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98화
“안단테의 행보를 보면 모르기가 더 어려울 겁니다.”
그의 말대로, 안단테는 아르헨티나로 국적을 옮기겠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정을 번복했다. 물론 그것만이 확신을 불러일으키진 않았겠지만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신해창이 이런 결과를 추측하는 건 쉬웠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진효섭은 딱히 무어라 해 줄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신해창이 또 자신을 흔들 말을 한다면,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졌을 뿐이다.
그러나 신해창은 현재의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계약 기간을 더 늘리기 위해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았고, 이간질을 더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것으로 끝을 맺을 생각 같았다. 그에게 있어 진효섭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일 텐데도 말이다.
“진효섭 가이드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앞만 바라보고 걷던 신해창이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어째서 여기 남아 계시기로 한 겁니까?”
“계약이 아직 5개월가량 남았기 때문입니다.”
“계약을 파기하는 건 안단테에게 간단한 일입니다.”
“저는 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를 바라보듯 신해창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입니까? 제게 좋은 마음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닐 텐데요.”
아무리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고는 하나, 멀리하는 걸 신해창이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딱히 이유랄 건 없습니다. 본래 저희의 계약은 신해창 에스퍼가 절 도와주는 대신, 제가 1년간 국가안보국에서 일을 도와드리는 거였습니다. 전 그 계약을 이행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진효섭은 시선을 내리깔며 덤덤하게 이어 말했다.
“절 도와주신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해창 에스퍼.”
신해창은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의아해 고개를 들자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가 놀라워하고 있었다.
“……제게, 감사하다고요.”
“예. 그때 신해창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저는 분명 더 괴로웠을 테니까요.”
그 당시 진효섭은 오해가 중첩된 상태였고, 과거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준비도 없이 안단테에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되지 않았다. 정말 스스로 던전에 몸을 던졌을 수도 있고, 모든 걸 놓은 채 안단테를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가정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진효섭은 이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감사해야 할 일은 실망스러운 행동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신해창 에스퍼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고마움까지 없던 일로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단호하고 확실하게 대답하던 신해창이 처음으로 주춤거렸다. 물론, 그 변화가 길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효섭 가이드.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짧은 사과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진효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필요도 없었다.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기 위한 첫발을 내딛자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내 두 사람은 또 다른 홀에 들어섰다. 신해창이 발을 내디디자 연회장처럼 풀려 있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편히 앉았던 이들이 하나같이 자세를 바로 했다. 신해창은 그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중앙으로 다가갔다.
진효섭은 익숙하게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브리핑을 기다리려던 차, 맞은편에 자리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유진 가이드?’
놀란 진효섭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그를 바라봤다. 유진은 뚱한 표정으로 진효섭과 신해창을 번갈아 보더니 홱, 소리가 날 만큼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럽계 동맹 관련해서 얘기를 나눈다고 했지.’
듣기로는 유진이 프랑스 쪽 유명 길드의 가이드가 됐다고 했다. 국가안보국과 연관이 없는 길드인지라 만난 적 없었는데 새삼스레 마주하니 미안함이 샘솟았다.
안절부절못하던 것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숨기기 어려워 진효섭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껏 유진에게 계속 미안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의 자리를 꿰찬 모양이었으니까. 해서 언젠가 만나 사과를 건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하루하루가 바쁘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이야. 입안이 썼다. 이런저런 브리핑을 이어 가는 신해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의 연설과 토론 동안 진효섭은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를 지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절반가량의 길드가 자리를 뜨고, 유진도 떠난 뒤였다.
“진효섭 가이드, 오늘 일정은 이걸로 마무리입니다. 이만 가시죠.”
“예? 아, 그…… 예.”
진효섭은 어두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진효섭을 에스코트하며 문을 열어 주던 신해창이 나직하게 물었다.
“유진이 신경 쓰이십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티가 잔뜩 나던 행동이었던지라 진효섭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가이드에게는 죄송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국가안보국에 들어왔을 때 많이 챙겨 주셨는데……. 마치 제가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진효섭 가이드의 의지는 아니지 않았습니까. 제가 선택한 거지.”
“하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진효섭이 한숨과 같이 말을 끌었을 때였다. 옆에서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진짜 미안해야 할 놈은 덤덤하고, 미안해할 필요 없는 놈만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네? 웃겨, 진짜.”
“유진 가이드?”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유진이 성큼성큼 진효섭 앞으로 다가왔다. 당당한 태도, 치켜든 턱,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전과 조금도 달라짐이 없는 모습이었다. 모두 기억 속 그대로였다.
“오랜만인데 별로 오랜만처럼 느껴지진 않네. 너 너무 유명해서 여기까지 소문이 자자하거든. 솔직히 듣고 싶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새초롬하게 뜬 눈이 진효섭을 훑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진효섭은 시무룩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연락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는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
“아, 됐어. 됐으니까 사과하지 마.”
차갑게 손을 젓는 유진에 진효섭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진효섭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소 달랐다.
“짧게나마 봤지만 네가 어떤 성향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네가 계획하고 만든 상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아…….”
“그래서 딱히 너한테 나쁜 마음은 없어. 아까 보니까 네가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것 같길래, 그럴 필요 없다고. 그거 말해 주려고 기다린 거야.”
진효섭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진심이라면 마음의 짐은 확실히 덜어지리라. 그러나 분명 아까 자리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는 진효섭조차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분 나쁜 기색이 완연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며 눈을 도르르 굴리는 사이, 유진이 비웃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꼴 좋다, 신해창.”
그제야 그의 날카롭던 태도가 어디를 향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결국 1위는 가질 수 없는 열매에 불과했지? 등급 차가 네 앞을 가로막았던 거라면, 지금 효섭이를 데리고 있을 때 원하는 바를 이뤘어야 하는데 말이야.”
유진이 입꼬리를 뒤틀며 노골적으로 신해창을 비웃었다.
“하긴. 어디 1위를 얻지 못하는 데 등급 문제만 있었겠어? 결국 네 능력이 부족한 걸 탓해야지. 아아- 가이드 탓만 하는 못난 놈이네, 신해창.”
“…….”
“이제 어떡해? 보아하니, 효섭이랑 계약도 1년이라며? 효섭이 성격상 안단테랑 마주치는 길드에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실컷 높아진 네 눈으로 가이드를 영입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아하하, 완전히 실패해 버렸잖아?”
신해창은 말없이 유진을 쳐다봤다. 특별히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군.”
“……뭐야? 지, 지금 수긍한 거야?”
“그래. 모두 다 네 말대로다. 나는 실패했어.”
진효섭을 통해서 안단테를 흔들고 1위를 차지하려던 계략을 세웠다. 그걸 위해 능력 있는 S급 유진을 내쳤고, 노력했지만 결국 불가능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거듭해도 2위에 그칠 뿐. 진효섭이 SS급 가이드가 된 이후도 마찬가지다. 금방 달라질 거라는 기대감과 달리 1위와 2위의 간극은 여전했다.
신해창이 죽어라 달려서 따라잡았나 싶으면, 어느 순간 안단테는 다시 훌쩍 앞서 있었다. 이번 변형 게이트 때 활약이 너무나도 뛰어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그저 상황이 안 따라 줬다는 말로 아쉽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이건 온전히 안단테의 힘을 과소평가한 신해창의 잘못이므로.
이쯤 되니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단테를 넘어서는 건 무리였다. 여기까지가 최선이었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유진은 당황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