 광마.”


독고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광마 독고진은 원래 화전민의 아들이었어. 아마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모르지.”
“… 그런데 그렇게 강해?”
“어. 그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거든.”
“… 뭔데?”
“복수.”


까드득.


독고진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저 빈 산을 찾아 떠도는 화전민이었지만, 무림인들의 싸움에 휘말려 가족이 죽었지. 그 날 죽은 광마의 가족은 모두 여섯 명이었어. 막내는… 고작 4살이었지.”
“…”
“그 날 이후로 독고진은 무림인들을 찾아다녔어. 그는 누가 자신의 가족을 죽인지 몰라서 낫  자루를 들고, 일단 근처의 사파부터 조지기 시작했지. 정파는 다 정의로운 줄 알았거든.”
“… 정파도 다를 바가 없어….”
“그래, 정파도 다를 바가 없지.”

무림에 몸을 내던진 독고진은 금세 자신의 가족을 죽인 흉수를 알아차렸다.


화전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까막눈이던 그는 원수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독(毒)’이란 글자를 읽을 줄 몰랐고, 사천 당문의 무인이 녹색의 무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몰랐으니깐.


그저.


정파라면 무조건 정의로운 줄 알았으니깐.


“… 하지만 그는 힘이 없었어. 그의 가족을 죽인 명문 정파 놈들은 죄다 벌모세수부터 시작해서 어릴 때부터 좋은 영약을 죄다 쳐먹어 괴물 같은 놈들 뿐이었지.”
“… 그래서?”

어느새 집중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백리소현을 보며, 독고진은 씨익 웃었다.

“죽어라 싸웠지.”
“… 죽기 전까지?”
“어. 운이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나빠서였는지. 그는 쉽게 죽지 않았거든. 도중에 기연도 얻어서 천하의 신공과 도법을 익히기도 하자, 그는 마음먹었어.”


독고진이 주먹을 쥐어보였다.


“전 무림을 박살내자고.”
“… 미치광이같아.”
“그래서 광마라고 부르는 거지.”

독고진이 욕조에서 일어나자, 백리소현이 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맙다.”
“… 응.”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독고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 왜? 독고 소저는 광마의 딸이지, 광마가 아니잖아.”
“…”


백리소현의 말을 듣고, 독고진은 다시금 깨달았다.

이제 자신은 광마가 아니라, 광마였던 소녀라고.


자신의 손을 펼쳐보자, 그 곳엔 광마였던 시절의 거칠고 투박한 무인의 손이 아닌 물집 하나 잡히지 않은 새하얗고 고운 여성의 손이 보였다.


“아니.”

독고진이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내가 광마가  거야. 그래서 무림을 박살낼거야.”
“… 그래?”
“어. 내가 좆 같은 새끼들은 가만히  놔두거든.”
“… 응.”


백리소현이 배실배실 웃어줬다.


어딘가 멍한 웃음이 아닌, 환한 웃음이였다.


“그런데 독고 소저는 이름이 뭐야?”
“… 응?”
“내가 계속 독고 소저, 독고 소저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

그 말을 듣자, 독고진이 멍해졌다.

“… 독고 소저도 이름이 없어?”
“응?”
“… 나도 이름이 없었어.”
“…”


백리소현이 독고진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 이름… 지어줄까?”
“네가?”
“… 응.”
“그래, 말해봐라.”
“독고령.”


백리소현이 독고진의 손에 한자를 써주었다.

“령 매의 목소리가 옥소리(玲) 같이 아름답거든.”
“… 광마가 될 사람치고는 너무 여리여리한 이름 같은데.”
“으응.”


백리소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무림을 박살내겠다고 했잖아….”
“그치.”
“… 그럼 이름은 사실 큰 상관이 없지 않을까?”
“큭…, 크큭. 그래, 네 말이 맞네.”

독고진이, 아니.

독고령이 백리소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전 무림을 박살내면 이름이 뭐든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
“… 응.”

독고령은 오랜만에 자신의 오랜 숙원을 떠올렸다.


좆 같은 무림의 잡배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무림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


‘그러기 위해선 먼저 힘을 되찾아야겠군.’

뇌음사를 찾아 극양의 기운을 가진 신물을 훔치든.

아니면 색마를 통해 구음절맥을 고치든.


“가자.”
“… 령 매.”
“응?”
“… 옷은 입고 나가야지.”
“아….”
“… 바보.”


*

백리소현이 입힌 옷들은 하나같이 나풀나풀 거리는 것들이었다.

독고령이 손을 휘적이며 거추장거리는 소매를 보자, 얼굴에 살짝 짜증이 깃들었다.


“이딴 옷 밖에 없어?”
“… 응.”
“젠장, 그리고 가슴은 왜 이렇게 남아?”
“… 미안. 내 가슴이 너무 커서….”
“시발, 색마랑 이야기가 끝나면 포목점부터 가야겠군.”


드르륵.

독고령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위일청이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오셨습니까, 소저. 옷이 날개십니다.”
“지랄하지 말고 바로 거래 얘기나 하지.”
“… 참 호탕하시군요, 독고 소저.”


위일청이 마시던 찻 잔을 내려놓고, 표정을 바로했다.

독고령이 그의 맞은 편에 앉고 말을 꺼냈다.


“그래서…, 구음절맥. 어떻게 고쳤어?”
“진맥부터 먼저 하시죠. 일단 절맥인지 아닌지 확신이 필요하니깐요.”
“자.”

독고령이 손을 내밀자, 위일청이 그녀의 완맥을 짚었다.

“읏…!”

완맥을 타고 따스한 기운이 들어와 독고령이 잠시 신음을 흘리자, 위일청이 말했다.


“잠시만 참으시죠.”
“… 오냐.”


위일청의 기운이 독고령의 기맥을 타고 일주천을 끝내자, 그가 눈을 떴다.


“… 애석하게도 절맥이 맞군요.”
“그래서 고칠  있어?”
“가능… 은 할 것 같습니다.”
“시발, 대답이 왜 애매해?”
“… 일단 기경팔맥의 상태는 백리 소저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녀는 모든 맥이 막혀있었지만, 독고 소저는 임독양맥은 뚫려있더군요.”
“근데?”
“… 대신 모여있는 음기가 너무 강합니다. 백리 소저보다 훨씬요.”
“…”

위일청의 말을 듣고, 독고령은 그가 정확히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것이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돌팔이 새끼는 아닌가보군.’

“그래서 할  있겠어?”
“… 일단 시도해봐야죠. 아마 막힌 맥은 어느정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단…, 어디까지나 소저께서 거래를 승낙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쪼잔한 새끼.”
“… 저도 얻는  있어야죠.”
“구양신공?”
“… 아니요. 그것 말고도 거래에 추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독고령이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자, 색마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소저의 처녀를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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