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99화
함께 있는 기간이 길었던 만큼이나 유진은 신해창을 잘 알고 있었다. 순위를 향한 그의 욕망이 쉽게 포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신해창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물론, 지금으로선 말이지.”
“……지금?”
“그래. 지금.”
신해창의 얼굴에는 패배했다는 우울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들뜬 것도 같았다. 이번 일로 안단테를 넘어설 다른 방법을 발견한 것처럼. ‘지금’이라는 단어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해창은 나중에 그를 넘어설 거라는 생각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 의미를 눈치채고 사정없이 미간을 구겼다.
“하. 네가 사람다운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됐다는 착각을 할 뻔했네.”
그러곤 진심이 담긴 살벌한 저주를 퍼부었다.
“넌 역시 재수 없는 놈이야. 언젠가 네가 절망하고 바닥을 기어 봤으면 좋겠다, 신해창 이 개자식아.”
“고맙군.”
신해창은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진효섭에게 말했다.
“진효섭 가이드.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남은 대화가 있다면 더 얘기하고 나오십시오.”
“예? 아, 예에.”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신해창이 밖을 향했고, 유진은 이를 벅벅 갈다 못해 날카로운 시선을 진효섭에게로 돌렸다.
“야, 넌 왜 하필 저런 계산적인 놈에게 붙은 거야?”
“그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안단테 에스퍼와의 관계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자 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두려울 만하지. 나도 안단테의 집착을 직접 봤었으니까 이해는 가. 그놈 손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그늘로 들어가고 싶었을 거야.”
모두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유진이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대체 왜 하필 그 상대가 신해창이야? 저놈도 어차피 널 구워삶으려고 질 나쁜 계략이나 세우는 놈이잖아. 안단테 다음으로 위험한 새끼! 그것도 안 보여?”
눈을 데구루루 굴린 진효섭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가장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절 도와줄 수 있다고 확신하시기도 했고…….”
“하지만……!”
반박하려던 유진이 무언가를 떠올린 건지 미간을 찌푸렸다. 격앙된 그의 기분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하. 그래. 그건 그렇네. 그때 안단테와 척지려는 미친놈이 신해창 하나뿐이었을 테니까.”
“예.”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안단테의 그 집착을 받아 내야 한다니. 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데.”
“그때요?”
“어. 네가 완전히 몸을 숨겼을 때 말이야.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지, 안단테 눈빛이 진짜 미친놈 같았거든.”
유진은 제 눈꼬리를 손끝으로 치켜올렸다.
“눈동자를 금색으로 번쩍거리면서, 네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손안에 쥐고 있어야 했다고 중얼거리는데……. 어후, 듣는 내가 소름이 끼쳤지 뭐야.”
안단테가 보였던 집착을 전해 듣자 이상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새삼 두려움이 샘솟는 걸까. 하지만 전과 같은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습니까…….”
“어. 그랬어. 진짜 미친놈처럼.”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몸이 떨린다니까? 하며 부르르 몸서리친 유진이 양손을 교차해 제 팔을 쓸어내렸다.
“근데 그랬던 놈이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는데도 잠잠하다니. 어이가 없다니까. 분명 널 강제로 손에 넣는 방법은 수없이 많았을 텐데.”
사실 진효섭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다. 안단테가 강제로 손에 쥐려고 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타인이 확신하며 말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진효섭은 모른 체 되묻고 말았다.
“많습니까?”
“당연하지. 지금 신해창이 SS급인 널 얻었는데도 1위를 꿰차지 못한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아? 안단테에게 신해창을 무너뜨리고 널 손에 넣을 방법은 분명 있어. 그때도, 지금도, 안 하는 것뿐이지.”
“안 하는 것뿐…….”
“그래. 에스퍼가 으레 느낀다는, 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보이는 이기적인 집착이 아니었다는 뜻이야.”
유진의 말은 안단테의 속내를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와도 같았다. 두근거림을 동반한 이상한 감각. 진효섭은 이것이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임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설사, 그가 보이는 행동이 집착과 겹친다고 해도 안단테에게 첫 번째는 진효섭이라는 걸 이젠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흠흠.”
술렁이는 가슴을 도닥이느라 잠시 침묵하자 유진이 작게 목을 가다듬으며 진효섭을 살폈다. 눈빛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뭐냐…… 그, 저번에는 미안했어. 왜, 내가 너한테 안단테가 가벼운 놈이니 뭐니 했었잖아. 보니까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더라고.”
유진은 뒷머리를 긁적이곤 민망해하며 말을 이었다.
“서연이한테도 직접 들었는데, 가이딩 증폭기 때문에 길드에 들어갔던 거래. 게다가 안단테는 애인이 있다면서 깊은 가이딩도 필요 없다고 밀어내기까지 했다더라고. 다른 가이드도 마찬가지야. 깊은 관계까지 갈 틈도 없었던 것 같아.”
“아……. 예. 들었습니다.”
“어? 들었어? ……뭐야, 너.”
눈을 가늘게 뜨고서 진효섭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던 유진이 이내 씩 웃었다.
“아하. 안단테가 아르헨티나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국적을 되돌린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진효섭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손뼉까지 치며 안도했다.
“그래그래, 다행이다. 나는 나 때문에 너희가 찢어졌나 해서 솔직히 찝찝했거든.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놈이 워낙 개새…… 아니, 아니다. 어쨌든 이건 내가 실수한 거야.”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고. 아무튼 얼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앞으로는 관계에서 을을 자처하지 말고, 네가 이끌고 나가고 그래. 에스퍼 놈들은 풀어 주면 한없이 기어오른다니까.”
진효섭은 그저 웃고 말았고, 유진은 뿌듯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유쾌해. 신해창은 똥줄 빠지겠네. 핫핫.”
그의 기쁨이 조금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지만, 진효섭은 마주 보고서 함께 웃었다. 웃음을 띤 얼굴이 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 * *
“으아아아, 심심해 죽겠네.”
늘어져 있던 플랫이 몸을 데구루루 굴렸다. 늘어진 몸에 지루함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단장, 우리 던전 좀 다니면 안 돼요? 진짜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아요. 차라리 2년 전이 좋았다 싶은 정도라고요.”
“너 혼자 가든가.”
시큰둥하게 휴대폰만 바라보는 안단테에 플랫이 얼굴을 구겼다.
“아니, 단장이 뭘 좀 물어 와야 갈 거 아니냐고요! 그렇게 다른 쪽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일개 길드원이 어떻게 가요.”
“내 이름 팔든가.”
플랫이 늘어져 있던 몸을 번쩍 세웠다.
“진짜죠?”
“근데 나한테 일을 가져오지는 마. 그랬다가는 죽일 거야.”
“예? 아니, 성격파탄자도 아니고 고작 그걸로…….”
“효섭이가 위험한 거 싫다고 했거든.”
안단테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던전에 들어가면 다칠까 봐 걱정된다나 뭐라나. 앞으로는 던전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야. 자기한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지.”
언뜻 듣기에도 뿌듯함이 가득한 어조였다. 그에 플랫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드러난 손등에는 닭살이 돋아나 있었다.
“와, 진짜, 미친…….”
말을 잇지 못하던 플랫이 썩은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야 원, 진효섭이 진짜 약혼이라도 하면 단장 돌아 버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그게?”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던 안단테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플랫은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소식 못 들었어요? 쌍둥이가 오늘 아침부터 말했는데. 진효섭이 정장 차림으로 꽃다발까지 들고 집을 나섰대요. 옆에 있는 놈이랑 얘기하는 거 보니까 약혼한다고 하던데.”
안단테의 눈이 커졌다. 휴대폰을 쥔 손등에는 어느새 핏줄이 섰다.
“약혼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글쎄요? 나도 모르죠. 근데 전부터 약속했던 거래요. 아무래도 바뇨스에 있을 때 사랑을 싹틔운 거 아닐까요?”
“…….”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정도 능력이면 세컨드 에스퍼 정도는 데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 아니다. 어쩌면 세컨드가 이쪽일지도 모르겠네. 그쪽이랑은 약혼까지 한다니까.”
플랫이 눈앞의 세컨드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악동 같은 미소에는 장난기가 잔뜩 어려 있었는데, 안단테는 드물게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디야.”
“진효섭 집 근처 사설 공원 바로 옆이요. 근데-”
짧은 물음이었지만 플랫은 주어를 단숨에 알아듣고 냉큼 장소를 얘기했다. 그리고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 안단테가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설 공원 옆이 어딘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약혼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동시에 머릿속에 한 에스퍼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테디 홀거.’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놈이었지만, 다시금 떠올려 보니 그리 어리지만은 않은 것도 같았다. 미성년자라고 해도 결국 그놈도 에스퍼이지 않나. 충분히 진효섭을 탐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