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86화
여느 때와 비슷한 하루였다. 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버터 향이 물씬 풍기고, 티나는 진효섭을 반기며 품에 안겼다. 무엇 하나 특이하지 않은 일상. 다만, 전과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그 끝에 안단테를 보러 향한다는 점이다.
‘진, 너무 무리하면 안 돼. 알았지? 내키지 않으면 안 가도 되고.’
테디는 안단테에게 향하는 길 내내 진효섭을 걱정했다. 가이딩을 위해 게이트라는 위험 근처로 가는 것보다 안단테와의 가이딩 자체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사실 그건 가이딩을 받는 안단테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진효섭은 이상하리만큼 그와의 가이딩이 두렵지 않았다. 그를 보러 가는 지금도, 두려움보다는 미묘한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고 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츠러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진효섭은 처음 안단테와 닿았을 때부터 그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느꼈다. 그저 가이드의 특성이 발휘된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다른 S급들이 안단테의 가이딩을 두려워하는 반면 진효섭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끌렸기 때문인 걸까…….’
은은하게 풍기는 향. 마냥 가볍게 보이지만 깊은 어둠을 끌어안은 눈동자. 그를 마주하는 순간 얽혀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를 가이딩할 수 있다고, 가능해야 한다고 최면처럼 생각했던 걸지도.
약간의 동질감으로 시작한 호감이 한순간에 시선도 떼지 못할 만큼 깊어졌다. 한번 빠져 버린 이상, 헤어 나오기는 어려웠다. 손쓸 도리 없이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진효섭은 금세 도착한 장소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쏟아질 것처럼 많은 별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별들 사이, 커다랗게 일렁이는 물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입구가 열리지 않았지만, 검은 구름이 뭉쳐 있는 것 같은 모양이 열리기 전의 게이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효섭아.”
가이딩할 때는 그렇게 내외하듯 굴던 안단테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가왔다. 밝은 달빛과 그것을 반쯤 가린 검은 구름, 그리고 그런 배경을 뒤로하고 걸어오는 안단테는 신비했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외모에 진효섭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성큼성큼 다가온 안단테는 저번과는 다르게 진효섭을 낚아채듯 이끌었다. 잠깐 차 안의 운전석을 째려본 것도 같았다.
“따로 내부를 마련해 뒀으니까 들어가자.”
그의 말대로, 진효섭은 아늑하게 꾸며진 방으로 안내받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다소 신기했다.
“여긴 따로 준비하신 겁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서.”
“설마…… 이번 던전은 오래 걸릴 것 같습니까?”
이번 던전은 빠르게 해결하고 나오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방을 마련해 뒀다니. 문제가 길어지리라 예상했다는 뜻이 아닌가.
다행히 안단테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잠깐이라도 밖에 두기가 그래서 만든 것뿐이야. 왠지 넌 내가 괜찮다고 해도 던전을 파훼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 같아서.”
한마디로 안단테를 위한 게 아니라 진효섭을 위한 공간이란 의미다. 던전에 들어가 나오는 데까지 채 20분도 걸리지 않을 텐데 말이다.
“위험이 생길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다만, 그렇다고 해도 보호막은 있어야 내가 안심할 것 같아서 준비한 것뿐이니까 걱정 마.”
“예. 알겠습니다.”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듯했다. 진효섭은 손끝을 만지작대다가 조심스레 안단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이딩,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두 손을 마주 잡자 처음 가이딩을 했을 때보다도 더한 두근거림이 퍼졌다. 그 어떤 사람과 가이딩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상대에게 떠는 것이 들킬까, 손끝까지도 긴장해야 했다.
그런데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손끝이 자꾸만 미세하게 떨렸다. 고작 손잡는 정도에 이런 반응을 보이자니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진효섭은 분명 제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을 거라 생각하며 반대쪽 손으로 목을 문질렀다.
잠깐, 안단테의 눈이 발긋한 피부에 머물렀다가 허공으로 비꼈으나 진효섭으로선 알 수 없었다.
숨을 삼킨 이후, 뱉어지는 것은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방 안에서 숨을 쉬는 게 진효섭 혼자인 것만 같았다. 진효섭은 주위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힘을 불어 넣었다.
동시에 안단테가 치아를 꽉 깨물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귀밑이 불룩, 튀어나온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온몸을 뻣뻣하게 굳힌 그를 보고 있으려니 지금 역가이딩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문득, 진효섭은 가이딩이 생각만큼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본래 안단테와의 접촉 가이딩은 꽤 힘들었다. 손이 닿는 것만으로 힘이 울렁거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형이 자제해서 그런가?’
의아함에 긴가민가하며 진효섭이 힘을 조금 더 불어 넣었다. 그러자 저번과 다를 바 없이 안단테가 빠르게 손을 뗐다.
“이 정도면 됐어.”
“아직 제대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충분해.”
안단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할 일이 있다는 듯 급한 몸짓. 모든 게 저번과 비슷했다. 진효섭은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땐 그냥 보냈다지만 이번에는 안 돼.’
지금 바로 던전으로 향할 텐데, 이렇게 조금만 가이딩을 해서 보낼 수는 없었다.
“형, 아직 멀었습니다. 조금만 더 받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진효섭이 안단테의 팔을 잡아당겼을 때였다. 손바닥에 닿는 열기에 흠칫 손끝이 굳었다. 본래도 몸이 따듯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열이 펄펄 끓어올랐다. 온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를 만한 열기였다.
“형, 지금 몸이…….”
당혹스러워 말을 흐리던 진효섭이 뒤늦게 안단테의 선명한 황금빛 눈을 발견했다.
“아…….”
“…….”
그 순간, 진효섭은 느꼈다. 안단테가 참던 것이 역가이딩 하나뿐만은 아니란 걸. 저번에도 가이딩을 받은 직후 빨리 자리를 벗어나더니, 이런 이유였나 보다.
“……난 괜찮아.”
안단테가 진효섭의 손을 어색하게 떨쳐 내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기적어기적 걸어 사라진 안단테에 진효섭이 손등으로 제 뺨을 쓸었다. 다소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진효섭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열기가 뺨에 옮겨붙은 듯 귀 끝까지 붉어진 채였다.
* * *
“하아…….”
안단테의 한숨은 깊고 깊었다. 찡그려진 미간이 단단하게 얽힌 두 손 위에 꾹 얹혔다. 누가 봐도 고뇌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배를 문지르며 사무실로 들어온 플랫이 그런 안단테를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죽을상이에요?”
“……죽을 것 같으니까.”
“죽을 것 같다고요? 그거 이상하네. 난 단장이 좋아 가지고 히죽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플랫은 입술에 문 이쑤시개 끝을 씹으며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그렇잖아요. 요즘 틈틈이 진효섭한테 가이딩받고, 던전 열리기 전에는 방까지 잡는다면서요? 와우. 이러다가 조만간 우리 길드의 가이드가 돌아오는 거 아닌가?”
플랫이 낄낄 웃어 댔다. 장난스러운 말과 표정에 안단테가 한마디 쏘아붙일 것도 같았는데,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깊은 한숨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하아…….”
“뭐예요. 또 한숨이네. 진짜 잘되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플랫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단테의 가이딩을 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진효섭이다. 플랫은 그 사실로 미루어 진효섭이 안단테에게 아직 마음이 있다 여겼다. 그러니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조금만 길어진다면 금방 전처럼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떠 있어야 할 안단테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했고, 복잡해 보였다.
“하아…….”
다시금 한숨이 터지며 안단테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니, 왜 이렇게 한숨을 쉬냐고요. 말해 봐요. 예?”
환한 전등 불빛을 손등으로 가린 안단테는 옆에서 종알거리는 플랫의 말을 그대로 흘려들었다.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새삼스레 그 선택이 옳았던 건지 의문이 든 탓이다.
‘이건 뭐 신종 고문도 아니고.’
안단테가 진효섭의 가이딩을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그렇게라도 해야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이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고 싶다는 간절함이 어마어마했다.
애초에 역가이딩 충동은 그날이 아닌 이상, 허벅지에 칼을 박아 넣어서라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대체 왜 그렇게 예쁜 건데.’
본래도 진효섭이 꽤 괜찮게 생겼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는 미남. 그의 첫인상은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유독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바뀐다. 생각보다 순한가? 하고.
그리고 대화를 몇 번 나누면, 그저 덩치만 큰 강아지같이 느껴진다. 앙칼진 소형견 같은 가이드들 사이에서 묵묵히 눈을 끔뻑이는 대형견이라니. 어화둥둥 품에 안고 다니고 싶은 매력에 보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 두 번째 가이딩 때는 평소 풍긴 적 없는 분내를 묻힌 채 나타났다. 화장이라도 한 건지 뽀송뽀송하던 뺨이 매끈했다. 안단테는 향에 예민해서인지 인위적인 향수나 화장품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가 풍기니 또 달랐다. 아이 같은 분내에 달콤한 향이 섞이자 목 안이 절로 마르는 듯했다.
진효섭은 눈앞의 짐승이 저를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모르는지 무방비하게 눈을 맞추고,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흘러들어 온 가이딩. 머릿속에선 진효섭을 깔아뭉개고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일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