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87화
‘원래 그렇게까지 참기 힘든 향을 뿜었나? ……아니면 참을성이라는 게 다 사라진 건가.’
어쩌면 안단테는 평생 나눠 써야 했을 인내를 모두 소진한 걸지도 모른다. 달콤한 향을 내뿜으며 제 침대 위에서 조르던 진효섭을 두고 참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칭찬받을 만했다.
‘하, 이걸 좋다고 말해야 하는지, 나쁘다고 말해야 하는지.’
눈앞에 두고 꾹 참아야 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고역이었다. 물론, 진효섭이 변형 게이트 탓에 자신에게만 가이딩을 한다는 점이 그 고역조차 기꺼이 참아 넘길 수 있게 했지만.
그때, 휴대폰을 보며 뒹굴뒹굴하던 체르니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맞아. 단장님, 이번에 진효섭 프로필 사진 올라온 거 봤어요? 인터넷에서 난리던데.”
“프로필 사진?”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던 안단테가 곧장 반응하자, 옆에서 끊임없이 말하던 플랫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체르니와 안단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를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네. 이건데. 이야…… 사진 진짜 잘 나왔더라고요. 이러다가 가이드 출신 연예인 되는 거 아니에요?”
체르니가 실없는 소리를 하며 사진을 띄운 화면을 안단테에게로 돌렸다. 안단테의 눈매는 가늘어졌고, 옆에서 훔쳐보던 플랫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말대로, 정말 잘 나온 사진이었다. 옅은 회색의 배경을 두고 부드럽게 웃음을 짓고 있는 진효섭. 그 본연의 부드러운 성격이 화면 밖으로 뚫고 나오는 듯했다. 어떻게 봐도 일반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지을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아니었다. 안단테의 눈이 사진 아래쪽을 훑었다.
“……꼭 증명사진같이 잘라 놨네.”
보통 프로필 사진은 상체가 모두 나오는 편인데, 진효섭은 유독 짧게 잘려져 있었다. 마치 잘라 내야 할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신해창인가?’
맞은편에 누군가가 있었을 거란 추측과 함께, 그 앞에 서 있을 신해창을 떠올리자 또다시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신해창. 언젠가는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픈 놈이다. 사실 행동으로 옮기자면 얼마든지 간단히 해낼 수 있지만, 진효섭과 얽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간단하던 안단테였지만 유독 진효섭과 얽힌 일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들 뿐이었다. 진효섭과의 만남도, 소식을 듣는 일도, 하물며 그 주변에 있는 놈들을 손 놓고 바라보는 것까지. 하나같이 거슬리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참을 인을 수백 개씩 새겼다.
차라리 이대로 떠나면 더 이상 인내할 필요도 없을 텐데. 안단테는 그런 불편과 짜증을 감내하면서도 진효섭 곁을 빙글빙글 맴돌며 잠깐 머물고 말 시선 한 번을 바라는 본인이 가장 문제라는 점을 인지했다.
‘등신 새끼가 따로 없네.’
예전의 안단테는 가이드에게 집착하고, 목을 매는 에스퍼들을 향해 멍청하다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하지만 자신 또한 어느새 그 멍청한 행동을 똑같이 반복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자각했음에도 태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 순간조차도 그가 보고 싶다는 걸 참을 수 없었으니까.
“안 되겠다.”
안단테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플랫이 귀를 쫑긋하며 대뜸 물었다.
“역시 그렇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머리가 아래에 달린 단장이 이걸 참을 리 없겠지.”
그러곤 이제야 단장다워졌다며 조금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진효섭 여기로 데려오려고요? 아니지. 단장이라면 그냥 도장 찍어 버리려는 속셈-”
“헛소리하지 마.”
안단테는 플랫의 상상을 깔끔하게 잘라 냈다.
“앞으로 효섭이가 다시 우리 길드에 들어올 일은 없어. 내가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예? 아니, 왜요? 설마 이 사진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어요? 남들 앞에서 이렇게 웃고 다니면 여기저기서 채 가려고 한다니까요. 다른 에스퍼랑 사랑에 빠져서 각인이라도 한다고 하면 어쩌게요.”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
“그런 것치고 다른 에스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살기가 새어 나와서 오싹한데요.”
“…….”
플랫이 순간 황금빛을 띠며 일렁이는 안단테의 눈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빨리 꼬셔서 도장 찍어요. 각인하라고요. 각인하면 상성이 더 좋아진다는데, 진효섭의 몸이 걱정된다면 도장 딱 찍으면 되잖아요? 저번에 보니까 진효섭도 아직 단장한테 미련 남은 것 같은데.”
입술을 삐죽이며 플랫이 턱을 괴었다.
“그게 아니면 왜 단장의 가이딩을 오케이했겠어요. 신해창은 전부터 계속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 받는 중이라고 하니 견적 나오잖아요. 서로 마음 있는 거 보이는데 왜 삽질이에요? 역가이딩 참는 거는 어차피 어떤 가이드랑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각인.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각인 자국이야 심장에서 떨어진 곳에 새기면 되고, 그렇게 하면 상성이 더 좋아져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효섭이의 마음은 이미 떠났어.’
플랫은 진효섭도 마음이 있기에 이번 가이딩 일을 허용했다고 말했지만, 안단테가 봤을 땐 사실이 아니었다. 진효섭은 그저 지금의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뿐이니까.
‘내 마음은 일방통행이야. ……나와 함께 있을 바에 죽는 게 낫다는 사람과는 각인할 수 없어.’
모든 방향을 생각해 봤지만, 그와 함께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 발로 뻥 차 버린 기회들을 도로 주워 담기에는 너무 멀어진 탓이다.
그렇기에 안단테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고작 열 번밖에 되지 않을 그와의 가이딩. 한자리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아마도 마지막일 유일한 그 순간. 그 순간을 눈에 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과 역가이딩 충동을 한계까지 눌러야 하고.
‘……하.’
다만 그 인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어서, 또 그 열 번의 가이딩이 끝나면 그를 완전히 놓아줘야 한다는 다짐이 어려워서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안단테는 저조해진 기분으로 차갑게 대답하곤 밖으로 향했다. 머릿속에 진효섭이 아른거리기 시작하니 참기가 어려웠다.
‘이러면 온종일 진정되지 않는데.’
들끓는 소유욕과 그를 억누르기 위한 인내. 몰아치는 감정을 갈무리하려면 진효섭이 있을 국가안보국 길드 주위, 정확히는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을 거닐다 오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한숨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 * *
“예……?”
믿을 수 없다는 듯 진효섭이 되물었으나 눈앞에 놓인 능력 측정 결과지는 그대로였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결과지를 짚었다.
“느, 능력의 질이 더 좋아졌습니다. 진효섭 가이드.”
결과지에는 붉은 선이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래위로 불안하게 흔들리던 능력치 선이 상승세를 타더니 어느 순간 일자를 그렸다. 오른쪽 끝에서 끊긴 일자는 현재를 의미하는데, 전에 알던 능력치 결과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쪽은 S급 가이드들의 평균입니다.”
비교해 보라는 듯 의사가 다른 S급 가이드들의 평균 그래프도 내밀었다. 딱 봐도 같은 S급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편차가 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진효섭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 이게 가능한 겁니까? 능력치가 올라간다니…….”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보통 처음 발현하고 아직 능력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 측정한 경우, 그 뒤에 다시 검사하면 달라지기도 합니다. 다만 C급에서 B급 정도로 오르는 편인지라……. S급이 더 오르는 경우는 저도 처음 보네요.”
의사 역시 놀라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설명했다.
능력이 불안정한 것은 등급에 변동이 있기 직전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능력이 하락함을 예상했다. 그건 진효섭 역시 마찬가지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고, 능력이 불안정했으니 등급이 높아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지. 조금 이상하긴 했어.’
사실 등급 하락이라기엔 몸 안의 힘이 전보다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S급을 유지할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진효섭 가이드. 아무래도 이 정도 수치면 SS급으로의 승급도 가뿐할 것 같습니다.”
진효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자 의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믿기지 않을 것 압니다. 하지만 두 번이나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이 정도라면 신해창 에스퍼의 요청이 승낙될 게 분명합니다. 아니, 요구하지 않더라도 승급돼야 할 겁니다.”
신해창은 이전에 진효섭의 등급을 조정해 달라는 안건을 [SSS]에 요구했었다. 진효섭의 몸 상태 저조와 함께 흐지부지되는 듯했지만, 없던 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잠깐 연기됐을 뿐.
의사의 말대로 결과지를 제출한다면 아마 신해창이 바라는 대로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될 것이다. 그만큼 진효섭과 타 S급 가이드와의 차이는 확연했다. 즉, 진효섭은 안단테와 같은 선상에 설 유일무이한 SS급 가이드가 될 테고, 다시는 그 누구의 집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위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SS급으로의 승급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진효섭 가이드.”
“예……. 감사합니다.”
의사의 축하 인사에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진효섭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심장이 여전히 거세게 뛰었다. SS급으로의 승급에 기뻐서도, 에스퍼의 집착에서 스스로를 지킬 좋은 무기를 얻어서도 아니었다. 이제 그런 것들은 진효섭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효섭은 이제 안단테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의심할 여지도 없다. 남은 건, 진효섭과 안단테의 상성이 정말 잘 맞는 거라는 확신뿐이었는데, 그것이 지금 검사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