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97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거든.”
기실 진효섭은 이제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길게 돌아온 만큼 그를 향한 믿음이 굳건해졌기 때문이다. 한 번 자리 잡은 믿음은 그 어떤 이간질에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신해창을 향한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울 테고.
“그럼 안단테 에스퍼가 마음을 달리 먹으면 어쩌게? 6개월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잖아. 다른 가이드에게 눈을 돌린다거나.”
“다른 가이드?”
“그래. 다른…… 아. 그럴 리가 없나? SS급인 너를 두고 다른 가이드가 눈에 찰 리는 없을 테니까.”
짧은 새 여러 가지를 떠올려 본 건지 표정이 휙휙 바뀌던 테디는 이내 안도했다.
“생각해 보니 쓸데없는 고민이었네. 눈을 돌릴 거였으면 이미 돌렸겠지. 맞아.”
“응.”
사실 SS급이 아니었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불안해하던 게 거짓말처럼 마음이 느긋해졌다. 진효섭은 그런 변화가 생각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또 마음에 들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테디.”
“에이. 당연한 거지. 넌 내게 피 안 섞인 형제나 마찬가지인걸.”
테디는 장난스레 웃으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얘기하고 나니까 걱정이 좀 가셨다. 얼른 들어가 쉬어.”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테디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진효섭 역시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폰을 꺼내 들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서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익숙한 숫자 나열에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제 위치를 상기시키듯 거세게 움직였다. 네 글자뿐인 이 한 통의 문자가 진효섭과 안단테의 사이가 원위치로 돌아갔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왠지 모를 감격에 진효섭은 답장을 보낼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이내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어떡하지.]
진효섭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머릿속에 뚱한 표정의 안단테가 떠올랐다. 어쩐지 조금 귀여운 것도 같았다. 본래 이런 이미지였던가.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 않은데.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했다.
[보면 됩니다.]
[다른 길드의 가이드에게 함부로 다가가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잖아.]
“어차피 규율은 잘 지키지도 않으면서…….”
진효섭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다시금 답장했다.
[그건 가이드에게 허락받아도 안 되는 겁니까?]
규율상으론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혹시 몰라 묻자 잠깐의 시간을 두고 문자가 왔다.
[아니.]
[그럼 시간이 날 때 가끔 만나면 됩니다. 아무래도 여러 눈치가 보이겠지만 조심하면 될 겁니다.]
[난 맨날 보고 싶은데.]
[6개월 뒤에 맨날 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
[전 아무 일도 없을 텐데, 형은 그렇지 않습니까?]
안단테의 답장이 또 잠깐 주춤했다.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진효섭은 그가 답장을 보내기 전, 확실하게 쐐기를 박았다.
[저는 형이 기다려 줄 거라 믿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관계 정의를 미루겠다고 말한 건, 믿음이 바탕이 됐기에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떠보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었다.
잠시 후, 안단테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어쩐지, 네가 날 다루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은데.]
이번엔 소리 내 웃어 버렸다. 그가 일상에 들어오니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혼자가 될 때마다 가슴 한편이 빈 것 같던 느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진효섭은 휴대폰을 심장에 가까이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이 두근거림이 안단테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상과도 같았던 외로움이 오늘 밤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변형 게이트가 사라진 이후, 일반 게이트의 출몰 횟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양상이다. 사람들의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삶이 보다 평화로워졌다. 에스퍼나 가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없어 느긋해지니 모임에 드나들며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진효섭은 오히려 바빠졌다. 모임이 많아지니 러브콜이 전보다 더 많아진 탓이다. 신해창이 나름 쳐 낸다고 쳐 냈지만, 초대장이 워낙 많아 마냥 무시하기도 쉽지만은 않은 듯 미안한 기색으로 모임 일정을 전달하곤 했다.
그 결과, 진효섭의 일정은 온통 모임과 인터뷰, 촬영으로 가득 찼다. 이후로 고작 일주일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이게 과연 가이드의 일정인지 연예인의 일정인지 헷갈릴 지경이 됐다.
그럼에도 다행인 점은 이러한 일정 때문에 실질적인 가이딩 일에서 제외됐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신해창과 이런저런 모임을 다니는데, 다른 에스퍼의 가이딩까지 담당했다면 안단테는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터졌으리라.
안단테와는 만나지 못하는 대신 매일 밤 통화를 했는데, 그는 언제나 모임에서 진효섭과 말을 섞은 놈을 아르헨티나의 땅속에 묻어 버리고 싶다 했다. 다른 에스퍼와 접촉이 없는 지금도 이럴진대 가이딩이라도 했으면 그 말이 현실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보고 싶으면 일정 없는 날에 만나면 된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혹여나 안단테가 모임에 나와서 빤히 쳐다보는 등, 훼방을 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안단테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참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커다란 모임이 있었던 날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소문이 돌지 않을 소규모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효섭이 참석한 모임에 얼굴을 비추는 법이 없었다.
해서 이틀 전인가, 의아함을 느낀 진효섭이 언젠가 입을 연 적이 있다.
‘의외입니다. 전 형이 모임마다 참석하실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해 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해서 그럽니다. 형은 제가 국가안보국의 계약을 지키는 것도 싫어하셨고, 또 제가 틈날 때 만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틈조차 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만, 그렇다 해도 안단테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진효섭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긴. 그냥 네가 싫어할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잘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시답잖은 이유라는 듯 시큰둥한 대답이었지만, 진효섭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다시 마음이 이어지고 나서 종종 생각했지만, 안단테는 유독 진효섭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모든 초점이 진효섭의 감정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좋아하는 건 그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 하고, 싫어하는 건 조금도 하지 않는다. 간단한 말이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 같아.’
장난하는 것도, 능글맞은 것도. 안단테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일상이 오롯이 진효섭에게 맞춰진다는 게 달랐다. 심지어 그는 어떤 페널티든 상관없다는 듯 아르헨티나로 옮기려던 계획까지 취소했다.
그게 부담스럽기는커녕 좋기만 한다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걸까? 그를 앞두면 호불호의 잣대가 참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오늘따라 조금 피곤하네.’
진효섭은 오늘도 어김없이 참석하게 된 모임에 가볍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고작 이 주째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목뒤가 뻐근했다. 다른 가이드들에 비해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건만, 모임은 정신적인 문제라 그런지 체력을 훨씬 더 빠르게 깎는 듯했다.
그때,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나섰던 신해창이 진효섭에게 다가왔다.
“진효섭 가이드.”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예. 마지막으로 유럽계 국가 에스퍼 몇몇과 동맹 이야기를 나누면 끝입니다. 진효섭 가이드를 뵙고 싶다고 해서 동행할까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마주 서 고개를 끄덕이곤 홀을 걸어가는 두 사람은 무척이나 친근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이 북적한 공간을 지나 조금 먼 거리의 홀로 가는 길 내내 신해창과 진효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신해창의 이간질이 들통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둘은 항상 이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테디에게 듣자 하니, 내일 볼일이 있으시다고요.”
물론 일 얘기는 예외였지만. 진효섭은 어느새 내일로 다가온 티나의 학부모 참관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테디의 동생 학교에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전 일은 끝내고 가도 충분합니다.”
“아닙니다. 중요한 일이라니, 아침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날은 일을 보십시오.”
“예? 하지만…….”
“계속 바쁘지 않았습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잠깐의 휴가라 생각해 주십시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진효섭은 잠깐 생각을 잇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건 제 쪽입니다. 안단테와 관계를 회복했음에도 여기 남아 계시지 않습니까.”
진효섭은 걸음을 멈췄다.
“……알고 계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