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93화
“……집착이 아니라고?”
“예.”
본인만 생각하는 더러운 집착이 아니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으로 남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부터 남았습니다. 그, 사랑으로…….”
사랑이니 뭐니, 입으로 뱉기 참 쑥스러운 이야기다. 하지만 직접 전해야 할 때가 있고, 진효섭은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도 집착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제 과거 탓에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자신은 과거에 사로잡혀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뒤틀린 집착을 보인 게 아니었는데. 그저 제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인데. 진효섭은 발갛게 변한 뺨을 쓸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이대로 아르헨티나로 가지 말라고 말하면 된다. 다시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그러곤 그의 품에 안겨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이후를 떠올리니 새삼 여러 감정이 뒤섞여 가슴을 빠듯하게 채웠다. 시큰하기까지 한 심장에 말문이 틀어막혔다. 아까까지는 멀게 느껴졌던 사이가 가까워진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안단테 역시 그것을 느낀 건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
“예상 시간보다 던전이 빨리 열릴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슬슬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시간은 벌써 다섯 시를 향하고 있었다. 열 시에 열리는 던전이었지만,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기에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고 싶었는데.’
확실하게 이야기를 마친 후 던전에서 나올 그를 마주하겠다는 계획이 뒤틀렸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던전이고, 마음은 전한 뒤니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형. 이 뒤에 할 이야기는 변형 게이트에 대한 문제가 다 끝나고 했으면 합니다.”
진효섭이 안단테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곤 맞닿은 손바닥으로 강하게 힘을 불어 넣었다. SS급임을 자랑하듯 엄청난 힘이 안단테에게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기다리겠습니다. 던전 앞에서.”
변형 게이트에 들어가야 하는 안단테와 밖에 남은 진효섭. 예전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진효섭의 선택은 달랐다. 그러니 그 뒤 또한 다를 것이다.
안단테는 마주 잡은 손에 제 이마를 툭, 가져다 댔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손등에 닿는 열기가 모든 것을 답해 주고 있었다. 듣지 않아도 벅찬 그의 감정이 전해졌다. 문득 안단테의 귓바퀴가 붉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광경에 진효섭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 *
안단테는 꿈을 꾸는 것 같다 생각했다.
원래라면 항상 그랬듯이 가벼운 가이딩을 끝내고 던전으로 향해야 했다. 돌을 부수고 모든 걸 해결하면 끝. 노아피는 아르헨티나로 향하고, 더는 진효섭과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자유롭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진효섭과 달리 안단테는 평생 그를 그리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은 상태였다. 철철 남은 미련을 어렵게 싸맸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안단테는 진효섭의 손을 잡고 있다. 실제로 손안에 진효섭의 손이 있었다. 혹시라도 허상일까 두려워 땀으로 미끈거리는 손을 몇 번이고 고쳐 잡았다.
“던전이 열릴 듯합니다.”
눈앞에서 게이트가 꿈틀거렸다. 열리기 직전이라는 의미였지만 도통 진효섭을 놓기 힘들었다. 혹시라도 지금 이 순간이 허상일까 봐. 손을 놓으면 그때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하아…….”
들어가야 하는데,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런 불안이 손끝을 타고 진효섭에게 전해진 걸까. 진효섭이 돌연 손에 힘을 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는 기다리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전과는 다를 거라고 했다. 진효섭이 믿음을 보인 것처럼, 안단테도 믿어야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저런 던전 따위 무시하고, 진효섭과 함께 있고 싶었다. 진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능력이 올랐다는 게 진실인지 직접 하나하나 알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변형 게이트의 뿌리를 뽑는 건 진효섭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모든 것을 정리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걸음 전진을 위해서라 생각하며 안단테가 결심을 마쳤다.
“갔다 올게.”
“예. 다녀오십시오. 아까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윽고 기기긱-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입을 열었다. 안단테는 미련을 갈무리하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게이트가 활짝 열렸고, 안단테가 곧바로 도약했다. 완전히 게이트를 지나기 전에 잠깐 뒤를 돌아보자 진효섭이 보였다. 그 뒤로 테디라 불리던 보호 계열 에스퍼가 진효섭을 보호하듯 서 있는 것도 시야에 들어왔으나 도통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기실 열 번째가 오기 전까지 테디는 제 역할 수행을 완벽히 해냈다. A급 보호 계열이기에 전투는 불가능했지만, 보호 능력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노아피 길드원 몇몇이 진효섭을 몰래 지키고 있을 텐데도 불안했다.
‘어쩌면 안전이 불안의 원인이 아닐 수도……. 뭐가 됐든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겠어.’
안단테는 던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전속력으로 뛰었다. 전에 진효섭을 밖에 두고 던전을 클리어할 때만큼이나 빨랐다. 돌을 찾는 것도 어느새 열 번째. 던전의 특성은 이미 파악했다. 위치는 뻔했고, S급 던전은 안단테에게 마실과 다를 바 없었다.
평소에는 10분 정도로 마무리하고 적당히 돌아갔을 테지만, 이번에는 무리할 생각이었다.
‘3분. 딱 그 안에 끝내는 거야.’
다른 에스퍼가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목표였다. 그러나 허황되진 않았다. 그만큼 안단테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잡다한 괴물들을 무시하고, 여기저기 널린 보물이나 물품들도 넘겼다. 그리고 도착한 마지막 보스의 방. 내부 불이 켜지기도 전, 안단테는 돌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벽을 부쉈다. 그러곤 곧장 돌을 부수고, 달려드는 괴물의 심장을 뽑아냈다. 걸린 시간은 단 2분. 기함할 만한 기록인데도, 안단테는 한없이 다급하기만 했다.
‘더 빨리. 더 빨리 가야 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진효섭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진효섭을 볼 수 있다는 행복 때문일까. 혹은 지금을 기점으로 달라질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이 모든 게 섞인 걸지도.
“효섭아.”
안단테는 던전 파훼 후 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진효섭의 이름부터 중얼거렸다. 심장이 너무 시끄러워 주위 기척을 침착하게 느낄 새가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아까 진효섭과 함께 있었던 곳으로 달려갔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기까지 딱 3분이 걸렸다.
“진효섭.”
그런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진효섭이 마시다 만 식어 빠진 커피 잔밖에 없었다. 안단테는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봤다. 방 안 어디에도 진효섭이 없었다. 분명 기다리겠다고 했던 그가 없다. 또, 사라졌다.
뭔가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미쳐 버려 보았던 환각이었던 걸까. 진효섭과 너무 함께하고 싶어서, 혼자 착각하고 상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3분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아득했다.
아까의 상황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주위 기척을 살피라고 머리가 명령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온몸에 마비라도 온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진짜였다. 환각일 리가 없는데, 왜 진효섭은 없는 건지. 혹시 사랑하냐는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잇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래, 처음부터 사랑한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신중하게 대답한답시고 바로 말하지 못해 그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냥 던전을 포기하는 게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진효섭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고, 던전부터 들어간 안단테를 믿지 못하는 걸지도.
어떤 시험이었던 걸까.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짜 맞추느라 안단테는 복잡한 머리를 끊임없이 굴렸다. 만약 이게 정말 환각이었다면. 내가 착각한 거라면.
안단테는 이대로 미쳐 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 진효섭의 시험에 만족스러운 대답이나 행동을 하지 못해서 기회를 잃은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피가 말랐다. 삐- 하는 날카로운 기계 소리가 뇌를 흔들었다.
몸에 남은 미약한 독성이 순식간에 몸을 지배하려고 울렁거릴 때였다.
“형?”
놀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던 고음의 주파수를 뚫고 들어왔다. 홱 고개를 돌리자 폭우처럼 내리꽂히던 날카로운 소리가 멎었다.
“어떻게……. 왜 여기 계십니까? 던전에 들어간 게 아니었습니까?”
안단테는 눈앞의 진효섭이 환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세수를 했는지 앞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형, 던전에 갔다가 나오신 것 맞습니까?”
무뚝뚝해 보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롯이 드러나는 표정, 매력적인 향. 모든 것이 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으나 잘 믿기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단정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친 손바닥이 안단테의 이마를 부드럽게 짚었다.
“형. 설마 안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효섭아.”
“예.”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자 현실감이 순식간에 몰아닥쳤다. 안단테가 진효섭을 와락- 끌어안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 마.”
흔들리는 목소리에 벗어나기 위해 꼼지락거리던 진효섭이 멈칫했다. 안단테는 벌벌 떨리는 손끝을 숨기고자 손을 꾹 말아 쥐곤 진효섭을 더 강하게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가지 마, 효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