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96화
“아니요.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약 기간을 다 채우고 나올 생각이니까요. 그게 절 도와준 국가안보국에 대한 도리 같습니다.”
“도리? 대체 그걸 왜 지킨다는 거야. 너 설마 몰라서 그래? 신해창이 널 도와줬던 건-”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고 있다. 신해창은 진효섭을 손에 넣기 위해서 이간질을 해 안단테와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들었으니까. 크고 작은 거짓말을 일삼았으니, 그런 상대에게 굳이 계약의 도리를 다할 필요 없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생각한 바가 있기에 진효섭은 담담하게 제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저버리고 싶진 않습니다. 그 당시에 신해창 에스퍼가 제게 도움을 주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어쨌든 도움을 받긴 했다. 그렇기에 진효섭은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고 싶었다. 잘못한 게 있다고 해서 고마웠던 순간까지도 모른 체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전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 국가안보국의 가이드로 있을 겁니다.”
안단테의 미간에 팬 주름이 더 깊어졌다. 잠깐 침묵을 잇던 안단테가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가안보국이나 신해창에게 아쉬움이 남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전 그저 어떤 빚도 남기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진효섭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쉬움 같은 게 아니었다. 사실 그 또한 처음 신해창의 이간질을 눈치챘을 때 계약을 파기할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나니 분노는 가라앉았고, 그렇게 되니 후회가 조금도 남지 않는 길을 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차피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신해창 에스퍼에게 책잡힐 일 없이 완벽하게 끝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제힘으로요.”
이 모든 것이 국가안보국과 완벽히 갈라서는 데 필요한 일이다. 그런 진효섭의 마음을 눈치챘으면서도 안단테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결론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듯했다.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데?”
“반년 정도…….”
“반년이라고?”
안단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흡사 반년이 아닌 반평생이라고 들은 기색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굳이 1년을 채우지 않는 방법도 있잖아. 도움받았던 걸 갚아야 하는 거라면, 내가 대신 갚아 줄게.”
“형.”
“신해창은 예전부터 길드 순위에 욕심이 있었어. 내가 그놈에게 1위를 쥐여 주면 널 도와준 값보다 더 확실한 대가가 될 거야. 안 그래?”
신해창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차가운 눈을 하면서도, 안단테는 그가 원하는 바를 이뤄 주겠다 말했다. 진효섭이 신해창의 곁에 있는 게 그 정도로 싫은 듯했다. 단 6개월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만큼 좋아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진효섭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제가 싫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고마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넘치는 걸 쥐여 주고 싶진 않습니다.”
“효섭아.”
“그냥 제가 해결하게 해 주십시오. 6년도 아니고, 단 6개월입니다. 그 이후로는 계속 형과 함께이지 않겠습니까.”
진효섭의 설득에도 안단테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6개월, 6개월……. 중얼거리느라 달싹이던 그의 입이 곧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뱉었다.
“너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는 거, 이해해. 그놈에게 더 좋은 걸 주고 싶지 않다는 것도 모두 이해한다고. 하지만 효섭아.”
안단테는 문가에 서 있는 진효섭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부드럽게 손을 이끌며 애처롭게 말했다.
“오랫동안 떨어졌다가 이제야 같이 있을 수 있게 됐잖아. 그런데 내 연인이 다른 에스퍼의 곁에 있겠다는데, 본디지 파트너로 다른 사람을 곁에 둔다는데, 어떻게 그걸 가만두고 볼 수가 있어?”
“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국가안보국에 계속 있는 이상, 진효섭의 본디지 파트너는 신해창이다. 그런데 안단테와 전처럼 관계를 되돌린다면, 분명 이상하게 보이리라. 실제로도 묘한 관계가 될 게 분명했다.
“설마 본디지 파트너 따로, 애인 따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진효섭의 심각한 표정에 이거다 싶었는지 안단테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이런저런 소문이 돌 게 분명하지. 너 그런 소문들에 휩싸이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이대로 계약 파기하고 내게로 와. 내가 다 해결할게. 네가 신경 쓰이지 않도록, 확실하게 할 테니까. 응?”
그새 또 품에 진효섭을 끌어안은 안단테가 입술을 머리카락 끝에 비볐다. 상대의 마음을 빼앗겠다는 듯 스모크 향이 은은하게 풍겼는데, 아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온기를 만끽하며 달콤함을 곱씹기를 한참. 진효섭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렇지? 내게 다 맡겨.”
“조금 미루는 게 좋겠습니다.”
잠깐 표정이 밝아졌던 안단테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뤄? 뭘?”
“애인 말입니다. 아직 사귀지 않는 걸로 해 주십시오.”
“……뭐?”
안단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진효섭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은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간 어떤 게 앞날에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그런 일은 결단코 사양이다.
“모든 걸 바로잡고 시작하려면 과거가 제대로 청산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국가안보국의 일이 다 끝나기 전까지는 관계 정의도 미루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잠깐, 효섭아.”
“아직 관계 정의도 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주위에 알려지기도 전이고요.”
얼이 빠진 안단테를 두고 진효섭은 시선을 내리깐 채 문을 열었다.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형, 아니, 안단테 에스퍼.”
테디와 진효섭이 그대로 길드를 나서는데도 안단테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진효섭은 이제 그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 * *
진효섭은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든 티나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넘겼다. 옆에서 서 있던 셀레나가 가볍게 하품하며 말했다.
“아쉽게 됐네. 티나가 기다린다고 기다렸는데, 잠을 이기지는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최대한 일찍 오려고 했는데…….”
“에이, 죄송하긴 뭘. 오히려 일하고 돌아오는 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하지.”
셀레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봉투를 진효섭에게 넘겼다.
“내일도 일찍 나가지? 혹시 몰라서 미리 전해 둘게. 초대장이야.”
“초대장이요?”
“응. 테디한테 못 들었어? 며칠 뒤 티나 학교에 학부모 참관일이 있는데, 널 초대하고 싶다고.”
“아, 예. 들었습니다.”
진효섭은 저번에 약혼식이니 뭐니 했던 테디의 말을 떠올렸다.
“그럼 보면 알 거야. 별건 없고, 티나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급식 퍼 주는 걸 도우면 돼. 아, 참석하게 된다면 하얀 백합 꽃다발을 가져와 달라고는 하더라.”
옆에서 늦은 간식을 먹고 있던 테디가 혀를 끌끌 차자 셀레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딸이지만 못산다니까. 어쨌든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네 일정이 우선이니까.”
진효섭은 잠깐 고민하다가 테디를 향해 물었다.
“일정은 어때?”
“아쉽게도 티나의 참관일에는 여유로워.”
“그래. 그럼 참여해야겠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효섭은 셀레나에게 참석 의사를 전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머, 그럴래? 후후. 티나가 되게 좋아하겠다.”
일을 우선으로 하라고 했지만, 내심 기쁜지 셀레나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만큼 티나가 간절히 바랐던 거겠지.
“내가 내일 티나에게 전해 둘 테니까 얼른 올라가 봐. 늦게까지 일해서 피곤하잖니. 그리고 테디. 너도 자기 전에 과자 그만 먹고 얼른 올라가. 얘는 이제 곧 성인인데 애처럼…….”
“성인이랑 과자가 무슨 상관이야.”
테디는 작게 투덜대며 먹던 과자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진.”
진효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셀레나에게 저녁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테디와 진효섭의 방은 같은 2층인데다가 바로 옆이었기에 문 앞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좋은 꿈 꿔, 테디.”
그렇게 진효섭이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테디가 그를 잡았다.
“저기, 진. 있잖아…….”
잠깐 고민하던 그가 뺨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한테 대충 설명 들어서 단장님이 길드에 묶어 두려고 거짓말을 했었다는 건 이해했거든? 그런데 정말 반년이나 더 국가안보국에 있어도 괜찮겠어?”
“그게 왜?”
“좀 그렇잖아. 단장님은 너랑 안단테 에스퍼 사이가 변했다는 걸 금방 눈치챌 거고, 그럼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어디까지 생각해 본 건지 테디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또 사이가 틀어지면 너만 괴로울 것 같아서.”
그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차렸으나 진효섭은 심각한 표정을 짓기는커녕 살짝 웃었다.
“괜찮아.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