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89화
더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 안단테는 그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효섭 가이드가 너 때문에 힘들다고 울었다.”
우뚝 멈춰 선 발걸음이 더 나아가지 못하자 신해창은 몸을 돌려 안단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말 사랑한다면, 힘들다는 사람을 두고 떠나 주는 게 예의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그의 곁을 맴돌고 있다. 불편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미밖에 되질 않는다는 거다.”
잠깐 침묵하던 안단테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손끝 하나 건드릴 생각 없었어. 다가갈 생각도 마찬가지고.”
“그걸 어떻게 믿지? 나도 믿을 수 없는데. 진효섭 가이드는 당연히 더 믿지 못할 거다. 그는 네가 한국에 같이 있다는 것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까.”
안단테가 손에 힘을 줘 말아 쥐었다.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신해창은 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을 거라고 확신했다.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마. 그를 위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멀리서 보기만 한다는데도 지랄이네.”
“그게 소름 끼치기 때문이다. 아, 하긴. 네 경우에는 사랑이 아닌 집착이었으니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 신경도 쓰이지 않겠지만.”
쾅! 말이 끝나자마자 안단테가 그대로 신해창의 멱살을 잡아채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집착, 집착, 지겨워 죽겠네. 그럼 사랑이 뭔데? 집착과 뭐가 그렇게 달라서 내 사랑이 집착이라고 구분 지어. 너는 슬픔과 좌절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어? 우울과 불안을 완벽하게 분단할 수 있냐고.”
사나운 표정으로 송곳니를 드러낸 안단테. 그는 격해진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함부로 내 감정을 단정 짓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설사 내가 감정의 모든 걸 알지 못한다고 해도, 네 감정이 집착이라는 건 알고 있다.”
“X발, 그거 대단한 추리가 납셨네. 그런데 네가 뭐라도 되는 양 지껄이지는 말아야 할 거야. 여기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멱살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신해창의 목을 잡아 꺾을 것처럼 살벌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신해창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아니, 두려움조차 잊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SS급 가이드. 그 위엄이 손안에 있으므로. 그것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욕심은 눈앞의 위험에도 신해창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진효섭을 길드에 영입한 지도 벌써 두 달째. 신해창의 예상과 달리 안단테의 우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10개월 남짓.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이상,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효섭이 SS급인 이상, 힘을 들이지 않아도 랭킹은 뒤바뀐다. 당장에라도 알린다면 랭킹 조정이 이루어지리라.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효섭을 더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전의 대화로 신해창은 진효섭의 마음을 회유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안단테를 떼어 놓으면 그만이지.’
성공이 눈앞에 있다. 이제 한 발자국만이 남았다. 눈앞의 안단테만 치울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신해창은 그토록 바라는 목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신해창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안단테. 언젠가 네가 그랬지. 남의 것을 탐내면 곤란하다고.”
그리고 상황은 이미 신해창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네가 네 입으로 진효섭 가이드를 ‘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점에서부터 집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너는 네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그에게 분노를 느낄 뿐이니까.”
“그렇지 않아.”
“아니. 이것이 정답이다. 그 증거로, 너는 그의 싫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는, 이기적인 소유욕임을 뜻하고 있지.”
안단테의 구겨진 표정에는 온기가 없었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생명이 없는 껍데기라 착각할 만큼 그는 고요히 분노하고 있었다.
“네 감정은 더럽고 추하다. 상대의 배려 따윈 없고, 네 감정만을 우선하는, 집착이 분명해.”
“…….”
“그러니까 이제 인정하고 얌전히 떨어져 나가. 그것만이 진효섭에게 속죄가 될 테니까.”
말을 끝마치며 신해창은 안단테의 손을 떨쳐 냈다. 안단테는 멱살을 놓아 주며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지만, 신해창은 앞으로 그가 약속된 가이딩 횟수를 끝마친 후 완전히 진효섭을 떠날 거라고 확신했다. 흔들리는 게 느껴진 탓이다.
‘우습군.’
사실 번듯한 성인처럼 말을 뱉어 냈지만, 신해창은 이러한 상황 자체가 우스웠다.
‘집착이면 어떻다고.’
진효섭의 말은 신해창에게 타격이 되질 못했다. 상대의 마음 따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집착이든 뭐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점에서 안단테의 마음은 집착과 다소 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신해창은 진실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평생 약점이라고는 없을 줄 알았던 안단테에게 생긴 의외의 약점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매일같이 되뇌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안단테를 앞두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주춤거리게 됐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주제를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그러다 보면 결국 고백과도 같은 그림이 그려지게 돼서 쑥스러웠다.
거기다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안 그래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데, 안단테가 최근 단호하고 차갑게 변했다. 정확히는, 두 번째 만남 이후로 어딘가 이상해졌다.
처음에는 그냥 몸이 안 좋은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최소한의 접촉, 최소한의 대화,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행동. 그는 항상 3분 남짓의 짧은 가이딩을 받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말을 건넬 틈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언젠가 가이딩을 빨리 끝내고 대화를 해야겠다 결심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안단테는 가이딩을 시작한 지 1분도 되지 않아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기회가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예정된 가이딩 횟수는 하나하나 사라져 벌써 여섯 번째 가이딩이었다. 안단테가 변형 던전을 10분 안에 해결하는 등 엄청난 저력을 보여 줘 사람들은 차츰 안도하고 있는 반면, 진효섭 홀로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오늘이야말로 진짜 말해야 하는데…….’
그와 단둘이 얘기할 기회는 앞으로 종종 있겠지만, 이런 좋은 기회는 흔치 않다. 그 기회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더 촉박해졌다. 전전긍긍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안단테는 언제나 그랬듯 정확히 3분이 되자마자 잡은 손을 떼어 냈다.
“이 정도면 됐어.”
1초의 미적거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상대에게 조금의 마음도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젠 좋아하지 않는 걸까. 망설이는 사이, 기회가 떠난 걸까. 혼란스러움에 그의 표정을 읽어 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리깔린 속눈썹은 그 어떤 속마음도 읽어 낼 수 없도록 눈동자 위를 빼곡히 덮고 있었다.
“수고했어.”
결국, 안단테가 짧은 인사와 함께 나가려고 하는 순간 진효섭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직 힘은 충분히 있습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이 처음 노아피에 들어갔을 때를 연상시켰다. 자꾸만 밀어내는 안단테에 진효섭은 그간 입안으로만 수십 번 되뇌었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제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잠깐 멈칫한 안단테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S급으로 유지됐다고.”
사실은 능력이 더 좋아져 SS급을 부여받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세간에는 S급을 유지했다고 퍼뜨려 놨다. 거기다 소문이 퍼질 수도 있어 조심해야 했기에 함부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더는 무서워하거나 역가이딩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 싶었다. 가이딩 시간을 늘려 찬찬히 이야기 나눌 기회를 더 만들고 싶기도 했고.
“네. 전 멀쩡합니다. 그러니 딱 전처럼만 받으십시오. 이건 너무 적습니다.”
“적지 않아. 오히려 접촉으로는 이 이상 하지 않는 게 좋지. 원래도 접촉으로 이 이상 힘을 뽑아낸 적은 없었잖아.”
“그랬…… 습니까?”
진효섭의 자신의 힘이 안단테에게 어느 정도로 느껴지는지 몰랐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래. 접촉으로는 몸에 부담이 더 많이 가. 그러니까 여기까지가 딱 알맞아. 이 정도면 던전은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을 테고.”
“……그렇다고 해도 좀 더 받으십시오. 최근 몸 상태가 좋습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더 받을 필요는 없지.”
여전히 단호한 태도에 진효섭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단호한 안단테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까. 잠시만이라도 마음을 드러낸다면 자신 또한 입을 쉽게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진효섭이 초조함에 다소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키스면 괜찮겠습니까?”
“……뭐?”
허공으로 비껴 있던 시선이 드디어 진효섭에게 닿았다. 단단한 가면이 잠시나마 부서진 듯 얼빠진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거다, 싶어 진효섭은 마음을 굳게 다졌다.
“키스면 효율도 좋으니 걱정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