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깨달음.>
호주에서의 생활은 의외로 단조로웠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가끔씩 시드니의 청사에 가서 알아듣지도 못할 보고를 받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사실 십천이라고 해서 영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했다고 실패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그러니까 지금은 사망한 사음의 장태수라는 남자는 자기 나름대로 영지를 발전시킨 답시고 이상한 정책들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 문명속에서 도시라는 것은 수많은 전문가들의 협조와 조화로 유지 관리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생 초짜 하나가 끼어서 쓸데없이 불협화음을 내니까 결국은 도시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른 십천들은 그 사건을 거울삼아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라는 것이다.
어차피 정부에서 보조로 붙여준 전문가들이 알아서 도시를 운영하는 이상 내가 괜히 이상한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난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나보고 캔버라로 가라고요? 어째서?”
나의 불평에 정부의 관리관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어쩔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귀빈이 와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왜 나보고 직접 가라는 거냔 말이다.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 수도인 캔버라를 버리고 시드니로 왔는데·····.’
“캔버라에도 김수경씨는 있잖아요?”
난 귀찮은 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변명했다.
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예.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민재님이 가 주셔야 균형이 맞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도 상당한 거물을 보낼 것 같아서······.”
“············.”
난 눈살을 찌푸렸다.
호주에 와서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이 이것이었다.
미국과의 트러블.
원래 호주는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그 전에는 미국과 일본이 반반씩 나눠 가지고 있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중국과 미국의 전쟁통에 일본이 미국의 뒤통수를 치고 완전이 호주 전체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호시탐탐 일본에게서 호주를 뺏어 오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호주를 이제 한국에서 접수했으니····.
미국의 입장에서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렸다.
다만 여기서 문제라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 개마냥 그냥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난 한숨을 쉬면서 관리관에게 말했다.
“누가 오는데요?”
“미국의 랭킹 2위인 애덤스 마이클스가 온다고 합니다.”
“오~ 제기랄·····.”
욕이 절로 나왔다.
미국의 랭킹 2위 애덤스 마이클스.
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왜냐면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아메리칸 개차반이니까 말이다.
원래 고위 능력자는 대부분 난폭하고 이기적인 면이 좀 있다.
사방에 자기 뜻대로 안 되는게 없으니 그런 사고 방식이 고착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 인간은 좀 남 달랐다.
성질이 워낙에 난폭해서 미국에서도 감당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랭킹 1위인 제이 도미니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과 상의원들도 이 인간 앞에서는 눈치를 봐야 한다고 한다.
공개석상에서도 말이다.
안 그럼 머리가 날아간다나····.
“그 개차반이 온다는 말이죠?”
“예···. 그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능하면 김수경님과 박민재 님이 동시에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알았어요. 캔버라로 갈게요.”
난 한숨을 쉬면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한국의 정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강 알겠다.
미국이 애덤스 마이클스를 보낸 이유는 아마도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 개차반이 가장 잘하는게 그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지금 미국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십천의 두 명을 상대로 붙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나하고 김수경씨로 놈을 상대 할 수 있을까?
난 한국의 랭킹 2위고 김수경씨는 현재 5위다.
저번 전쟁전에는 8위였지만 전쟁의 공적을 인정 받아서 5위까지 오른 것이다.
참고로 지금 한국의 랭킹 구도는....
1위 멸천의 신대호.
2위 기적의 박민재.
3위 홍련의 최우진.
4위 은룡의 주영민.
5위 창공의 김수경.
6위 섬멸의 김철웅.
7위 강폭의 한종호.
8위 공석.
9위 공석.
10위 유력의 양승모.
이렇게 되어 있다.
8위와 9위는 지금 정부에서 뽑고 있지만 10위인 양승모가 부동인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력의 양승모라고는 하지만 난 그 사람이 이번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은근히 조를 짜는 와중에도 그 사람만 특별 취급이고 말이다.
부상중이던 일본의 육대천왕 두명을 죽인 것이 이 사람이라고 예측하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모든 행동이 베일에 싸여 있다.
이번에도 굳이 8위와 9위를 공석으로 두면서 까지 그의 랭킹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은 도대체 뭘까? 이제까지 별 신경은 안 쓰고 있었지만······.’
새삼 생각하니 그 인간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는 했다.
슬쩍 눈앞에 있는 정부 소속의 관리관을 바라보며 물어볼까 싶었지만····.
아마 물어도 대답은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난 포기하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캔버라에는 언제 가면 되죠?”
“가능하면 빨리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개차반이 언제 올지는 정확한 고지를 안 해서····.”
“··············.”
하여튼···. 미국이 시비를 걸려고 단단하게 작정한 모양이다.
난 우선 저택으로 가서 내 식구들에게 내가 한동안 집을 비운다고 말했다.
“예~? 주인님 또 전쟁터에 가세요?”
“아니야. ·····아마도.”
은하의 말을 난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 입장에서는 나의 단호한 부정이 미덥지 못한 모양이다.
수진이가 나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건데?”
이 집에서 나한테 유일하게 당당하게 화를 낼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수진이었다.
“다 말해 줄 테니까 그렇게 째려보지 마.”
“·········일단 듣고.”
난 그냥 그녀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으면서 얘기를 해 갔다.
“후우~, 사실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들에게 전부 상세히 말했다.
그리고 내 말을 다 들은 여자들은 찹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진아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문을 열었다.
“애덤스 마이클스면 그 사람이죠? 신경질 나서 자국인 5,000명은 학살했던····.”
“········그럴걸?”
유명한 사건이다.
그냥 기분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차반이 죽인 인간이 5,000명이다.
그것도 자국민을 말이다.
여자들 표정이 확 어두워 졌다.
“그래도 일단은 사절로 온 거니까 별 일은 없을 거야.”
“그건···· 그냥 주인님 예상이잖아요?”
“·············.”
시아의 말에 난 뭐라고 대꾸 해 줄수 없었다.
사실 그건 내 예상도 아니다.
내 예상으로는 그 새끼가 우리한테 시비를 걸 테고 그리고 나하고 김수경씨가 편먹고 그 놈을 조지던가 아니면 반대로 조짐 당하겠지?
어쨌든 말만 접견이지 사실상 언제 싸울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때 수진이가 천청벼락 같은 말을 꺼냈다.
“나도 따라갈게.”
“수진아~~!!”
“따라간다고···. 여차하면 방패막이로 써도 좋아. 나라면 그 정도 역할은 할 수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지금 쓸데없는 소리 하는게 누군데~!!!?”
수진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네가 없는 동안 나 보고 이 넓은 집에서 하루하루 우울하게 기다리라고? 두 번 다시 그런 사태는 사양이야. 내 눈앞에 있어. 죽어도 나 죽고 난 다음에 죽으란 말이야. 이 바보야~!!!”
“······수진아·····.”
그녀의 호의는 솔직히 고마웠다. 하지만 역시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어떻게는 그녀는 설득 시키려고 하는데····.
“그럼 나도 따라갈래요.”
“저도···. 방패막이로 하려면 에러든 슬레이브든 아무 상관없잖아요?”
“나도······.”
오 이런·····.
중구난방 나 따라 오다고 한다···.
이걸 어쩌지?
‘사람 돌겠네······.’
다음날···.
난 캔버라로 가는 헬기에 올라탔다.
그런 나를 따라오는 것은 시아와 수진이 뿐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주인님··· 조심해서 다녀 오세요.”
“그래···. 다녀 올게. 진아야.”
“훌쩍····. 주인님··· 잘 갔다 오세요.”
“알아···. 알았으니까 울지 마 은하야···. 별것 아니라니까?”
“··············.”
“나 없는 동안 집 좀 잘 부탁해 지선아.”
“········알았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후우~, 그녀들이 왜 남아있기 싫다고 하는지 알겠다.
전쟁터 소집 때는 시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별을 하지 않았지만···.
정말 이 짓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 질 것 같지가 않다.
‘그나마 이 둘을 데려 가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어제 난 아무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진아가 십천씩이나 되는 사람이 홀몸으로 이동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녀들 중 단 두 명만 데려가기로 했다.
그러자 여자들끼리 쑥덕 거리더니 시아와 수진이가 나를 따라오기로 한 것이다.
왜 이 둘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한편으로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내 이기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아와 떨어지고 싶지는 않다.
이전 전쟁터에서 시아의 신변에 큰 일이 생길 뻔 하기도 했고····.
가능하면 함께 있고 싶다.
위험한 곳이든 안전한 곳이든 무작정 방치해두는 것 보다는 무조건 나와 함께 있는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태운 헬기는 캔버라의 김수경의 집으로 날아갔다.
“여기가 김수경님의 집인가요?”
“그런가봐···. 두 사람 다 말 조심 하도록 해. 특히 수진이 너.”
“내가 뭘·····.”
몰라서 묻냐?
개인적으로 김수경씨 본인에게는 감사하고 있다.
그 사람의 기지 덕분에 시아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빚 하나는 크게 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이런 세계의 평범한 남자.
아마 여자에 대한 마음가짐은 나하고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런데 남자 싫어하는 수진이가 뭐라고 가시라도 세우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시아야 원래 남자에게 예의를 지키는 타입이니 걱정을 좀 덜어도 되겠지···.
============================ 작품 후기 ============================
으음.... 시아가 욕을 무진장 먹고 있군요....
사실 스토리 전개상 모든 이유를 밝힐 수도 없고.... 시아에 대한 여러분들의 분노는 그냥 지당하게 받아 들일 수 밖에 없군요.
막연하게 한 마디 하자면 다 이유가 있다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세한 사정과 설정을 공개하고 싶어도 앞으로 있을 스토리와 진행된 얘기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가 없네요.
그나마 여러분들에게 희소식을 전해 주자면 이번 챕터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순애 러브 스토리를 쓴다는 것이 제법 깐깐한 일이기는 합니다. 여러가지로 뭐랄까.....
부딪히는 면이 많다고 해야 할까요?
달달함을 원하시는 분들도 있고... 혹은 좀더 높은 수위를 원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게 생각보다 좀 어렵네요.
노예 상인은 그런 의미에서 달달함 없이 주인공 자체가 악역이었으니 쉬웠는데....
그래도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추천 덕분에 한주간 연참하고 일요일 삼연참 까지 이뤄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