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202화
“당연하지. 내 집도 그리 멀지 않잖아. 종종 저녁 먹으러 갈 거야. 티나와도 그렇게 약속했고.”
“음. 맞아. 그랬었지.”
울고불고 야단이던 티나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하던 진효섭을 떠올린 건지 테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 번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래도 왠지 집에서까지 나간다고 하니까 완전히 작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
“그러게. 익숙해졌나 봐. 나도 되게 아쉬워.”
테디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아냐, 진짠데.”
확신 어린 말투에 당황한 진효섭이 진심임을 다시 전하려는데, 테디가 장난스레 말했다.
“새로 계약한 집. 거기서 안단테 에스퍼랑 같이 사는 거 아냐? 기대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던데.”
“아, 그건…….”
진효섭은 차마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 못했다. 아쉬운 것도 맞지만 안단테와 함께하게 된 데 두근거림이 더 컸던 탓이다.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그게 네가 행복한 길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해. 내가 안단테 에스퍼한테 가서 한마디 해 줄 테니까. 여전히 국가안보국에는 네 자리가 비어 있을 거라고 말이지.”
테디가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안단테를 볼 때마다 경외감 섞인 표정을 하면서 둘만 있으면 이렇게 말하는 테디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응. 고마워, 테디.”
“별말씀을. 어서 나가자. 나도 이제 슬슬 견디기가 어려워서.”
“견뎌? 뭘?”
“그런 게 있어. 내가 피곤한 또 하나의 이유.”
한숨을 푹 내쉬며 테디가 밖으로 나갔고, 진효섭이 그 뒤를 따랐다. 꼭대기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오한이 든다며 테디가 어깨를 쓸었다. 날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는데 말이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춰 섰다. 진효섭은 익숙해진 국가안보국의 풍경을 뒤로하며 로비를 걸어 나갔다. 미련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앞으로 향할 곳에 대한 기대만이 가득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테디는 언제나 그랬듯 먼저 문을 열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더 나아가지 않고 우뚝 섰다.
“여기까지만 배웅할게. 어차피 이게 마지막도 아니니까 작별 인사는 안 한다?”
“응. 당연하지.”
“조심히 가. 또 보자.”
밝은 인사에 진효섭이 부드럽게 웃었다. 새삼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 감사함이 올라왔다. 진효섭은 테디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했다.
「고마워.」
순수한 우애, 그리고 감사를 담은 인사였다. 그 마음을 느꼈는지 테디 역시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별말씀을. 나야말로 매번 우리 가족을 챙겨 줘서 고마워.」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의 어깨에 이마가 닿았다. 새삼 그의 키가 훨씬 커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발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언제 이렇게 큰 걸까. 통통해 보이던 몸도 어느새 듬직해져 있었다. 역시 에스퍼들은 발현 전과 후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너 되게 듬직해졌네.」
「아, 역시? 에스퍼가 되니까 달라지긴 하더라고.」
장난스러운 웃음이 귓가에서 흩어졌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끝내고 몸을 떼어 내려던 때였다. 코끝에 먹먹한 향이 스치더니 눈앞에 있던 테디가 목 졸린 듯한 신음과 함께 저 멀리 떨어졌다.
“캑.”
눈앞에는 어느새 뚱한 표정의 안단테가 있었다.
“누가 보면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형? 언제 여기에…….”
“계속.”
언제부터 있었기에 계속이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안단테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테디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흠, 흠, 나는 가 볼게.”
테디는 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을 문질렀다. 1층으로 내려오며 취하던 행동이었다. 뭔가 알 듯 말 듯 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여전히 뚱한 표정의 안단테가 건물 밖으로 잡아끌며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할 말은 많은데,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이건…….”
아까까지 질리도록 본 서류였다. 진효섭은 그가 건넨 서류를 받아 읽자마자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이 웃었는데, 언제 또 봤는지 안단테가 뾰족하게 말했다.
“왜 웃어. 빨리 사인해. 재킷 주머니에 만년필 있지?”
“생각을 시간을 주셔야죠.”
“시간이 왜 필요해? 걱정 마. 너한테 나쁘지 않은 계약이니까.”
“하지만 제 눈에는 사기 계약 같아 보입니다.”
“사기 계약이라니? 어딜 봐서?”
진효섭은 몇몇 문항을 가리켰다.
[진효섭은 안단테가 죽기 전까지 옆을 지킨다.]
“그리고 여기도요.”
[진효섭은 안단테 외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딩하지 않는다.]
[진효섭은 안단테 외 다른 생명체와 10분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
[진효섭은 안단테와 함께 생활한다.]
하나같이 번듯한 문항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 놨다. 거기다 워낙 작게 적혀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두 달 내내 서류만 살핀 터라 진효섭은 걷는 와중에 본 것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쏙쏙 짚어 냈다.
수작질을 들켰음에도 안단테는 뻔뻔함을 고수했다. 앞장이 이 모양인 걸 보면 뒷장이나 끝부분은 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줄지어 있을 게 뻔한데 말이다.
“너한테 좋은 계약서라니까.”
“종신 계약이 어떻게 좋은 계약입니까?”
“여기 봐.”
어느새 도달한 차 앞. 멈춰 선 안단테는 맨 끝장, 가장 크고 짙은 글씨를 가리켰다.
[그 대신 안단테는 길드장으로서의 모든 재력과 사회적 위치, 개인으로서의 생명까지도 진효섭에게 바친다.]
딱딱한 글자 나열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진심이 느껴졌다. 진효섭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불리한 계약이지 않습니까.”
“뭐가 불리해. 내 모든 걸 준다는 건데.”
“대신 제 모든 것도 가지겠다는 것 아닙니까?”
“서로 맞바꾸는 거지.”
“하지만 제가 지켜야 할 게 많으니 역시 불리한 계약입니다.”
안단테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럼 뭘 더 추가해도 좋아.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다 적어. 난 이미 사인해 뒀으니까 뭐든 상관없어.”
“뭐든 말입니까?”
“그래. 뭐든지.”
달콤히 속삭인 안단테가 그새를 못 참고 진효섭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진효섭은 테디와의 포옹으로는 느낄 수 없던 많은 감정이 몰아닥쳐서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숨 쉬었다. 몸도 섞은 마당에 고작 이 정도의 접촉으로 긴장하는 게 이상했지만,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더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뭘 원하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테니까요.”
“…….”
안단테의 찌푸려진 미간에 웃음이 나왔다. 그가 기분을 솔직히 드러낼 때마다 심장이 뛰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애를 태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심술이 부리고 싶어졌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그에 확신을 얻을 때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중독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진효섭은 불퉁한 안단테를 살폈다. 쨍쨍한 햇볕 밑에서 보니 눈동자가 밝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건지, 원래의 색인 건지 구별이 어려웠다. 화려한 조각상을 눈앞에 둔 것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진효섭이 충동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계약서에 추가하고 싶은 게 생각났습니다.”
“말해.”
“지금 당장 키스하기요.”
순간, 안단테의 눈 안에서 짙은 금색이 일렁였다. 금색 펄이 반짝이는 듯 신비로운 변화에 진효섭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윽고 눈동자 절반가량을 금빛으로 물들인 안단테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역시, 날 다루는 법을 익힌 게 분명해.”
“싫습니까?”
“아니. 좋아서 문제야. 내가 너무 한심해지고 있거든.”
안단테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진효섭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잔뜩 가라앉아 투덜대는 목소리와 달리 입술은 뜨거우리만큼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부드럽게 닿아 오는 말랑한 입술에 계약 없이 그와 맺어져 있다는 충족감이 차올라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역시 계약은 미뤄야겠다.’
안단테가 들었다면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생각을 하며 진효섭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목에 손을 휘어 감았다. 하늘은 높았고, 햇볕은 따스했으며, 바람은 기분이 좋았다. 행복한 앞날만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