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200화
사실 안단테는 이제껏 질투심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놈을 최대한 시선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지 않아야 했던 걸까. 짜증이 솟아올랐다. 이럴 때마다 진효섭 주위에 있는 놈을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솟아났다. 물론 애써 삼켜야만 하지만.
충동을 이렇게까지 감내하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든 늘 하고 싶은 대로 했건만. 제 연인과 얽히면 어느 하나 뜻대로 흘러가는 게 없었다.
안단테는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숨긴 채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하찮은 질투인 걸 안다. 이 감정을 드러내면 진효섭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것 또한 잘 안다. 그러니 표정을 관리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한걸음에 사설 공원으로 달려간 안단테는 한 건물을 빤히 올려다봤다.
“……학교?”
혹시 다른 마땅한 장소가 있나 싶어 주위를 훑어봤지만, 사설 공원 옆에는 학교뿐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아파트 단지가 있긴 했지만 감이 그곳은 아니라 말했다.
미간을 좁힌 안단테가 기감을 끌어 올렸다. 밝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이내 바로 옆에서 떠는 것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진. 괜찮겠어?”
“응. 괜찮아.”
“그래. 그럼 약혼식을 진행하자.”
그중 귀에 꽂힌 목소리. 매일같이 듣고 싶은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그래, 저 에스퍼 놈 옆에만 있으면 항상 그랬다. 두 사람만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가끔 영어로 대화하는 것도 사실 거슬렸다. 같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애써 눈을 돌리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속속들이 떠오르자 잊혔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혼식을 진행합니다.”
“……홀거의 이름을 걸고, 영원히 진효섭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안단테는 곧장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 들어갔다. 학교에서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우선 저 말도 안 되는 짓을 말려야 했다.
‘세컨드? 개소리 마.’
절대로 안 된다. 통째로 품에 안아도 부족한데, 다른 놈이랑 어떻게 나눠 가진단 말인가.
벌컥! 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간 안단테가 제일 먼저 진효섭을 찾았다. 주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멋들어지게 정장을 차려입은 진효섭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형?”
당황한 채 꽃다발을 손에 든 모습이 근사했다. 약혼식이라고 저렇게 차려입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진효섭. 너, 지금-”
안단테가 입술을 심술궂게 들썩이며 발을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엄청난 환호성이 그를 반겼다.
“와아아아!”
“와아! 안단테 에스퍼다!”
“안단테 에스퍼!”
덜 자란 아이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안단테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안단테는 주위를 둘러봤다. 학교. 교실. 어린 티를 벗지 못한 학생들. 반짝이는 시선. 꽃다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테디. 그리고…… 그와 무척이나 닮은 금발의 여자아이.
“……아이?”
안단테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귀가 밝은지 아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고 아이라는 거예요? 엄연한 레이디한테.”
당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안단테는 아이의 명찰을 훑었다.
[티나 홀거]
약혼식 시작 전에 말했던 홀거가 어느 쪽인지 인지됐다. 몇 초 만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파악한 안단테가 이내 칠판을 바라봤다.
[-한국에는 없는 약혼식 문화를 알아보자-]
심지어 위에는 아주 작게, 학부모 참관수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깨달음과 함께 머리가 지끈거렸다.
‘플랫, 이 새끼가.’
낄낄거리는 그의 웃음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안단테 에스퍼……?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상황을 수습하려는 건지 진효섭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주위를 흘끔거리는 모습이 조금 불안해 보였다. 안단테는 뒤늦게 자신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쳐들어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싶진 않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작게 속삭이자 진효섭의 귀 끝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스러운 것과 별개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반응에 바닥을 쳤던 기분이 놀랄 만큼 좋아졌다. 평정을 찾은 안단테는 오히려 뻔뻔함을 장착했다.
“나도 너랑 같이 수업을 구경할까 싶은데.”
“예, 예? 하지만 특별 학부모 참관일인데…….”
“네가 왔으면 나도 와야지. 네 옆자리는 나니까.”
“자, 잠깐만요. 지금 그게 무슨…….”
진효섭의 옆자리는 안단테. 입에 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이었다. 불안해하는 연인을 배려해 뒷말만큼은 속삭거려 주었으나 진효섭은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다. 그에 안단테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상한 소문 같은 거 안 나게 할 테니까 걱정 마. 뭐, 난다고 해도 일반인들 말을 누가 믿겠냐마는.”
어차피 뜬소문이 될 것이다. 아니면 여기 있는 이들의 입단속을 하면 되고. 자신 있는 안단테와 달리 진효섭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괜찮대도. 내가 입단속 제대로 시킬게.”
결국 진효섭은 작게 한숨을 쉬며 긴장한 어깨를 풀었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보고 싶다는 말에 결심이 흔들렸던 건지는 모른다. 다만 마냥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봐요.”
그때, 티나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티나는 정수리가 둘 가슴께에 간당간당할 정도의 키였는데, 치켜든 턱만큼은 드높았다.
“지금 우리 약혼식 하니까 방해하지 마요. 그리고 진이 왜 그쪽 거예요? 웃겨, 진짜.”
흘끔 밑을 본 안단테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소꿉장난으로 약혼식은 무슨.”
“뭐라고요? 이봐요, 아저씨. 전 애인이면 얌전히 물러나요.”
“전 애인?”
“나도 들어서 알 거 다 알아요. 아저씨가 그렇게 따라다녔다면서요? 진이 멋있는 건 알지만, 그렇게 질척거리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뭐?”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안단테의 눈썹이 뒤틀렸다.
“흥. 겉보기는 멋, 아니,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런데요? 임자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지 말고. 다른 가이드나 찾아보란 말이에요. 진은 나랑 결혼할 거니까.”
어린애가 쫑알거리는 말 따위,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무시하면. 하지만.
“효섭이가 왜 너랑 결혼해?”
“결혼 약속했으니까요. 지금도 약혼식을 하고 있었는데, 안 보여요? 시력이 안 좋은가 보죠? 난 눈 좋은데. 양쪽 다 1.5거든요.”
티나가 이겼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안단테는 코웃음을 쳤다.
“난 10.0이야.”
“그딴 게 어디 있어요? 뻔뻔하게 거짓말하긴…….”
안단테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티나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씨름에 뒤로 밀려난 진효섭의 표정이 점차 당혹스러워졌다.
“티나. 잠깐만-”
“가만히 있어, 진. 이건 확실히 해야 해. 테디가 굴러온 돌은 부숴 버려야 한댔거든.”
“……어?”
“아, 박힌 돌을 부숴야 한댔나? 나도 잘 몰라. 아무튼 연적에게 틈을 주면 뺏긴다는 뜻이랬어. 그래서 난 그 틈을 주지 않을 예정이야.”
티나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턱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아저씨. 진은 내 거야.”
“……하. 이제 이런 어린애까지. 조끄만 게 눈은 달려 있다 이거지.”
“어린애 아니라니까요!”
“애 맞잖아. 가이드랑 일반인이 결혼하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는 어린애.”
“형, 잠깐만요. 왜 자꾸-”
“결혼을 못 한다니 뭔 소리예요?”
당혹스러운 빛을 띤 티나의 표정에 진효섭이 덩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계속 말을 받아 주는 안단테나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안단테 본인도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S급 가이드는 일반인이랑 결혼할 수 없어. 특히 SS급인 진효섭이라면 더.”
“……왜, 왜요?”
“그게 법이니까. 외국은 몰라도 한국은 그래. 그리고 효섭이는 네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부작용도 가지고 있거든.”
“형!”
엄한 얘기가 나올세라 진효섭이 그를 막아서려고 들었지만, 안단테는 끝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유치한 짓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너랑 결혼할 리 없어. 진의 결혼 상대는 나뿐이니까.”
굳이 진효섭이 아닌, 티나가 부르는 진이라는 호칭으로 바꿔 말했다. 좀 더 와닿을 수 있도록. 충격받았는지 티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윽고 물기가 어렸다.
“아, 아니거든요. 나랑 결혼한다고 약속했거든요?”
“못한다니까.”
“이……!”
분이 차오르는데 반박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티나가 숨을 가쁘게 쉬었다.
“그만하십시오.”
보다 못한 진효섭이 안단테와 티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곤 살짝 허리를 숙여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티나가 한발 빨랐다. 덥석, 옷자락을 잡아챈 티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진. 나랑…… 결혼하는 거 맞지? 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순간 말문이 막힌 진효섭이 입술을 달싹이자 티나가 재차 물었다.
“응? 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아니지?”
“……응. 아니야.”
아직 중학생 정도에 불과한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까. 애초에 나이 차만 10살을 넘는다. 풋풋한 호감 정도일 거라 생각한 효섭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자 티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글썽였던 눈물은 거짓말처럼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