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명의 기억이 방대하게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또 한명의 나.
또 한명의 박민재였다.
주변에 시아가 있었고 진아가 있었고, 수진이를 포함해서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들과 함께 파이널 칠드런과 싸우고 끝내 패배해서 소중한 여자를 지켜내지 못했다.
복수심에 그는 시공을 거슬렀다.
그리고 거기서 아직 갓난 아기인 또 다른 자신을 만난 순간·····.
“···내 안으로 들어와서 흡수 되었던 거군.”
[맞아. 그게 바로 나다. 너지만 너가 아니지. 난 나다.]
“·················.”
[네 안에 있으면서 느낀 것인데··. 세계는 하나가 아니더군. 난 처음에 널 보고 시간을 거슬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변화하는 세계를 보고 생각했지.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 자체가 아니라고.]
“그럼·····.”
[그래. 난 헛수고 한 거지.]
“············.”
[내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렀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평행세계라니···.]
“··············.”
[어쩌면 우리와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을 살고 있는 평행 세계가 제법 있을 지도 몰라. 네 몸안에서 그 존재를 때때로 느끼고 있었지.]
“·····그건 됐어. 넌 나한테 도움이 되겠다고 했었지? 어떻게 할 거야?”
[간단한 거다. 모든걸 처음부터 시작할 각오가 있나?]
“뭐?”
[예스, 노로 대답해라. 이제 시간도 없으니·····.]
“예스라고 하면 시아는 살릴 수 있나?”
[예스.]
“나도 예스다.”
내 말에 또 다른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나의 영혼과 너의 모든 힘을 다 소비해서 내가 만들어낸 최후의 초능력을 쓰겠다. 어떤 능력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리고 거기서 내 의식은 끊어졌다.
[원래는···. 내가 시아와 함께 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능력이지만 이렇게 쓰는군.]
심상 공간 안에서 또 다른 민재가 허무하게 중얼 거렸다.
이 능력을 쓰면 그의 영혼은 더 이상 민재의 몸안에 있을 수 없다.
아마 하늘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소멸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어차피 내 시아는 이제 없으니까·····.]
[섭섭한 소리 할 거야?]
그때 그의 바로 옆에서 빛의 무리가 뭉치더니 시아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타났다.
시아와 똑같이 생겼지만···. 아주 조금 느낌이 달랐다.
[시아야····?]
다른 차원의 시아는 다른 차원의 민재에게 윙크를 하면서 말했다.
[하여튼 이 둔탱이···. 난 항상 네 옆에 있다고?]
[하···· 하하하····. 그래. 난 항상 오버만 하는 구나.]
[정말이야····. 이런 남자한테 반한 내가 바보지.]
[그래···. 넌 바보야. 그리고 나도··.]
두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진한 키스를 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은 한줄기의 빛으로 합쳐져서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마치 물거품이 사라지듯이·····.
“뭐지? 이건····?”
양승모···. 아니 크리스 박사는 크게 놀랬다.
갑자기 오열하고 있던 민재의 몸에서 발광이 나더니 그 빛이 시아와 민재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 나가더니 그대로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기계는···. 기계는 정상적으로 작동 하는군. 그럼 저건 도대체·····.”
크리스 박사는 과학자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이면서도 자신의 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순간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 민재와 시아의 영혼이라고 확신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었다.
“이런··· 기계가···.”
그는 이 현상을 이레귤러로 여기거 기계를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기계는 작동을 시작했다.
성모인 시아의 몸이 분해되면서 그녀의 유전형질이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는 크리스 박사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 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로서도 이건 알 수가 없었다.
에필로그.
수십 년 후.
세계는 여러 가지 대 변화를 맞이했다.
어느날 부터인가 갑작스럽게 공평하게 출산하게 된 남녀의 출산 성비율.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세계 최강의 능력자이자 위대한 계몽가로 알려진 기적의 박민재.
그리고 그의 반려였던 민시아까지···.
이 둘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세계에서는 많은 소란과 추론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소란 속에서 한명의 여성이 두각을 드러냈다.
호주의 두뇌라고 불리던 여자.
이른바 민진아라는 여자였다.
민재가 죽고 나서 한국 정부는 호주를 예속화 하려고 했다.
민재가 없는 이상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틀린 판단이었다.
민재가 없다고 해도 민재가 남긴 최고의 능력자들은 건재했다.
민재와 파이널 칠드런이 부재중인 시계에서 문리향이나 한수진을 이길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없었다.
결국 호주는 독립을 선언했고, 진아는 미리 준비해둔 호주의 막대한 식량을 당근 삼고 문리향과 한수진을 채찍 삼아서 세계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차츰 세계를 안정 시켜 갔다.
그렇게 해서 민재가 없어도 세계는 조금씩 안정되어 갔던 것이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언덕.
거기에는 시체가 없는 묘가 두 개 있었다.
[박민재 민시아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묘는 두 개 였지만 묘비는 하나였다.
이 무덤을 만든 사람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묘 앞에 한명의 노파가 휠체어를 타고 꽃을 바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 왔네요. 제가 보이나요? 주인님.”
대답이 있을리 없는 묘소에 꽃을 바친 노파는 인자한 미소를 지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 같았다.
그녀가 바로 세계를 손짓 하나에 움직이는 강철의 여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민재가 사라지고 수십년···.
아름답던 그녀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 미모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재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그 시절에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민재가 사라지고 붕괴하려는 호주를 바로 잡은 것도 그녀였다.
그게 그녀가 민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가 남긴 것을 이어 받는 것.
그것 말고는 민재를 위해서 할 수 있는게 떠 오르지 않는 그녀였다.
“후우····. 그 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 저도 곧 만나러 갈 것 같네요.”
그녀는 묘의 비석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이렇게 묘비가 아니라 진짜로 찾아 뵐지도 모르겠습니다. 호호···. 그게 기대가 된다니 참 이상하지요?”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진짜로 민재에게 대화를 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성묘를 마친 그녀는 휠체어를 돌려서 완만한 언덕을 내려가려고 했다.
몸은 불편해 졌지만 아직까지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산재해 있었다.
오늘도 간신히 시간을 낸 것이다.
그렇게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시골 마을 어귀에서 어떤 아이들이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걸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떤 진아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놀랬다.
“·······저기····. 저기 얘야····?”
떨리는 목소리로 애들을 보른 그녀는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응? 어····. 할머니 누구세요?”
“할머니 처음 보는데···. 우리가 휠체어 밀어 드릴 까요?”
“·············.”
느낄 수 있었다.
이론이 아니라 가슴이 파악했다.
이 둘에게서 너무나 그리운 두 사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의 앞에 쪼르르 달려온 두 명의 아이를 보고 그녀는 떨리는 눈을 하고 말했다.
“너희들···. 너희들 이름이 뭐니?”
“나는 민재요. 박민재.”
“나는 시아. 민시아입니다.”
“················.”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말을 하려고 해도 입이 뜻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때 마을 사람인 듯한 어른이 와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 녀석들··. 뭐하고 있니? 할머니 귀찮게 하면 안 된다.”
“귀찮게 안 했어요..”
“맞아요. 우리가 할머니 도우려고 했어요.”
“하여튼 이 말썽 꾸러기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서 아이들을 물리고 진아에게 다가와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뭘 몰라서···.”
이 마을의 사람들은 민재의 부하들이었던 정규군들의 후손이다.
그래서 진아가 누군지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이보게 저 아이들은····.”
“아···. 그게 고아들입니다. 사실 둘이서 갓난 아기로 갑자기 나타났는데···. 하필이면 전설의 묘지에 나타나서·····. 거참 누가 그런 신성한 장소에 애들을 버렸는지····.”
진아는 마을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의 눈에는 멀리서 천진하게 웃고 있는 두 아이들에게서 너무나 행복한 환상을 볼 수 있었다.
“버린게 아니야.”
“예?”
“······돌아오신 거야.”
그녀는 정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두 사람의 기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마저도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저마다 다른 대답을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계가 아무리 미쳐도·····.
인간이 아무리 타락해도······.
결국 인간은 사랑을 하는 법이다.
때로는 상처 받고, 때로는 후회도 하고, 때로는 미련과 상처만 가득 남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한 감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