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85화
진효섭은 치솟는 충동을 꾹 삼킨 채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더욱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부 저희 때문이었으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안단테의 옅은 갈색 눈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진효섭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가이딩을 제대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그 누구도 다칠 일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안단테는 말이 없었지만 견고하던 생각이 조금 기울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효섭은 다시 손을 뻗어 안단테의 손을 이끌었다. 그가 움찔 손끝을 떨었다. 부드럽게 손을 마주 잡는 접촉이 무척이나 오랜만인 것 같았다.
‘1년인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진효섭은 천천히 힘을 불어 넣었다. 힘이 넘실거리며 맞닿은 피부를 통해 흘러 넘어갔다. 확실히 다른 S급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생각해 보면 깊은 가이딩을 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 그동안 던전을 전전했으니 몸은 독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을 터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은데.’
좀 더 몸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진효섭이 힘을 더욱 불어 넣었다. 어느 정도로 깊은 접촉이 필요할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는 필요하다면 깊은 가이딩도 염두에 뒀다. 안단테에게 이런 접촉 가이딩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번 가이딩의 효과가 꽤 좋았던 건지 몸은 나쁘지만 흡수되는 양을 보니 아직은 괜찮았다. 이 정도면 키스 가이딩으로 충분하리라. 그렇게 진효섭이 안단테의 몸 상태를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안단테가 진효섭과 잡은 손을 떼어 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게 무슨……. 아직 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앞으로는 딱 여기까지 가이딩 받는 걸로 할게. 이 정도면 던전 하나쯤은 완벽하게 오갈 수 있어.”
“하지만-”
진효섭이 안단테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이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혼자 남은 진효섭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직 힘을 반도 쓰지 않았는데 괜찮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바보 같긴.”
* * *
“진, 오늘 일정이야.”
“고마워.”
진효섭은 바쁜 아침 탓에 셀레나가 준비해 준 샌드위치를 차에서 오물거리며 일정을 살폈다. 남은 일은 새로운 프로필 촬영과 안단테의 가이딩뿐이었다. 일정을 훑어본 진효섭이 테디에게 물었다.
“다음 변형 게이트가 열리는 예상 날짜는 나왔어?”
“응. 바로 오늘 자정.”
“그래서 이렇게 늦게 잡아 놨구나.”
안단테의 가이딩 일정은 무려 저녁 열한 시였다. 보통 일곱 시 전에 일정이 모두 마치곤 했기에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 때문인 듯했다.
“근데, 첫 번째 가이딩은 좀 어땠어? 몸은 괜찮고?”
“응.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래? 그렇다면 진짜 다행인데, 혹시라도 또 이상한 현상이 있으면 말해야 해. 알지?”
“그럴게.”
테디는 안색이 좋아 보이는 진효섭을 백미러로 흘끔 바라봤다. 많이 걱정스러웠는지 그제야 표정이 다소 풀렸다.
“정말 괜찮아 보이기는 하네. 진, 너 안정제도 완전히 딱 끊었잖아.”
“그러게. 이제 안정이 됐나 봐.”
그 말대로, 안정제를 찾지 않은 지 오래였다. 한창 별로일 때는 온종일 약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할 정도였는데 확실히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테디. 저번에 했던 능력 측정 검사는 어떻게 됐어? 이틀이면 결과가 나온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어서.”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테디는 제 시계를 흘끔 바라봤다.
“지금쯤 나왔을 것 같은데, 내가 나중에 알아보고 따로 연락해 줄게.”
“응. 부탁해.”
진효섭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운 등급 측정에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잠시 후, 진효섭은 촬영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나른했던 건 잠시뿐 다시금 일상이 분주해졌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진효섭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 손질을 받는 게 다였으니까.
사진을 찍는 데 시간이 길게 잡혀 있어 다소 의아했었는데 도착해 보니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프로필 촬영은 진효섭이 생각한 증명사진이 아니었다. 스튜디오는 컸고, 머리를 만지는 디자이너의 손길은 신중했다. 진효섭은 그들의 손길을 받으며 어색하게 거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모든 게 다 끝나자, 거울 속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의 그가 있었다. 눈가가 한층 깊어졌는데, 인상이 짙어지기는커녕 부드럽고 순한 눈매가 강조된 느낌이었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부드러워 보였고, 살짝 발그레한 뺨은 어쩐지 그날을 연상시키는 듯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전에 모임을 나갈 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지만 익숙해지려면 한참 걸릴 듯했다. 이윽고 진효섭은 카메라 앞에 섰다. 수많은 조명이 그를 향했다.
“진효섭 가이드님,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예.”
즐거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찰칵거리는 셔터음이 들려왔다. 편안한 분위기였으나 그 가운데에 있는 진효섭은 정작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찰칵찰칵, 몇 번 찍는가 싶더니 사진작가가 난감한 표정으로 카메라에서 시선을 뗐다.
“저…… 진효섭 가이드. 꼭 카메라를 보실 필요는 없고, 편하게 있으시면 돼요.”
“예.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웃어 주시면 더 좋고.”
진효섭이 그의 요청에 따라 입꼬리를 끌어 올렸으나 사진작가의 표정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맹렬하던 셔터음이 부진한 것도 같았다.
사진을 확인하던 사진작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진효섭에게 다른 자세를 요구했다. 직접 다가와 자세를 움직여 주기도 했다. 측면부터 45도, 선 자세부터 앉은 자세까지 다양하게 찍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모호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진효섭도 점차 지쳐 갈 때였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테디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그러곤 곧바로 진효섭에게 다가와 그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작게 낮췄다.
“혹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보여?”
“당연하지. 너 지금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다고. 나 진이 이런 화난 표정을 짓는 거 처음 봤어.”
“화, 화난 건 아니었는데.”
진효섭이 난감해하며 고개를 떨궜다. 민망스러웠다. 고작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굳어서는.
“뭐,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 이런 촬영도 처음일 테고……. 근데 그냥 편하게 생각해. 요즘 모임 자주 갔잖아. 거기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
“응…….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는데, 좀 어렵네.”
카메라나 타인의 시선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중에 다르다 느꼈는지 표정을 펴는 게 영 어려웠다.
“으음, 어쩌지. 긴장을 좀 풀면 좋겠는데. 아, 내가 티나 얘기라도 해 줄까?”
“티나?”
진효섭은 눈을 끔뻑이며 티나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 티나는 진이 바빠서 빨리 나가 버린다며 입술을 삐죽였었다. 한국 온 뒤로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걸 이루지 못한 데다가 진효섭이 테디하고만 있게 돼 심술이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이번에 티나가 한국으로 와서 반 인기인이 됐다더라고. 그것도 네 얘기로.”
“내 얘기?”
“응. 너 한국에서 유명하잖아. 그런데 너랑 같이 산다고 하니까 애들이 난리가 났대. 너 잘하면 티나 반 애들 전원한테 사인해 줘야 할지도 몰라.”
“사, 사인이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진효섭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뭐, 다행이기는 해. 한국말도 잘 못 하는 외국인이 학교에서 친구는 사귈는지, 잘 지낼 수 있을는지 걱정이 많았거든. 하필 걔가 외국인학교를 안 고르고 그냥 학교를 골라서.”
“그건 들었어. 티나가 그렇게 바랐다고.”
“어. 그래서 엄마도 걱정 많았는데, 다행이래. 진 덕분에 인기인 됐으니까.”
테디는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지금 티나는 이번 학부모 참여 수업에 널 부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어. 애들이 너랑 티나가 결혼한다는 말을 안 믿기 때문이라던데, 잘하면 너 거기 가서 약혼식 올려야 할 수도 있겠더라. 마침 꽃다발도 준비해 갈 테고. 딱 맞네.”
“야, 약혼식?”
“어. 근데 네가 인기가 워낙 많아서 큰일이야. 내로라하는 에스퍼들이 질투를 해 댈 텐데, 내 동생이 감당할 수 있으려나?”
중얼거리는 테디의 표정이 꽤 진지해 보여 진효섭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것도 잠시, 테디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장난스러운 표정에 진효섭 역시 그제야 피식,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자연스레 입가에 지어졌다.
“그게 뭐야.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거든?”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했던 표정이 스륵 풀리는 동시에 셔터음이 들려왔다. 진효섭이 고개를 돌리자 다시금 셔터음이 연달아 터졌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사진작가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오. 좋네요.”
“예?”
“이걸로 촬영 마무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진을 건진 건지는 몰라도, 그는 이보다 더 좋은 사진이 나올 일은 없다고 생각한 듯 곧장 옆에 놓인 노트북을 확인했다.
“와! 잘됐네, 진.”
“그…… 런가?”
“빨리 끝났잖아. 안단테 에스퍼에게 가이딩하기 전에 좀 쉬어 두면 되겠다.”
방금 얼빠진 표정을 지은 것 같았는데……. 그게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러나 굳이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과정이 더 민망할 테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집에 들러서 저녁이나 먹고 갈래?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라더라.”
“좋아.”
“그럼 얼른 움직이자.”
벌써 침이 고이는지 테디는 연신 아랫입술을 닦으며 진효섭을 재촉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촬영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