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장. 광마였던 소녀 - (2)
“아가씨, 가만히 계셔요. 그렇게 움직이시면….”
“시끄럽구나. 계집 아이가 그리 말이 많아서야 쓰겠나.”
“… 그치만 계속 움직이시면….”
“어허!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가만히 있거라.”
“…”
목욕이 끝나고 물기를 닦아내는 과정에서 독고진과 수아는 계속 투닥거렸다.
수아가 몸을 닦아줄 때마다 달라진 몸의 감각이 거슬렸기에 독고진은 그를 거절했고, 수아는 자신이 맡은 바를 다하고자 하다보니 서로 다투게 된 것이다.
독고진은 고작해야 여자 점소이 따위와 다투게 된 자신의 몸을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 정말 쓰레기 같은 몸이군. 갈 길이 멀구나.’
본래 가지고 있던 남성의 몸이었다면 수아 쯤은 두 손가락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녀와 투닥거리는 것마저 힘들었다.
잠시 수건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 것만으로도 벌써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 젠장.”
자신의 몸을 관조하면 할수록, 광마는 울화가 치솟았다.
무인의 3 요소인 심, 기, 체.
무인의 마음가짐인 ‘심’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고고하고, 초절정 고수인 독고진이다.
내공을 뜻하는 ‘기’ 또한 문제없었다.
당장은 기경팔맥이 막혀있었지만, 한 번 지나가본 길을 다시 걷는 일은 쉬운 일이다.
게다가 빙궁의 신물에 담긴 내력을 흡수한 뒤, 상상도 못할 정순한 내공이 독고진의 몸에 담겨있었다.
당장 적당한 무공이라도 익혀서 기맥을 뚫기 시작하면 금세 남성의 몸으로 쌓았던 무공을, 아니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체’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불편한 몸을 가지고 칼질을 하란 말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거슬린다.
검수로서 팔의 길이가 길다면 거리 싸움에서 유리해지는데 그 장점마저도 잃었다.
보폭마저 짧아진 데다가 긴 머리카락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하나부터 아홉까지 다 마음에 안 드는 몸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독고진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
그의 오감이 엄청나게 예민해졌다는 점이었다.
독고진이 눈을 감으며 잠시 귀를 기울이자, 그의 감각이 날카로워지며 주변의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끼익….
그 때, 독고진의 귀에 누군가가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독고진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점소이.”
“예, 아가씨.”
“객잔에 손님이 찾아왔구나. 점소이를 찾는 중인듯한데 아까 그 장일이란 놈은 다른 곳에 있으니 네가 가 보거라.”
“… 예?”
“주인은 주방에서 졸고 있군. 이대로면 손님을 놓칠 것 같으니 네가 가봐야겠구나.”
“…”
독고진의 말을 들은 수아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30여장(90m) 정도 떨어진 곳의 일을 어떻게 아시는거지?’
혹시나 싶어서 수아가 귀를 기울였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아가씨, 진짜 누가 오긴 오셨나요?”
“안 가도 되겠구나.”
“예?”
“손님이 이 쪽으로 오고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객잔 방향에서 누군가가 수아와 독고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독고진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젠장….’
독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얀색의 문사 옷을 입고, 팔을 휘적거리며 다가온 순박한 인상의 사내가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여쁜 소저들.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만….”
색마였다.
*
순박한 인상의 화화공자, 색마 위일청이 자신에게 말을 걸자 독고진은 긴장했다.
‘…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지?’
색마, 위일청.
흑룡강의 위씨 성을 가진 작은 세가에서 배출한 희대의 고수.
하지만 그의 무공보다 절륜함이 더 유명한 기이한 사내.
강호에서 괴팍하기로 따지자면 광마만큼 괴팍한 자가 바로 그 였다.
물끄러미 색마를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눈치챈 위일청이 독고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호오…. 참으로 아름다운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신 소저이십니다.”
“지랄.”
“…예?”
“네 눈에는 이게 아름답더냐? 미친 년처럼 피를 뒤집어 쓴 꼬라지거늘.”
“… 죄송합니다. 소인이 소저의 심사를 어지럽혔나보군요.”
“…”
‘소인은 무슨’이라며 이죽거리고 싶었으나, 독고진은 꾸욱 참았다.
지금 저 자와 충돌해봤자 그리 좋을 것도 없는 데다가 당장 지금의 몸으로는 그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 할 것이 뻔했다.
독고진은 알고 있었다.
색마라는 오명으로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그의 무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아니꼬운 새끼 같으니라고. 계집질이나 하는 놈이 무예도 고강하고.’
독고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린채 입을 다물자, 이상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수아가 입을 열었다.
“소… 손님, 혹시 객잔에서 머무르실거면 제가….”
“아,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 음…, 제가 그 분과 친한 것은 아닌데 혹시 어제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위일청이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보이며 그가 찾는 사람을 묘사했다.
“듣기로는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산발의 머리를 한 채, 대충 저보다 머리가 한 개 반쯤 큰 거인이라 들었습니다. 또 어지간한 사람 하나 정도 되는 크기의 검을 들고 다니시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익숙한 인상에 독고진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하지만 수아는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어제 들르셨습니다.”
“역시…. 혹시 그 분을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그… 지금은 산보를 나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독고진이 수아의 입을 막는 것보다 먼저, 수아가 독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계신 아가씨가 그 분의 여식이십니다.”
“…”
수아의 말을 들은 독고진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미치겠군….’
고개를 슬쩍 들어 위일청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그 분께서도 가족이 있으셨군요.”
“예?”
“아닙니다. 독고 소저, 잠시 저와 얘기를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독고 소저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독고진은 포기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색마가 광마 독고진을 찾고 있었고, 정확히 이 곳을 들렀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으니, 이제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빠져나가긴 글렀군.’
위일청이 싱긋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자.
탁.
독고진이 그의 손을 쳐내고 앞서가며 말했다.
“남정네의 손을 잡는 취미는 없어. 얘기할 것이 있으면 방으로 찾아오든가.”
“호탕한 소저시군요. 역시 그 분의 여식 답습니다.”
“하아…. 점소이. 조반거리나 따로 챙겨서 올라오거라.”
“예, 아가씨.”
독고진이 먼저 앞서 걷자 위일청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멍청한 점소이….’
독고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객실로 돌아와 아침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는 와중, 독고진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처음 입을 연 것은 답답함을 참지 못 한 위일청이었다.
“… 보면 볼수록 소저는 신비로운 분이시군요.”
“뭐가?”
“하시는 행동이 다 사내다우십니다. 역시 그 분의 여식 같군요.”
“그 분, 그 분 하지말고 그냥 광마라고 부르지. 돌려말하는 건 듣기 안 좋군.”
“… 소저가 원하시면 그러지요.”
위일청이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후루룩 차를 마시자 울화가 치솟았다.
‘저 새끼가 왜 나를 찾지?’
도대체 색마가 자신을 찾을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독고진은 애가 탔다.
빙궁, 당문, 남궁, 모용, 무당, 화산, 종남, 개방 등의 버러지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 새끼들은 다 한 번씩 친히 자신의 손으로 다져놨었기에 언제 자신에게 은원을 갚겠다고 찾아와서 개지랄을 떨어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원이고 뭐고 간에 지나가다 칼 한 번 나누고 뒤끝없이 좋게 헤어진 놈이 이제와서 자신을 찾는 일은 찝찝하기 짝이 없다.
결국 독고진은 그냥 정공법을 택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를 찾는 이유가 뭐지?”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색마지. 색마 위일청.”
“…”
위일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를 알고 계셨군요, 소저께서는.”
“문사 옷을 입은 무인이 몸에 낭창한 연검을 몇 개씩이나 차고 돌아다니면 색마 밖에 더 있나?”
“…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인데 한 눈에 궤뚫어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내가 눈이 좀 좋아서.”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독고진이 차를 들이킨 뒤 대화를 이어갔다.
“나…의 아버지와는 어떠한 은원도 없다고 들었는데.”
“아,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광마 어르신과 다시 칼을 나누는 짓은 하고 싶지 않군요.”
“그럼 왜 찾는 거지?”
“…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춘부장께서 찾아오시면 그 때 말씀드리지요.”
“…”
색마가 말하기를 거부하고 다시 차나 홀짝거리고 있자 독고진은 또 다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색마는 음식을 몇 가지 집어먹더니 환히 웃었다.
“호오, 여기 숙수가 솜씨가 좋은 모양…”
“광마는 오지 않는다. 단언하지.”
“… 예?”
“그는 오지 않아. 아주 멀리 가셨어.”
“… 정말입니까?”
“그래. 무슨 볼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냥 가지?”
“…”
독고진의 말을 들은 위일청이 잠시 턱에 손을 올리고 고민에 빠졌다.
‘… 제발 그냥 좀 가라, 새끼야.’
하지만 독고진의 기대와 다르게 위일청은 포기하지 않았다.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 뭐가, 새끼야. 내가 갔다고 하면….”
“절맥에 걸린 딸을 놔두고요?”
“… 뭐?”
절맥이란 말을 듣자, 독고진이 굳었다.
“저… 절맥이라고? 내가?”
“모르셨습니까?”
“그럴 리가…. 절맥이면 내공을 쓰지도 못 하고 일찍 절명해버리지 않는가.”
“그건 구음절맥 정도의 중증이나 그렇지요. 진맥을 해봐야 알겠지만, 소저께서는 그 정도 중증은 아닌듯 합니다.”
“…”
절맥.
과도한 음기로 인해 기맥이 틀어막히면서 나이가 들수록 생명력을 차츰차츰 잃어가며 어느샌가 요절해버리는 최악의 질병.
‘시발….’
갑자기 무지막지하게 늘어버린 내공의 양과 여자로 바뀐 충격 때문에 놓쳤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절맥증과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부합함을 깨닫자 독고진의 표정이 굳어만 갔다.
“독고 소저.”
“…말해.”
“저와 거래하시지 않겠습니까?”
쨍그랑!
그 말을 듣자마자 독고진이 그의 얼굴을 향해 찻 잔을 집어던졌다.
위일청은 피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맞아주었다.
흥분한 독고진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이 십새끼가! 날 창녀로 봐?!”
“… 진정하시지요. 저도 압니다, 제 소문이 어떤지는요. 하지만 믿어주시지요. 저는 절대 제가 먼저 여성에게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지랄하고 있네, 개새끼가.”
“하아….”
위일청이 독고진의 손을 붙잡아 뗐다.
“…그리고 거래는 어디까지나 독고 소저가 처녀일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꺼져, 미친 새끼야.”
“… 독고 소저에게도 좋은 일이 될 텐데요.”
“내가 미쳤다고 남자 새끼한테 몸을 대 줄…”
“절맥, 고쳐본 적 있습니다.”
“…뭐?”
“저는 구음절맥도 고쳐본 적이 있습니다.”
“…”
그 말을 듣자 독고진의 사고가 멈췄다.
“누구? 증명할 수 있어?”
“있습니다. 직접 만나게도 해드리죠.”
“…”
위일청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조금은 잠잠해진 독고진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 구음절맥을 고쳤다고? 저 새끼가?’
절맥은 기맥이 막혀서 내공을 운용하지 못 한다.
하지만 그 기맥을 막고 있는 무언가만 없앨 수 있다면. 절맥을 고칠 수만 있다면.
독고진은 단전에 있는 정순한 음기를 이용해서 당장이라도 이전의 고강한 무공을,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
“… 어떻게 해야지 고칠 수 있는데?”
“비밀입니다. 어디까지나 거래가 이루어지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원하는 걸 말해.”
“광마 어르신이 가진 극양의 심법이 필요합니다. 구양신공이요.”
“미쳤군. 무인이 자신의 무공을 건네줄 거 같나?”
“그게 아닙니다. 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다른 아이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하다못해 제자로라도 받아줄 수 없는지 묻기 위해서 왔습니다.”
“헛소…리?”
위일청의 말을 자르려던 차, 독고진의 감각이 이상함을 느꼈다.
“소저?”
“닥쳐. 숨도 쉬지 말고 가만히 있어.”
“…”
눈을 감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독고진의 귀에 여러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객잔 내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자, 그는 좀 더 감각을 집중해 더 먼 곳으로 귀를 기울였다.
‘다수의 발소리…, 아니. 말발굽 소리다. 병장기 소리와 갑옷…. 그리고…’
독고진이 눈을 떴다.
“시발.”
빙궁의 추격대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