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67화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신해창에게서 전해 들었지만, 직접 확인하니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그 덕분인지 그를 앞두고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놀라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그날 병원에서 일방적으로 마주했던 덕인지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진효섭은 신해창의 말대로 잘해 내고 있었다. 아주 덤덤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반면, 안단테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느긋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게 티가 났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 폭주 전 가이딩 때와 똑같아서 진효섭은 애써 덤덤하게 꾸민 표정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적막이 길어졌으나 시선을 돌릴 틈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의 긴장이 몸을 조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 긴장을 깨부순 건 신해창이었다.
“진효섭 가이드. 아직 저녁 식사 전이실 텐데, 식사 대용으로 뭔가 드시겠습니까.”
딱딱하게 굳은 안단테를 앞두고도 신해창은 오로지 진효섭에게만 말을 걸었다.
“같이 가시죠. 저쪽으로 가면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해창이 진효섭을 이끌려고 했을 때였다. 덥석, 진효섭의 팔이 잡혀 몸이 돌아갔다. 잔뜩 흔들리는 눈을 한 안단테가 진효섭을 내려다봤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지금 내 가이드에게 뭐 하는 거지?”
탁, 신해창이 안단테의 손목을 잡아챘다.
“……내 가이드?”
두 에스퍼가 시선을 마주하고, 곧 살벌한 기류가 흘렀다. 웅성거리던 홀에는 어느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에 진효섭 역시 새어 나갈 것 같은 신음을 꾹 참았다. 손목을 옥죄는 강한 힘에 저도 모르게 긴장돼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신해창만을 주시하는 것 같던 안단테가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신해창이 진효섭을 잡은 안단테의 손을 뿌리쳤다.
“예의 없이 굴지 마라, 안단테. 남의 가이드에게 함부로 접촉하지 않는 게 규율일 텐데.”
안단테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효섭이가 왜 네 가이드야.”
“진효섭 가이드는 이제 우리 국가안보국 소속이다. 그리고 내 본디지 파트너이기도 하고. 뉴스를 접하고 뛰어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신해창이 보란 듯이 진효섭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진효섭은 다소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만 눈이 빠르게 깜빡이는 건 미처 숨기지 못했으나 흥분한 안단테는 다른 데 신경이 쏠려 발견하지 못했다.
“본디지 파트너라고? 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안단테가 진효섭과 신해창을 번갈아 봤다.
“하, 하하. 이게 진짜 무슨 상황인지 도통 모르겠네.”
안단테의 주위에서 위험한 향이 넘실거렸다. 특유의 스모크 향에 분노가 배었다. 그 향을 맡고 있으려니 몸에서 열이 오르는 듯해 진효섭은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진효섭. 네가 설명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선명한 금빛 시선이 오롯이 진효섭에게로 향했다. 이글거리는 눈과 움찔거리는 입술.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모습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계속 상상했던 상황이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절대 물러나지 않을 터. 확실하게 의사를 말해야 했다. 막상 눈앞에 상황이 닥치니 차분히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진효섭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신해창과의 얘기는 추후 문제였다.
“……무엇을 설명하란 말입니까.”
“전부 다. 그날 어떻게 된 건지, 그동안 뭘 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네가 왜 지금 신해창 옆에서 나타났는지.”
“그걸, 전부 다 설명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냥 제가 안단테 에스퍼 곁에 있기 싫어서…… 그래서, 떠난 것뿐입니다.”
안단테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러나 진효섭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정해 놓은 답은 한번 입을 여니 줄줄 나왔다.
“저는 분명, 그때 제 의사를 전달했을 겁니다. 사직서도 전해 드렸고, 헤어지자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진효섭.”
“안단테 에스퍼. 저희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굳이 칭하자면 전 길드의 가이드, 전 애인 그 정도일 겁니다.”
아니, 그 정도도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저 이용하기 좋았던 서로의 힘과 상황이 얽힌 관계일 뿐일지도. 어쨌든 진효섭이 그날 어디로 갔든, 뭘 했든, 누구의 곁에 있든 안단테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은 고작 그 정도의 관계였으니까.
“하…….”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소 허탈해 보이는 표정이다. 혹은 초조함이 서린 것도 같았다. 진효섭으로서는 읽을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자신이 아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란 건 분명했다.
마치 평소와 반대 상황이 된 것 같았다. 항상 진효섭이 초조했고, 안단테는 느긋하기만 했는데. 새삼 씁쓸함을 곱씹으며 진효섭이 말을 끝맺으려 들 때였다.
“……누구 맘대로.”
안단테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누구 맘대로, 네가 다른 에스퍼 곁에 있어.”
“그러니까-”
“전? 내가 널 놓을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전이라는 말을 붙여.”
다시 한번 안단테가 진효섭의 팔을 잡아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한 손힘이었다.
“웃기지 마. 그 어떤 누구도, 내 유일한 가이드를 뺏어 갈 수는 없을 테니까.”
안단테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진효섭을 주시했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넌 내 가이딩을 담당할 수 있는 유일한 가이드야. SS급 에스퍼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가이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 게 무슨…….”
“내가 손을 대지 않더라도, 세상이 그렇게 만들 거라는 뜻이야.”
진효섭의 눈이 흔들렸다. 안단테가 하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해 버렸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인 안단테. 폭주하면 엄청난 피해가 생길 SS급 에스퍼를 안정시킬 유일한 가이드라 소문난다면, 그 어떤 단체와 나라가 진효섭을 보호할까. 모두가 진효섭 한 명보다는 다수를 위한 선택을 하리라.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 하지만, 국가안보국은-”
“신해창? 우습지도 않지. 고작 그놈이 어떻게 날 막는다는 거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기를 알기에.
“절대 안 돼. 가능할 리 없지. 나는 이제 널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거야. 넌, 내 거야.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안단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집착이 가득 묻은 몸짓과 달리 진효섭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상하게 슬펐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 네가 없는 시간을…… 나는,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꺼질 듯, 무너져 내릴 듯 낮아졌다. 그 모습에 진효섭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에 갈팡질팡했다. 분명 소름이 끼치는 집착이다. 그런데, 뭔가…… 마음이 술렁이고 머리가 복잡해 이상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신해창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쉽게도 네 생각대로 될 리는 없을 거다. 내가 준비를 잘해 뒀으니까.”
안단테의 어두워졌던 표정이 거짓처럼 사라졌다. 불청객을 바라보는 듯 짜증스러운 시선이 신해창을 향했다.
“너 따위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명백히 아래로 보는 대답. 그러나 신해창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할 수 없지. 하지만 네 가이딩을 유일하게 담당할 수 있는 진효섭 가이드는 또 다를 거다.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거든.”
신해창의 눈이 번뜩였다.
“S급인 진효섭 가이드가 SS급인 널 감당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게, 말이다.”
“신해창 에스퍼, 그건-”
진효섭이 상성에 대해 말하려고 들자 신해창이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안단테를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심지어 이번 네 폭주를 막은 것 역시 진효섭 가이드지. 상성이 좋다는 말로만 넘기기에는 다른 에스퍼와의 가이딩 역시 뛰어나다. 확실히 차별화된 느낌이 있어.”
“…….”
“SS급 가이드의 기준은 아노 가이드였다. 네가 그랬듯,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가이딩 능력만으로 기준을 삼으면 진효섭 가이드가 다른 가이드보다 현저히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인데.”
거기까지 말했는데도 말뜻을 알아들은 건지 안단테가 눈을 크게 떴다. 그를 마주 보는 신해창이 미묘한 미소를 띠었다. 얼핏 승리를 예감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SSS]에 진효섭 가이드의 등급 상향을 제안할 예정이다.”
순간, 좌중이 술렁였다. 놀란 건 진효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혀 들은 바가 없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SS급이라니…….’
그 정도로 대단한 능력은 없었다. 그저 안단테와 상성이 잘 맞는 것뿐인데 대체 어떻게.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신해창은 준비한 것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진효섭 가이드의 능력 측정 기록은 어릴 때 처음 받았던 것이 다였더군. 그래서 다시 한번 검사했다. 예상대로라면 그 측정 지수는 다른 가이드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흠.”
신해창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군.”
“…….”
“물론, 너와 완전히 돌아설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진효섭 가이드를 통제하에 둘 수 있다는 말이 되진 못할 테지.”
SS급으로 상향되면, 진효섭은 더 이상 안단테의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닐 테니까. 엄밀히 말해, 이제 그는 진효섭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