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80화
“와. 오랜만이네. 그런데 단장, 형이 여기 온다는 소식은 없지 않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자.”
안단테가 단호하게 체르니의 말을 자르고 게이트로 다시 걸어갔다. 체르니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뒤따라갔다. 진효섭에게 인사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인지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노아피는 얼굴을 비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들을 향했던 관심이 다시금 진효섭에게로 향했다. 다들 눈치를 보듯이 눈을 굴리는 모양새였다. 테디 역시 신경 쓰였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진. 역시 내가 실수했나 봐.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 사실, 너한테 전화하고 나서 알게 됐거든. 이번 던전은 우리 국가안보국이 맡았는데, 같은 한국 길드의 에스퍼기도 하고…… 지금 단장님은 바쁘셔서 신경 쓸 겨를이 없고……. 음, 또 안단테 에스퍼가 원하기도 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며, 테디가 연신 눈치를 보듯 말을 이어 진효섭은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그렇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아, 응.”
나름 단호하게 말했으나 테디는 여전히 진효섭의 표정을 살폈다. 국가안보국으로 길드를 옮기면서 이런 불편한 시선은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테디가 이렇게 신경 쓴다는 건, 그만큼 표정이 좋지 않다는 의미리라.
진효섭은 남몰래 제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담담하게 표정을 꾸몄는데, 티가 나는 걸지도 몰랐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다 보니 더 잘 알아챈 걸 수도 있다. 언젠가 안단테도 말한 적 있지 않은가. 감정이 표정에 다 드러난다고. 진효섭은 자신이 표정 변화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진효섭은 다소 착잡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봤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그 말을 꺼낸 건 진효섭 본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한 건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오해한 채로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직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일도 없었을 테고, 꼬여 버린 상황을 풀 수도 있었다는 후회를 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
진효섭은 애써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SS급 에스퍼가 던전에 들어갔으니 이제 문제는 없을 거라고, 큰일은 없을 거란 생각만 하려고 했다. 주위도 더 피해는 없을 거라 확신하는지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클리어까지의 시간은 크게 걸리지 않았다. 노아피가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에스퍼가 대거 밖으로 나왔다. 앞서 나온 이들보다는 많이 다친 몸에 지친 기색이 선연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밝았다.
“이번 던전은 문제없이 처리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변형 게이트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얻은 듯합니다.”
한 에스퍼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가이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은 단숨에 밝아진 채였다.
진효섭은 가장 많이 다친 에스퍼들 위주로 접촉 가이딩을 해 주면서도 쉽사리 표정을 풀지 못했다. 게이트가 영 불안정하게 흔들린 탓이다. 복잡한 속내에 기계적으로 가이딩을 이어 가다 보니, 어느새 흘러 들어가던 힘이 더뎌졌다. 가이딩이 거의 끝났다는 의미였다.
“다됐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진효섭 가이드.”
이름 모를 A급 에스퍼의 표정이 다소 감격스럽게 변했다. 제 몸을 둘러보는 시선에 놀람이 서리는 것도 같았다.
“진, 여기도 부탁할게. S급 에스퍼야.”
“그래.”
테디의 말에 진효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으로 상처가 심한 에스퍼는 가쁜 숨을 쉬며 피를 흘리는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진효섭이 가이딩하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접촉과 동시에 힘이 흘러 들어가자 에스퍼의 표정이 순식간에 편해졌다. 고작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정도의 힘이었음에도 말이다.
‘……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A급을 가이딩할 때와 S급을 가이딩할 때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진효섭은 최근,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가이딩을 한 적이 없었다. 본래라면 본디지 파트너인 신해창의 가이딩은 담당했어야 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 불안정할 때 가이딩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등급에 변동이 있을 거라는 의미다. 진효섭은 가장 높은 등급, S급이니 A급 혹은 B급으로 내려갈 확률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능력의 한계도 모르고 가이딩을 하다가는 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거의 한 달 넘게 가이딩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최근 들어서 몸이 좋아졌다. 정확히는, 이 주일 전 안단테와 접촉한 뒤였지만. 어쨌든 능력도 안정됐고, 전과 다를 바 없는 힘이 느껴졌다.
‘이상해. 등급이 내려갈 거라고 들었는데,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잖아.’
오히려 힘은 전보다 더 충만한 것 같았다.
진효섭은 문득 어렸을 적 처음 등급을 검사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힘이 넘쳐흐르는 듯한 기분. 그 당시, 가이드로 발현하고 바로 등급을 검사받았는데 S급이 떴었다.
이후로도 몸 안의 힘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온몸이 힘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길지 못했다. A급 에스퍼와 각인으로 얽매이는 순간, 부푸는 듯했던 힘이 다시 응축되듯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그땐 정신이 없었거니와 원래 다들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게 맞지만.
진효섭에게 있어 강한 힘은 저주였다. 안 쓸 수 있다면 평생 봉인한 채 살아가고 싶다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진효섭이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가이딩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후…….”
손을 대고 있던 에스퍼가 낮게 숨을 뱉었다. 추운 겨울도 아닌데 그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와 진효섭의 눈이 커졌다.
“지금-”
말이 이어지기도 전, 기기긱- 변형 게이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동적으로 움직이던 변형 게이트가 작게 좁아졌다. 그러더니 울컥, 하고 게이트에서 핏덩이가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밑으로는 거미를 닮은 괴물이 툭, 툭 떨어졌다.
“꺄악!!!”
순식간에 주위가 아비규환이 됐다. 혼비백산한 가이드들은 자리를 피했고, 진효섭에게 가이딩을 받던 에스퍼 역시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 진효섭 가이드. 이쪽으로 오십시오. 위험합니다.”
짧은 사이 몸을 회복한 에스퍼는 위험을 감지해 진효섭을 이끌려고 했다. 하지만 진효섭은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게이트를 바라봤다. 핏덩이와 함께 툭, 툭, 떨어지고 있는 건 괴물들의 사체였다. 하나같이 움직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괴물들이 달려들 일은 없으니 위험도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진효섭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안심하지 못했다.
“……어째서?”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지극히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본래 던전에 사는 생물체는 게이트를 빠져나올 수 없다. 보석 같은 무생물 물품들은 빼낼 수 있었지만, 생물체만큼은 달랐다. 보스급의 괴물이든, 그곳에서 사는 자잘한 괴물이든 게이트를 기준으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사체라도 마찬가지. 하물며 변형 게이트에서 나온 그 검은 손조차 게이트를 벗어나진 못했다.
하지만 당연시했던 사실이 지금, 눈앞에서 깨졌다.
‘설마……. 저 변형 게이트는 괴물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뿐이다. 던전의 위험성이 더 이상 그 내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앞으로 변형 게이트를 통해 괴물들이 현실로 나올지도 모른다.
던전 내부의 지옥이 현실에 펼쳐질지도 모르기에 모든 이가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이러한데, 일반인들이 느낄 두려움은 어마어마하리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아연실색해진 그 순간, 살아 숨 쉬는 괴물이 게이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번뜩이는 초록색 눈과 제멋대로 자라난 이빨, 털이 수북한 열댓 개의 다리. 곤충과도 닮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진효섭이 작게 숨을 삼켰다.
“진! 얼른 자리를 옮겨야겠어!”
테디가 다급하게 진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잠깐 얼이 빠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진효섭은 곧장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알겠어.”
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헬기로 향하려는데, 바로 앞에 끈적이는 액체가 튀었다. 그 액체에 바닥이 치직,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섬뜩한 광경에 진효섭이 순간 머뭇거리자 테디가 안심하라고 말했다.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타! 문제없을 거야.”
그런 테디의 손끝에서는 푸른빛이 흘렀다. 처음으로 그의 능력을 봤지만 감탄하거나 얘기할 시간은 없었다. 진효섭은 헬기를 운전해 함께 왔던 에스퍼를 따라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다행히 헬기에 탈 때까지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