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다음날부터 우리는 비교적 자유롭게 저택을 다닐 수 있었다.
원래 우리가 오고 나서부터 이 저택에서는 필요 최소한의 인원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비밀을 들키고 나서부터는 원래 돌아다니는 사람들 전원이 저택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사람이 무척 많네요? 몇 명이죠?”
“800명.”
“··············많네요.”
별로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닌가?
난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녀들이 대우는 어떤 편이죠?”
“보안을 위해서 외출은 엄금하고 있지만 대우는 다른 집안의 슬레이브들 보다 훨씬 편하게 해 주고 있지. 자네도 그렇게 하고 있나?”
“아···· 제 경우에는 몇몇은 외출까지 허락하고 있습니다.”
“호오~, 여자들이 자네를 무척 잘 따르나 보군.”
“예. 뭐···. 신뢰 받고 있는 편이죠.”
그러고 보니 내 가족들이 보고 싶다.
이틀 밖에 안 떨어졌는데 이렇게 보고 싶어졌다는 것은 그녀들이 내 가족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아빠~. 수진이 언니가 나한테 이것 만들어 줬어. 예쁘지?”
그때 혜미가 머리에 꽃관을 쓰고 쪼르르 달려와서 자랑을 했다.
“그래 예쁘구나···. 고맙다고는 했니?”
“응. ·····아니 안 했어····.”
아이는 처음에는 ‘응’ 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말을 바꿨다.
어른이 저런 모습을 보이면 가식적으로 보일텐데 아이가 하니 천진해 보인다.
김수경씨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가서 고맙다고 하렴···.”
“예~.”
아이는 다시 수진이가 있는 곳에 달려가서 수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수진은 그런 아이가 예뻐 죽겠다는 듯이 껴안고 잔디밭을 뒹굴었다.
“보기 좋군····.”
“보기 좋네요.”
나와 김수경씨의 사이에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뭐···. 실제로 보기 좋으니까 말이야.
내가 캔버라에 오고 나서 일주일 간은 평화로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혜미는 어느새 우리가 친숙해 졌는지 살갑게 굴기 시작했고 우리도 그런 혜미가 좋았다.
아이라는 것은 이렇게 귀여운 것이었던가?
정부에서 왜 못 키우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우리는 혜미의 귀여움에 흠뻑 빠져 버렸다.
특히 수진이는 혜미를 너무 예뻐해서 같이 목욕하고 같이 잠까지 잘 정도였다.
혜미도 그런 수진이를 무척이나 따랐다.
난 주로 김수경씨와 같은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 사람은 우리 같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대환란 전의 미디어 자료를 대량으로 보여줬다.
어둠의 루트에서 몰래 얻은 밀수품이라면서 보여주는 그것들은 놀라웠다.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는 노래까지···.
그 모든 것에 남녀의 연애라는 것이 담겨 있었다.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상처받게···.
여러 가지 형태의 연예가 거기에 나와 있었다.
과거 정부에서 보여줬던 다소 지나칠 정도로 비약 되었던 자료와는 달랐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공평하고 남자가 노예취급 받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활기차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대가 과거에 있었다.
난 한동안은 그 자료들을 구경하면서 시간 가는줄을 모르고 지냈다.
미국에서 그 개차반이 오면 바빠지겠지만 그 전에는 이렇게 훈훈한 시간만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아~. 피곤하다···. 이 집은 다 좋은데 온천이 없어서 좀 그렇네···. 그렇지 시아야?”
“예····. 그렇네요.”
“······그래도 일단 씻기는 씻을까? 너 먼저 씻을래?”
“····아니요. 주인님이 먼저 씻으세요.”
“········시아야. 혹시 뭐··· 화난 것 있니?”
“아니요.”
“····그래. 알았어.”
왜일까?
요즘 들어서 시아의 상태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뭔가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뭔가 고심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김수경씨의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저런데···. 뭐가 문제인 걸까?’
난 제법 넓은 욕탕에 몸을 담그고 시아가 어째서 이상해 졌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게····.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누군가는 바로 시아였다.
그녀는···. 알몸에 베스 타올만 걸치고 욕실로 들어와서 나에게 말했다.
“주인님········· 등··· 밀어 드릴게요.”
“········뭐라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영문을 모르겠다.
“··············.”
“··············.”
슥~, 슥~, 슥~.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아가 내 등을 타월로 닦아주는 소리만 들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여자한테 이런 서비스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는 항상 여자들이 해주던 행위이기도 했다.
개중에는 스폰지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 일부로 밀어주는 여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아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아는 나한테 알몸을 보이는 것도 부끄러워했는데···.
‘진짜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등을 다 밀었는지 시아는 물을 끼 얹었다.
“고마워. 시아·········.”
뒤를 돌아본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뒤를 돌아보자 보인 것은 내가 처음으로 완벽하게 바라본 시아의 알몸이었다.
수증기의 열 때문에 약간 상기된 뺨과 새하얀 나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처럼 나를 유혹했다.
“시아야······.”
“주인님····. 저·····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 했던게 있어요.”
“시아야···. 일단···.”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시아가 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겠다.
난 그런 그녀를 멈추려고 했지만 시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제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절 봐 주세요.”
“·············.”
시아의 목소리는 간절하고 절박했다.
난 일단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주인님에게 정말로 감사드려요. 주인님 덕분에 전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편하게 자랄 수 있었어요. 하고 싶은일 다 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불편 하나 없이·····.”
“·············.”
“전 그런 주인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어요. 그리고··· 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주인님이 저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
난 시아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지금 시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진심을 얘기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을 정직하게 고백하려고 하는 것이다.
추한 면도····.
약한 면도····.
그 전부를 말이다······.
그게 얼마만큼 큰 결심을 해야 할 수 있는일인지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시아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주인님의 곁에 있으면서 항상 조심했어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나에게 질리지 않게···. 혹시라도 나에게 염증을 느끼지 않도록········.”
“··············.”
“저는 그런 비열한 여자예요····. 저도··· 저도 주인님에게 안기고 싶었어요. 하지만··· 만약에 안겼다가 주인님이 저에게 실증을 느끼시면···. 제가 버려지면··· 전 그럼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시아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아야······.”
내가 시아에게 손을 뻗자 시아는 한걸음 물러나면서 외쳤다.
“잠시만요···. 조금만 더요····. 제가 전부 말하게 해 주세요. 제 전부를 말하게····.”
“··············.”
시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주인님···. 난··· 난 쭉~ 주인님한테 거짓말 하고 있었어요. 오로지 내 생각만 하면서 주인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흑······ 흑흑···.”
“시아야·······.”
난 어린애처럼 무방비하게 흐느끼는 시아를 보고 안타깝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몰랐다···.
그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있는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시아에 관해서 모르는 일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나만 물어볼게.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그러니까 네 진심을 말하게 된 거니?”
내 질문에 돌아온 시아의 대답은 무척 뜻밖의 것이었다.
“········혜미의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나서 부터예요.”
“··············.”
“모두가 그녀를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전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짧은 시간이라도···. 그녀는 두려워 하지 않았어요. 그 후에 절망과 파국이 기다리고 있어도 남은 시간과 애정 전부를 혜미를 위해서 썼어요.”
그런가? 시아의 시선에는 그녀가 그렇게 정렬적으로 보였던 건가?
난 그녀의 얘기를 듣고 불쌍한 여인이라는 생각 밖에 하지 못했는데 시아에게는 그녀가 그렇게 보였을 줄이야····.
“주인님····. 저도 그러고 싶어요. 주인님이 나중에 다른 여자를 더 총애해도 상관없어요. 주인님이 절 버리셔도 좋아요. 그래도··, 이 가슴속에 있는 모든 정렬을 지금 마음껏 태워버리고 싶어요.”
“···················.”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할게요. ····주인님······. 사랑해요.”
시아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내 가슴속에서 뭔가가 터진 느낌이 들었다.
“시아야~!!!!”
난 격정적으로 달려가서 시아를 않았다.
시아도 내 등을 마주 않았다. 그녀와 나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하나로 겹쳐져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이제까지 그 어떤 키스보다 더 농밀하고 진한 키스를 했다.
시아가 날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말을 해 본적은 없다.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 말을 입에 담기에는 지금 이 세계는 너무나 차갑고 상막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시아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말했다.
“시아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몇 번이고··, 평생이고··· 계속해서 말해 주고 싶었다.
그녀와 내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도 서로가 사랑한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저도···. 저도 사랑해요. 주인님···.”
“민재라고 해줘.”
“민재···씨.”
“시아야~.”
난 그녀를 그대로 침대에 데려갔다.
침대에 그녀의 알몸을 눕히자 드디어 그녀와 하나가 된다는 실감에 심장이 더욱더 두근거렸다.
“주인····.”
“민재라니까?”
“····민재씨···.”
시아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과거 여름의 바다에서 불러준 이후로는 스스로 조심하려고 했는지 절대로 부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했다.
시아는 나와 가까워져서 서로의 관계가 발전하고 결국은 변질되지 않을까 무서워했으니까···.
아마 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아가 이제 나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아의 촉촉한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웠다.
다른 여자들하고 섹스를 할 때와는 기대감이 전혀 다르다.
난 지금 여자를 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안는 것이다.
그 차이 하나가 이렇게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줄은 몰랐다.
난 마치 처음 경험하는 남자처럼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몰랐다.
시아는 그런 날 그냥 순종하듯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난 그런 시아에게 홀린 듯이 키스를 했다.
============================ 작품 후기 ============================
으음... 역시 붙여서 연참을 하니까 전편의 추천수가 확 줄어드는 군요....
역시 다시는 하지 않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지금 발생한 절단은 절대로 고의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가능하면 앞에서 보인 '사랑해요' 라는 단어에서 짜르고 싶었습니다.
혹시 눈치 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써오면서 사랑이라는 대사를 최대한 자제해 왔습니다.
아니 대사로는 거의 안 나왔을 겁니다.
왜냐하면 시아의 첫경험을 위해서 비장의 무기로 아껴두고 싶었기 때문이죠.
로맨스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말.... 차포 다 때고 장기 두는 기분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마음껏 사랑한다는 단어를 쓸 수 있어서 기쁩니다.
항상 응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천으로 제가 연참 할 수 있도록 의욕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즐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