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83화
“네가 알아서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어. 너니까 불가능할 리가 없겠지. 하지만 이번 던전은 순식간에 해결하고 나와야 해. 만약 저번처럼 시간이 꽤 걸린다면 괴물이 게이트 밖으로 나올 거야.”
걸음만 멈춘 안단테가 꿋꿋이 등을 보인 채 짜증스레 대꾸했다.
“그러니까,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잖아. 뭐가 문젠데.”
“일이 그렇게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 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뭐 하러 돌아가? 그냥 안전하게 가자고. 안전하게.”
미국 대표가 고집을 부리는 안단테를 이상하다는 듯 훑었다. 좋은 방법이 있는데 자꾸 듣지 않으려는 행동이 수상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다 보니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다음 주제를 위해 시선을 진효섭에게로 돌렸다.
“듣자 하니 한국의 국가안보국 가이드가 안단테랑 상성이 잘 맞는다면서? 같은 한국 길드기도 하니까, 이번만큼은 서로 도왔으면 하는데.”
순간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그 또한 느꼈는지 미국 대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제야 안단테는 다시 몸을 돌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게, 표정에 서린 짜증이 여실했다.
“하아……. 중요하다고 불러내더니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뭐가 쓸데없다는-”
“됐고. 아까도 말했지만 가이딩은 없어도 돼. 이대로도 충분하니까.”
안단테의 시선이 흘끔 진효섭을 스쳤다. 그는 단호하리만큼 확실하게 다시 한번 말했다.
“문제 같은 건 없어.”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걸로 모임은 끝이니까 더 주절주절하지 마. 그리고 너, 나랑 얘기 좀 하자.”
안단테가 미국 대표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챘다. 컥, 소리가 들렸으나 무례하기보다 두 사람의 친근함이 두드러졌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그들이 자리에서 벗어나려던 때였다. 진효섭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하겠습니다.”
우뚝, 안단테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미국 대표는 환한 표정으로 진효섭을 돌아봤지만 안단테는 미동이 없었다.
기실 이 결정이 이상하다는 건 진효섭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주장한 데다가 가이딩 증폭기도 있으니, 굳이 나설 필요는 없을 터. 그럼에도 진효섭은 뱉은 말을 물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이 걱정된다면 네가 바라는 그 세상을 위해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어.’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날의 고백이 맴돌고 있었다.
‘난 너만 살아 있으면 돼.’
제멋대로인 그의 성향을 닮아 그런지 아무리 노력해도 도통 머릿속에서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진효섭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 * *
진효섭은 빠르게 지나가는 크고 작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
멀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멀리 와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가까워지기에는, 다시 곁으로 돌아가기에는 사이의 골이 너무나도 크고 깊기에.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충동적으로 말했다. 자신이 그 가이딩을 담당하겠다고.
그날의 고백에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한 건지, 감정과 이성이 정반대를 내달리며 자꾸만 부딪혔다. 깊었던 오해를 풀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이렇게 멀어지는 게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일 거라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건만. 감정은 여전히 안단테의 곁에 있기를 원했다.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충동적인 행동에도 후회하기는커녕,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이다지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진효섭은 심장께를 꾹 눌렀다. 안단테의 곁. 오해가 깊어지기 전, 그의 곁에 있던 순간을 떠올리자 심장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오랜 기간 그것을 바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제껏 안단테를 향했던 크고 작은 반응들에 깊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이젠 확실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진효섭은 안단테의 곁에 있고 싶은 거다. 아마 계속 그랬는데 애써 외면하던 것뿐.
오해를 풀고, 다시 한번 그의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은 마음을 눈치채니 감정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상념에 빠져 있는 와중 신해창이 운전하던 차를 멈춰 세웠다. 그는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차 문을 열어 주며 진효섭을 에스코트했다.
“다 왔습니다, 진효섭 가이드.”
“아……. 예. 감사합니다.”
갈 때는 꽤 먼 거리 같았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인지 돌아오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보다 신해창 에스퍼가 더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효섭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그……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중요한 사항인데 제가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진효섭은 제일 먼저 길드장인 신해창과 상의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제멋대로 결정했으니…… 모두 진효섭의 잘못이었다. 질책받아도 모자란 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신해창은 화내거나 짜증 내는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일 때문이라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상황은 지금처럼 흘러갔을 겁니다. 저 역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차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덤덤한 그의 태도에 진효섭의 표정이 조금 펴졌을 때였다. 신해창이 진효섭을 빤히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진효섭 가이드가 바로 하겠다고 말했던 건 조금 의외였습니다. 몸에 큰 부담이 갈 테고, 조금은 고민하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중요한 건 변형 게이트를 바로잡는 것이지 않습니까.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름 타당한 대답이라 생각했는데, 신해창은 묘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안단테를 벌써 용서하신 건가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진효섭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벌어진 입술은 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달싹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신해창의 시선에 걱정하는 기색이 어렸다.
“던전이 열린 날, 안단테가 진효섭 가이드를 지켰다고 들었습니다. 집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다고요.”
며칠 전, 아르헨티나에서 S급 변형 게이트가 생겼을 때를 말하는 듯했다.
“저는 진효섭 가이드가 걱정됩니다. 혹여나 그놈에게 속아 넘어갈까 싶어서 말입니다.”
더없이 자상한, 상대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러나 진효섭은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평소라면 귀담아듣고 흔들렸을 말이 유난하게 들려왔다.
“떠올려 보십시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등급이 내려갈 수 있다는 말에 병문안 한 번 오지 않았으면서 뒤늦게 진효섭 가이드를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진효섭은 신해창을 빤히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그의 의도가 오늘따라 투명하게 느껴졌다. 진효섭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는 더욱 다정한 태도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좋아한다면 그러한 행동을 할 리가 없습니다. 분명 진효섭 가이드가 다시 마음을 주시더라도 전과 다를 바 없겠죠.”
“전에도 그랬듯, 아무 이유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닐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런 가벼운 놈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서는-”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멈칫, 신해창이 말을 멈췄다. 진효섭은 그런 그를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신해창 에스퍼는 형이 가이딩 증폭기를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건…….”
신해창은 제대로 된 대답을 잇지 않았으나, 진효섭은 확신했다. 국가안보국의 길드장이 가이딩 증폭기 같은 존재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가볍다는 말로 모함해 진효섭을 안단테에게서 떨어뜨리려고 들었다. 만약 진효섭이 가이딩 증폭기에 대한 사실을 몰랐다면 다시금 오해를 할 만큼 아주 교묘하게 말이다.
신해창은 정말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 말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진효섭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이간질하려고 들었다.
문득 과거에 안단테와 유진을 담은 CCTV 영상을 두고 묘하게 설명했던 것이 떠올랐다. 거기다 병원에서 했던 이야기, 안단테를 만나기 전 BETEL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도. 모두 신해창이 의도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서 전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용한 가이드를 곁에 두기 위해서 번지르르한 말을 건네는 건 어느 쪽일까. 화살이 전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신해창 에스퍼가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는 건 전에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절 길드에 들이고 싶어 하신다는 것도 모두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단테와의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국가안보국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쓸모가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이건 전혀 달랐다.
“절 이용하는 건…… 예. 괜찮습니다. 저 역시 그 덕분에 신해창 에스퍼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진효섭이 처음으로 신해창에게 싸늘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서 절 흔들려고 들지 마십시오.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