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94화
“……안 갔습니다.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돌아오니까 없었잖아.”
마치 투정과도 같은 말에 당황한 건지 진효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단테는 진효섭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뻐해 달라는 듯 살살 비볐다. 품에 안았는데도 불안감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손안에서 빠져나갈 것 같았다. 환상처럼.
“난 네가…… 가 버린 줄 알았어.”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실지는 몰라서…….”
안단테는 진효섭의 목덜미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비벼지자 단 향이 물씬 풍겼다.
“그래. 있었으면 됐지. 응, 있으면 됐어.”
또 사라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다음에 진효섭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고 해도, 그의 생존 여부조차 모르는 상황에 놓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평생 진효섭만을 그리다가 가슴이 문드러질 텐데, 같은 세상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미안. 흥분해 버렸네.”
안단테는 작게 한숨을 쉬며 진효섭을 놓아주었다. 그에게서 손을 거두는 게 던전 파훼보다 힘들었다. 그런 안단테를 빤히 보던 진효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 이제 전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그때 도망쳤던 건 다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전에 그런 비슷한 과거가 있어서…….”
“그래. 알고 있어.”
진효섭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지난 1년간 널 찾으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어. 네가 집착을 혐오한다던 이유를 뒤늦게 이해하겠더라고.”
진효섭이 사라지고, 안단테는 엄청난 정보력으로 세세한 것까지 찾아냈다. 예를 들면, 진효섭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에도 미국에서 밤낮으로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는 정보까지 말이다.
그 돈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한국에 몰래 들어오기 위한 자금. 다르게는,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자금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S급 가이드가 가이딩이 아닌 막노동으로 돈을 모으다니. 그만큼이나 진효섭은 각인과 집착, 그리고 감금 같은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다는 뜻이다.
“내가 네 상처를 미리 알아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가 말하지 않았으니, 제 잘못입니다.”
“아니.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던 내 잘못이야.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니까. 널 소유하려고만 했다는 의미겠지.”
미리 알아봤더라면 이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안일하기 짝이 없던 안단테의 실수였다. 자신감이 충만한 것이 정도를 넘어 화를 불러일으켰다. 자조적인 중얼거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날 그 새끼에게 빗대도 할 말 없지. 미안해.”
“아닙니다. 그건 정말…… 제 착각이었습니다.”
안단테의 마음이 디트리와 같은 집착이 아님을 이미 확신하기에 진효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때 저는 아노 가이드가 형의 연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를 향한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제게는 집착을 보이는 거라고 오해를…… 해 버려서요.”
“아, 그거.”
기실 안단테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전에 모임에서 보인 진효섭의 반응으로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날, 진효섭은 함께 있던 가이드들에게 아노에 대한 정보를 듣자마자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흔들리는 시선과 움찔거리는 뺨은 누가 봐도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전에도 비슷한 추측을 했었지 않은가. 역시 빨리 얘기해 뒀어야 했는데. 그 탓에 불신이 더 커졌다는 사실을 알자 미리 말하지 않은 게 후회됐다.
“미안. 아는 줄 알았어. 뒤늦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안단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노가 연인인 줄 알았다는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용일 뿐이었다고 말했던 것도 아노가 연인이라고 생각해서였어?”
“아, 아뇨. 그건……. 저기, 형한테 직접 들은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전에도 듣긴 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직접 들었다니.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진효섭은 말을 고르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어떤 순간을 떠올린 건지 눈꼬리가 밑으로 처졌다.
“……사실, 그날 들었습니다. 형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밤이요. 저희의 첫…… 가이딩 말입니다.”
“첫 가이딩? 그날 밤이라면…… 아.”
안단테는 기억하지 못하는 밤. 정신을 잃고 진효섭을 탐하며 깊은 가이딩을 한 날이 딱 한 번 있었다. 안단테는 비속어가 새어 나올 뻔해 입을 틀어막았다.
‘이 머저리 새끼.’
당시, 안단테는 진효섭을 단순히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이용 가치가 높아서 옆에 두지만, 꽤 마음에 드는 정도의 상대 말이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그런 생각이 드러날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고 연인이 됐지만……. 사실 형이 절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절 봐 줄 거라고. 그러다 SS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난 후 형이 가이드들을 만나서 가이딩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효섭은 눈을 내리깐 채 미처 말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나둘 꺼내 들었다.
“연인을 구하고 나니, 이제 제가 필요 없어졌나 하고……. 게다가 노아피는 위치가 높아져만 가는데, 제 과거가 피해를 끼칠 것 같아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떠난 거야?”
“예.”
고개를 주억거리는 진효섭에 안단테는 좁혀 드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망할.”
“예?”
“아니, 너한테 말한 게 아니라……. 하. 내가 너무 멍청했구나 싶어서.”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그리고 왜 사랑한다고 했음에도 진효섭이 이용 가치에 의한 집착이라고밖에 느끼지 못했는지도. 이제 보니 그렇게 떠난 것도 이해가 갔다. 모두 평소의 안단테였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너무 들떴던 거지.’
기나긴 시간 준비했던 SS급 던전의 탈환. 아노를 향한 속죄. 진효섭의 달콤함. 그 모든 것에 들떠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게 시발점이었다. 안단테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그 상황을 바르게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 가이드를 만나고 다닌 건, 가이딩 증폭기 때문이었어. SS급 던전에서 발견한 물품인데 실험 중이었거든.”
“그렇습니까.”
이미 국가안보국에서 전해 들은 사실이기에 진효섭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추측이 확신이 되기까지 한 발짝만이 남았다 생각하니 자꾸만 긴장됐다. 땀이 배어난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은 진효섭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깊은 가이딩은 안 하신 겁니까?”
“……이거, 큰일이네.”
이제야 진효섭이 어떤 생각을 해 왔고, 하고 있는지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심 떠난 이유가 집착 하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확인하니 한숨이 나왔다.
안단테는 간과했다. 진효섭이 자신을 좋아하니 다 괜찮을 거라고. 게다가 자신 역시 다른 가이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거라고 말이다. 상대에게 믿음을 주지도 않고, 언제나 믿어 줄 거라 생각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효섭아.”
“……예.”
“나는 네가 다른 에스퍼의 가이딩을 맡는 게 싫어. 노아피 놈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지. 그래서 새로운 가이드를 들였어. 노아피의 다른 놈들은 새로운 가이드가 맡고, 넌 내게만 집중했으면 해서.”
안단테는 진심을 다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었지. 다른 놈들에게 접촉 이상은 하지 말라고. 근데 그거 생각해 보니까, 접촉도 싫더라. 네 힘이 다른 놈들에게 향하는 그 상황 자체가 싫어졌어. 노아피 길드원이든, 다른 길드원 에스퍼든.”
처음에는 정말 접촉까지 괜찮다고 생각했다. SS급 던전에서 나와 진효섭과 만났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달라진 건 SS급 던전에서 나온 노아피를 알뜰살뜰하게 돌보는 진효섭을 본 이후였다.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길드원들에게 가이딩해 주며 걱정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뭔가 울컥 솟았다. 그러다 실험에 필요해서 들인 가이드를 이용해 진효섭을 독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단코 서연에게 가이딩을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안단테의 손이 진효섭의 발긋한 코끝을 천천히 훔쳤다.
“네 가이딩은 나에게만 향했으면, 하고 바랐어. 그리고 나 역시 다른 놈들의 가이딩 따위 필요 없이 네게만 받고 싶기도 했고.”
“그럼 왜 실험을……. 제가 있으면 가이딩 증폭기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노가 그렇게 죽었으니까. 혹시라도 네 몸에 지장이 갈지도 모르잖아.”
진효섭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 주면 좋았잖습니까. 서연 가이드를 들였을 때도, 다른 가이드를 만날 때도, 가이딩 증폭기를 얻었다고. 그냥, 그렇게 말했다면…… 그럼 이렇게까지 꼬이지 않았을 겁니다.”
인정한다는 듯 안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 내 잘못이야. 그때는 널 붙잡아 두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너무 컸어.”
“붙잡아 두다니요?”
“가이딩 증폭기란 게 없다면 넌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이잖아.”
안단테에게 완벽한 가이딩은 진효섭만이 줄 수 있다. 그가 없으면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진효섭은 쉽게 안단테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매정하지 못하니까.
말뜻을 이해한 진효섭의 눈이 커졌다.
“아…….”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안단테가 마음을 다해 진효섭에게 사과했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숙인 적 없던 고개가 그의 앞에서는 쉬웠다. 사실 원한다면 무릎도 꿇을 수 있다. 이제껏 안단테가 상대에게 숙이지 않았던 건 드높은 자존심의 뻣뻣함이 아니라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