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서(序). 나는 광마다.
나는 광마다.
추혈광마 독고진.
그게 내 이름이다.
피를 쫓는다고 ‘추혈(追血)’
미쳤다고 ‘광(狂)’.
사마외도를 걷는다고 ‘마(魔)’.
세간의 사람들은 나를 일컫어 추혈광마(追血狂魔)라고 거창하게 부르지만, 나는 그냥 스스로를 광마라고 부른다.
병신들이 지어준 별호를 누가 쓴다고.
하지만 그 병신들이 내 별호를 보고 두려워한다면 그 또한 좋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광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 삶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
“소궁주님! 큰일났습니다!!”
“… 무슨 일이냐?”
“추… 추혈광마가 들이닥쳤습니다!”
“뭐라…?”
빙궁의 여식, 백서린이 손을 떨었다.
“과… 광마가 왜?”
“모르겠습니다! 본 궁의 무사들이 어떻게든 그의 돌입을 저지중이지만, 금방이라도 이 곳까지 들이닥칠것만 같습니다…!”
백서린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필 아버님께서 출타하신 틈을 타….’
“소궁주님! 일단 자리를 피하셨다가…”
“아니다. 그 자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도망쳐도 의미가 없겠지.”
“소궁주님!!”
백서린이 자신의 애검을 붙잡고 일어났다.
“… 본 궁의 무사들을 물려라. 그 자에게 대항해봐야 무의미하다.”
“진심이십니까?”
백서린이 핏발 선 눈으로 무사를 노려보았다.
“빙궁의 피를 이은 자가 어찌 입에 거짓을 담겠느냐.”
“… 실언했습니다. 무사들을 물리겠습니다.”
“…”
무사가 밖으로 나가자 백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광마가 왜 이 곳에 왔는가….’
이 또한 빙궁을 이을 자가 견뎌내야할 일.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사한 검을 내려보며 마음을 다잡으려던 순간.
콰과광!!!
대전 밖으로 나가던 무사가 굉음과 함께 튕겨져나왔다.
“쿨럭쿨럭. 아이씨, 먼지.”
“…”
먼지 너머로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서린이 긴장하여 검집을 꽉 쥐었다.
“… 광마 선배님이십니까?”
“선배는 무슨. 나는 무림인 아니다.”
“…”
먼지를 뚫고 나오는 거한을 보자 백서린이 마른 침을 삼켰다.
사방팔방으로 뻗친 정리 안 된 산발의 머리.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당장이라도 터질것만 같이 붉게 타오르고 있는 근육.
그리고 그 거대한 몸만큼 거대한 그의 참마도를 보자 백서린은 확신했다.
저 자가 바로 무림 최고의 공적 중 하나, 추혈광마라고.
광마가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백서린을 쳐다보았다.
“네가 빙궁주냐?”
“…예?”
“빙궁주치고는 조금 작군. 나와 내기 비무를 하자.”
“자… 잠시만요. 저는 빙궁주가 아닙니다.”
“응?”
저벅. 저벅.
광마가 한 걸음씩 백서린에게 다가올 때마다 백서린 또한 뒷걸음질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가만히 있어라. 잘 안 보이니깐.”
“가… 가까이 오지 말라니깐요!”
챙!
백서린이 검을 뽑는 순간, 그보다 더 빨리 광마의 참마도가 그녀의 칼을 쳐냈다.
튕겨나간 백서린의 검이 벽에 꽂혀 파르르 떨렸다.
“꺄악!”
“음…? 여자였군.”
광마가 두 눈을 찡그리고 백서린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생각해보니 빙궁주에겐 여식이 있었군. 미안하네. 내가 최근에 당가의 독에 당해 눈이 좀 침침하거든.”
“…”
백서린이 아픈 손목을 붙잡고 조용히 그를 노려보자 광마가 말했다.
“대답 좀 해주게. 내가 눈이 안 보여서 일단 후려칠지도 모르니 말일세.”
“… 무슨 일로 빙궁을 찾으셨습니까?”
“약을 구하고 있네.”
“약이요…?”
백서린이 손목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날아간 자신의 검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그녀가 조금씩 시간을 끌었다.
“… 빙궁의 약이라고 하면 무엇을…”
“만년빙옥. 그게 필요하네.”
“마… 말도 안 됩니다! 그것은 저희 빙궁의 신물입니다!!”
“쓰지 않을 신물은 가치가 없지. 그래서 내가 쓰려고 찾아온건데… 궁주가 없구만. 곤란하게 됐어….”
“…”
자신의 얘기는 듣지 않고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광마를 보며 백서린은 당혹감과 동시에 공포를 느꼈다.
광마는 그 별호대로 광폭한 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예를 갖춰 말을 하고 있으니, 백서린은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 사람의 말을 뱉는 것과 같은 괴리감을 느꼈다.
그 때, 턱을 쓰다듬던 광마가 입을 벌렸다.
“… 혹시 자네는 권한이 없나?”
“어떤 권한이요…?”
“만년빙옥을 내 줄 권한.”
“… 궁주가 아닌 이상, 누구도 그 물건에 손을 댈 수는 없어요.”
“궁주는 언제 돌아올 것 같나?”
“… 모릅니다.”
“모른다라…. 곤란하군.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야….”
“…”
눈이 침침하다고 하니 혹시라도 기습이 먹히지 않을까?
백서린이 슬그머니 공력을 이끌어내려던 순간.
쾅!
“꺄악!”
광마가 진각을 내질렀다.
“거 내가 눈이 침침하다고 그랬지, 기감마저 병신이란 얘기는 안 했다네. 본 모가 기분이 몹시 좋아 한 번만 봐줄터이니 암수를 가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ㅇ… 예….”
“미안한가?”
“예?”
“방금 자네는 매우 비겁하게 암수를 가하려고 했다네. 비겁하다 생각하지 않나?”
“… 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미안함을 느끼나?”
“… 광마 선배님께서 본 궁을 멋대로 침범하셨기에…”
“미안하냐고?!!!”
광마가 짜증 섞인 고함을 내지르자 백서린이 몸을 벌벌 떨었다.
“예! 예에…!”
“그렇다면 내게 신물을 넘겨줘도 되겠군. 맞나?”
“…”
“맞냐고?!”
“예! 맞습니다….”
“고맙네. 그럼 나는 자네한테 정당하게 신물을 넘겨받았으니 부디 내 뒤를 쫓지 않길 바라네. 혹시나 쫓는 추격조를 발견할 시 모조리 팔을 잘라버릴테야. 알아들었나?”
“… 예.”
“좋군. 말을 잘 듣는 아이로구나.”
광마가 허리춤에 메고 있던 전낭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쿵.
“다친 무사가 있거나 내가 파괴한 건물들은 다 그걸로 알아서 고치게. 당가에서 훔쳐온 것들이니 제법 가치가 있을게야.”
“… 감사합니다.”
“신물은 이 아래에 있는 것 같은데 맞나?”
“… 어떻게 그걸…”
“말했잖나. 눈이 침침할 뿐이지, 기감마저 병신은 아니라고. 음기가 저렇게 새어나오는데 어찌 모르겠나?”
“…”
“바닥을 조금 부수는 것도 그 전낭으로 퉁치지. 그럼 나중에 또 보세나.”
“예?”
백서린이 광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구심은 금세 해결되었다.
광마가 발을 높게 들어 바닥을 향해 진각을 내질렀다.
쿠궁!!
“잘 안 부숴지는구만, 이거.”
“저… 광마 선배님….”
“아, 나 선배님 아니라고!”
“… 광마 대협.”
“대협도 간지럽지만 선배님보단 낫군. 말하게.”
“혹시 바닥을 부술 생각… 이십니까?”
“그렇네만?”
백서린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 이 아래로 내려가는 비밀 계단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바닥을 부순다면 빙궁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양해를 구했지 않았는가?”
“아니… 그…! 내궁이 무너지면 빙궁 전체가….”
“아, 모르겠고. 이 쪽이 더 빠를 거 같으니 그냥 하겠네.”
“아니… 좀!!”
백서린이 답답함에 목청을 높이는 것보다 광마가 한 번 더 발을 내지르는 게 더 빨랐다.
쿠구궁!!!
“오, 이제야 깨졌구만.”
“나… 난 몰라…. 아버님….”
“그럼 다음에 보세나.”
광마가 깨진 얼음 틈새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쿠구궁!!!
굉음과 함께 빙궁이 점차 기울었다.
“…”
무너져내리는 내궁을 보며 백서린이 중얼거렸다.
“광마, 이 개새끼야….”
무너지는 내궁의 충격 때문에 광마가 남기고 간 전낭이 열려 그 안의 내용물이 후두둑 쏟아져내렸다.
그가 건네준 전낭엔 암기로 쓰는 싸구려 우모침만이 가득했다.
*
“크흐흐, 이게 만년빙옥이구만….”
빙궁을 빠져나와 한적한 객잔을 찾은 광마 독고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푸른 구슬을 바라보았다.
독고진 정도의 고수가 자신의 내공으로 만년빙옥의 음기를 어느정도 막고 있음에도 손에 살얼음이 낄 정도로 강력한 음기를 내뿜는 것이 과연 빙궁의 신물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었다.
“흠….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극양의 심법, 구양신공(九陽神功)을 익히고 있던 광마에게 있어 음기는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피를 부르는 투쟁의 화신, 독고진에게 여자가 붙을리 만무했고 그 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기에 그도 따로 신경쓰진 않았다.
당가와 부딪히기 전까지는.
“… 개 같은 새끼들.”
사천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당문을 떠올리자, 독고진이 이를 갈았다.
온 몸에 핏줄이 일어나며 기혈이 날뛰기 시작하자 독고진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우….”
당문이 독고진에게 뿌린 온갖 독 중 하나는 극양의 기운을 더 끌어올리는 독이었다.
안 그래도 극양의 심법을 가지고 있던 독고진은 처음엔 자신의 양기가 강해져서 좋아했으나 갈수록 기혈이 자주 날뛰고, 광증이 심해지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빙궁을 찾아갔다.
빙궁의 신물, 만년빙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 이걸로 음양지체라도 이뤄 등선이라도 해야겠군. 클클클.”
실 없는 소리를 한 뒤, 광마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지금부터 할 운기조식에 방해가 들어오면 기혈이 뒤틀려 주화입마에도 빠질 수 있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내공을 끌어올려 기감을 퍼뜨리자 주변의 모든 존재가 느껴졌다.
아랫층에서 졸고 있는 점소이부터 저 먼 곳에 있는 개미들까지.
“…”
내공을 거둬들인 광마는 손에 들린 만년빙옥을 자신의 손에 올리고 가부좌하여 앉았다.
“후우….”
긴 숨을 내뱉고는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운기행공을 시작하였다.
그가 익힌 구양신공의 구결에 따라 대주천을 끝마친 그는 손 끝에서 느껴지는 음기를 조금씩 받아들기 시작했다.
거친 열기를 띠고 있던 그의 양기와 만년빙옥에서 새어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맞닥뜨리자 그의 몸 안에서 두 기운이 격렬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크윽…. 이렇게도 음기가 많았다고?’
당장이라도 온 몸의 혈도가 얼릴 것만 같은 음기가 그의 몸을 따라 돌자 독고진은 급하게 양기를 더 끌어올려 혈도를 다시 따듯하게 데웠다.
그러자 만년빙옥에서 나온 음기가 기경팔맥의 다른 부분을 모두 지나고는 최후의 두 경맥, 임독양맥으로 뻗어나갔다.
‘미친…. 어디로 가는거냐!’
머리에 위치한 백회혈과 다리 사이의 회음혈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음기를 느끼며 독고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소위 두 혈을 생사현관이라고 하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목숨과 직결된 혈도이기에 생사현관이라 불렀고, 잘못되면 생명이 위험한 곳이었다.
주화입마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독고진은 자신의 안에 있는 양기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양기가 부족하다…. 신물의 음기가 이렇게도 강했단 말인가?!’
결국 독고진은 선택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음기로 회음혈이 잠식되더라도 사는게 우선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모든 양기를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로 보냈다.
‘고자가 되더라도 일단 살아남는다…!’
백회혈로 향한 음기를 자신의 양기로 다 태운 뒤, 독고진은 살아남기 위해 백회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만년빙옥에서 나온 음기가 탁기로 막혀있던 회음혈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었기에 백회혈을 막고 있는 탁기는 자신의 양기로 깨부숴서 대주천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크윽…!’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독고진의 몸을 잠식하고 차라리 모든걸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절망감 속에서 독고진은 끝없이 백회혈을 두들겼다.
‘제발…, 제발…!’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움 속에서 독고진이 모든 걸 포기하려던 순간.
‘아…!’
백회혈과 회음혈의 탁기가 깨부숴지며 진기가 대주천을 시작하였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한 단계 더 상승하며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전능감을 즐기고 있던 와중.
쿠콰콰!
‘미… 미친!’
회음혈을 지나 만년빙옥의 음기가 독고진의 양기를 모두 흡수하였다.
‘크윽…!’
마침내 기경팔맥을 다 돈 음기가 안정되어 그의 단전에 안착하자
독고진은 정신을 잃었다.
*
“으….”
새된 목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독고진이 가장 처음 본 광경은 자신의 몸에서 배출된 탁기들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새하얀 팔이 보였다.
여리여리하지만,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같이 고운 피부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독고진의 머릿 속이 번뜩였다.
‘설마… 환골탈태(換骨脫胎)를 이뤄낸 것인가?!’
그러자 조금씩 기억이 돌아왔다.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생사현관을 뚫었던 기억이.
“크하하핫! 드디어 내… 가?”
끓어오르는 기쁨에 웃음이 튀어나오던 차,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문득 자신의 목을 만지던 차….
“이게 왜 있어?”
독고진은 자신의 몸에 달린 헐거벗은 여인의 가슴을 보았다.
“… 여자가 되었다고? 본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