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1장. 광마였던 소녀 - (5)
‘… 여기에도 산채가 있었군.’
위일청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불빛을 확인하자 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높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그는 천근추의 묘리를 이용해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산채의 정중앙에 내려섰다.
콰과광!!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산적들이 각자의 처소에서 튀어나와 진원지를 확인했다.
위일청이 손을 한 번 휘저어 올라오는 흙먼지를 없애고는 말했다.
“실례합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빨간 머리의 소저를 본 적이 없으십니까?”
“…”
위일청의 말을 들은 산적들이 저마다 눈치를 보기 시작하며 무기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자 그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맞게 찾아왔나보군.’
챙!
위일청이 팔을 튕기며 낭창낭창한 연검을 하나 꺼내들며 외쳤다.
“피를 볼 생각은 없으니 소저를 무사히 돌려주기만 하면 아무 짓도 하지 않겠소.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오.”
“누… 누구시오?”
산적 하나가 바싹 긴장한 채, 앞으로 나와 위일청에게 물었다.
“이… 이 곳이 혈부귀 조창의 산채임은 알고 있소?!”
“혈부귀 조창….”
그의 이름을 들은 위일청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들어본 적 없는 이름입니다만?”
“이번에 새로이 녹림십걸의 자리에 오른 분이오! 그 분이 오기만 한다면….”
“크하핫! 녹림십걸?”
위일청이 갑자기 웃어재끼자, 산적들은 다들 혼란에 빠졌다.
“내 말하는데, 그 자가 녹림십걸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소이다. 녹림십걸 중에 도끼를 쓰는 자가 있단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군.”
“어… 얼마 전에 녹림십걸의 좌에 오르신 분이오! 그대 또한 무인이라면 녹림십걸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 터…. 돌아가시오! 그대가 찾는 미친 년은 없소!!”
“… 미친 년?”
“헙!”
산적의 말을 듣자, 위일청은 확신했다.
독고진이 이 곳에 있음을.
“… 독고 소저가 여기 있나보구려.”
“독고 소저…?”
“누군지 모르나보군. 그 여인, 광마의 딸이오.”
“과… 광마!!”
“미친!!”
광마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산적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서렸다.
“다… 단신으로 당문을 쳐들어간 그 광마 말이오?”
“내가 알기에 광마라는 별호를 쓰는 분은 독고진 어르신 밖에 없소.”
“…”
“그리고 그대들은 정말 운이 없구려.”
콰과과곽!!
위일청이 갑자기 감추었던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공을 뿜어내자, 산적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크… 크윽!!”
“무… 무슨 내공이…!”
위일청이 가장 앞서서 자신에게 말한 산적의 앞에 섰다.
“나는 위일청이라하오. 무림인들은 나를 ‘색마’라는 별호로 부르더군.”
“새… 색마!!”
“그대들은 나와 약조를 맺은 여인을 데리고 있소, 이제 상황이 좀 이해가 가시오?”
산적은 낭패가 섞인 얼굴로 한탄했다.
‘어… 어찌하여 광마의 딸과 색마를 동시에 건드린 것인가…!’
무림인을 혐오하고, 단신으로 돌아다니며 전 무림을 휘저은 광마.
여인과의 약속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반드시 이행하는 색마.
하필 이 두 명에게 원한을 지게 되었으니, 산적은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독고진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산적, 왕봉이 입을 열었다.
“소… 소저는 두목의 처소에 있소!”
“왕봉! 이 미친 놈이…!”
“미친 놈은 무슨! 우리도 일단 살고봐야지 않겠소?! 광마의 여식인 줄 알았다면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오!!”
“크윽…!”
위일청이 왕봉을 바라보았다.
“두목의 처소가 어디오?”
“저… 저 쪽의 가장 큰 천막이오.”
“가르쳐주어 고맙소.”
위일청이 공손히 포권하며 그에게 인사하자 왕봉이 그를 따라 포권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위일청의 말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만약 소저가 해를 입었을 시, 그대를 죽이겠소.”
“… 예?”
“나는 여인과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여겨본 적이 없는 사내요. 헌데 오늘 처음으로 그 약속을 어길지도 모르겠군.”
“그 무슨…!”
촤악!
왕봉이 서있던 바로 앞으로 긴 선이 여러 개 그여졌다.
‘어… 어느 새?!’
“부디 소저가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시오. 만약 소저에게 무슨 일이라도….”
“어이, 색마!!”
“이… 있을 시에는…?”
위일청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곳에서 독고진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웃으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도… 독고 소저?”
“내공을 그렇게 흉흉하게 뿜고 있으니 내가 나갈 수가 있나.”
“그… 렇군요. 어디 다치신데는 없습니까?”
“좆만한 새끼 좆을 빨 뻔 한 적은 있지. 으, 시발. 술 있냐?”
“…”
위일청은 도대체 독고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물은 있습니다.”
“그건 필요없어. 자, 선물.”
독고진이 손에 든 무언가를 던졌다.
모닥불로 밝혀진 공터에 그 무언가가 떨어지자, 산적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두목?”
“새끼, 목이 존나 두꺼워서 자르느라 힘들었다.”
“어…?”
그 무언가는 조창의 머리였다.
산적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얼이 빠져있자, 독고진이 소리쳤다.
“시발 새끼들이 감히 나를 납치해?!”
“히… 히익! 살려주십쇼!!”
“시~발, 쪽팔려서 내가 뒤지겠구만 누굴 살려달래?!”
“도… 독고 소저. 그 말을 조금….”
“뭐, 새끼야!”
“…”
독고진이 희번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바닥에 엎드려있는 한 산적을 가르켰다.
“어이, 너.”
“…예.”
“네가 아까 나 우리에 가둬놓고 비웃은 새끼 맞지?”
“…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새끼야!”
챙!
독고진이 손에 묶여있던 연검을 풀어해치자, 산적이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외쳤다.
“저… 저 진짜 아닙니다! 저는 소저를 업고 왔습니다!”
“… 그래?”
“예…! 정말입니다!”
“…”
독고진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계속 바라보자, 산적이 말을 덧붙였다.
“소… 소저께서 색마의 여인인 줄 알았다면 손도 안 댔을 겁니다.”
“미친 새끼가 누가 저 새끼 여자래?!”
“커헉!”
독고진이 달려가 그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콱, 씨. 뒤질라고. 내가 저딴 새끼랑 잘 년처럼 보여?! 앙?!”
“…”
“새끼들이 못 배워쳐먹어서 산적질만 하다가 대가리가 돌아버렸나….”
챙!
독고진이 다시 손을 휘두르자 연검이 자연스레 그녀의 팔에 묶였다.
그 모습을 보고 위일청이 말했다.
“… 그 새 검이 익숙해지셨나봅니다.”
“응? 아아. 이거 진짜 좋더라. 나 주면 안 되냐?”
“예?”
“이거 나 주라. 내가 덤으로 구양신공 말고 수라나찰도법도 가르쳐줄게.”
“… 저는 검수입니다.”
“아, 좀! 부랄달린 새끼가 쪼잔하게.”
“하아…, 그러시지요.”
“히힛, 고마워.”
위일청이 머리를 싸맸다.
‘… 저게 납치된 소저가 맞는건가.’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나간듯 가볍게 말하는 독고진을 바라보자 위일청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히 걱정하여 급하게 뛰어온 자신이 멍청해보일 정도였다.
그 때, 독고진이 위일청에게 다가와 두 팔을 벌렸다.
“… 무슨 뜻입니까, 소저?”
“안아줘.”
“… 예?”
“아니, 시발. 그럼 내가 여기서 객잔까지 걸어갈까?”
“아…, 죄송합니다. 여인이 저한테 안아달라고 하면 다른 뜻으로 들려서요.”
“미… 미친 새끼야!”
“… 죄송합니다.”
독고진이 위일청의 발을 씩씩대며 걷어찼다.
그 발길질을 맞으면서 오히려 위일청의 의문이 깊어졌다.
‘조창이란 놈이 얼마나 허약했기에 이런 연약한 소저에게 죽은 것인가.’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 같은 발길질에 튀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위일청은 독고진의 손을 붙잡았다.
“가시지요.”
“그래, 빨리 좀 가자. 피곤해 뒤지겠다.”
“그럼….”
위일청이 다시 경공을 펼치기 위해 발 끝에 힘을 주는 순간.
“잠깐! 잠깐잠깐. 할 일이 남았어.”
“… 뭡니까?”
“왕봉…? 왕봉 맞나? 왕봉, 이 개새끼야. 앞으로 나와!”
독고진이 갑자기 왕봉의 이름을 부르자 산적들의 눈이 다 한 쪽으로 쏠렸다.
“새끼야, 나오라니깐 왜 멀뚱멀뚱 서 있어?”
“소… 소저께서 왜 저를?”
“내 놔.”
독고진이 손을 펼치자, 왕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뭘 말씀이십니까?”
“아까 느그 조창한테 받은 전낭, 이 새끼야. 나 팔아서 받은 거.”
“그… 그걸 왜….”
“콱 씨. 야, 이 새끼야. 네가 나 팔아서 얻은 돈이잖아? 그럼 원래는 내 꺼 아니야?”
“… 예?”
왕봉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자, 울화가 터진 독고진이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
“끄으윽….”
“새끼가 좋게 내노라고 하면 내놓을 것이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왕봉의 허리춤을 뒤적거리자, 금세 아까 봤던 전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낭을 열자 안에는 은전이 제법 묵직하게 들어있었다.
“오…, 산적 거렁뱅이들 치고는 돈이 좀 있네.”
“…”
오히려 산적을 털어먹는 그녀를 보며 산적들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자 독고진이 다시 한 번 눈을 부라렸다.
“새끼들이, 눈 안 깔아? 다들 외눈박이로 만들어줘?!”
“… 아닙니다.”
“콱 씨. 이 전낭이 가벼웠으면 니들 다 뒤질뻔 했어. 알아들어?!”
“… 예.”
독고진이 전낭을 들고 다시 색마에게 다가서자 위일청이 그녀의 다리를 붙잡아 끌어안았다.
독고진이 편하게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몸을 맡기자, 위일청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소저?”
“왜?”
“그… 어디 한 곳을 붙잡으시죠. 떨어지시겠습니다.”
“아, 몰라. 피곤해 뒤지겠어. 네가 좀 알아서 해 줘.”
“…”
“아, 맞다! 야, 산적 새끼들아!”
독고진이 산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 두목은 왕봉 저 새끼로 시켜라. 야, 저 새끼. 내가 방금 발로 차보고 느낀건데, 존나 묵직해. 조창의 열 배 정도 된다.”
“…”
“니들도 자기보다 좆만한 새끼가 두목되면 좆 같을 거 아니야? 그러니깐 어지간하면 왕봉시켜. 저 새끼 존나 커.”
“… 소저. 그 아녀자가 입에 그런 단어를 계속하여 담으시면….”
“좆까고. 출발해.”
“…”
위일청은 그냥 독고진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광마 어르신…, 따님을 어떻게 키우신 겁니까?’
색마가 한숨을 내쉬고는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
다시 눈을 뜬 독고진이 가장 처음 본 것은 여자였다.
어딘지 졸려보이는, 맹한 인상의 여인이 그의 얼굴에 손을 데려고 하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입이 벌어지고.
잠시 후.
“아.”
“시발, 존나 답답하네. 말이 왜 그렇게 느려?”
“…”
“으, 대가리야. 냉수 좀 줘….”
“여기….”
일어난 독고진이 그 여인에게 냉수를 받아마시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객잔…, 도착하자마자 술 먹고 잤군. 시발, 이 몸은 숙취에도 약하군.’
알면 알수록 쓰레기 같은 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맹한 인상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기….”
“뭐?”
“나… 백리소현.”
“… 근데?”
“위 가가랑… 친해.”
“그래서?”
“…”
대화가 끊기자, 독고진이 다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시바아아아알!!! 존나 답답하게 말하네!!”
“… 미안.”
“하아…. 그래서 넌 뭐야, 그… 색마의 계집이냐?”
“…응.”
백리소현이 뺨을 붉히며 수줍은 듯 대답했다.
방금까지의 맹한 인상은 사라지고 묘하게 성숙한 여인의 색기가 느껴지자, 독고진이 괜히 머쓱해졌다.
“… 그래. 그래서 색마는?”
“밖에….”
“뭐하러?”
“… 아침수련.”
“좀 걸리겠군. 조반 거리나 좀 챙겨와.”
“… 응.”
백리소현은 순순히 독고진의 말에 따랐다.
총총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독고진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 백치인가? 아니, 그보다 색마가 끌고다니는 여자가 있던가?’
색마에 대해서 무성한 소문을 들어봤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음식을 들고온 백리소현과 함께 위일청이 들어왔다.
“독고 소저. 일어나셨군요.”
“… 어.”
“같이 식사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든가.”
“하핫, 감사합니다.”
위일청이 웃으면서 자리에 앉자 독고진과 위일청 사이로 백리소현이 음식상을 내주었다.
“고맙소, 백리소저.”
“응….”
둘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며 독고진은 음식을 집어들었다.
‘… 끌고다니는 여자가 있긴 했군.’
아무 음식이나 입에 집어넣으면서 독고진이 말했다.
“그래서, 색마.”
“네, 말하시죠.”
“어제 못 한 얘기나 하지. 거래 얘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