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66화
진효섭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온전히 믿어지지 않아서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가능성만으로 자리를 박차고 돌아가기에는 당장의 발밑이 너무 불안했다.
“진효섭 가이드.”
“……예.”
“유진은 잘 지낼 테니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진효섭에게 재차 단언했다.
“이미 결정한 이상, 물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안단테의 앞에서 이렇게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지어서도 안 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마음을 굳게 다지십시오.”
그러곤 진효섭의 팔을 본인의 팔에 얹었다. 아까보다 한층 더 친근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효섭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물론, 마음이 불편하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면 몰라도,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죄송, 합니다.”
감사보다는 사죄가 먼저 나왔다. 신해창의 말은 모두 이성적이고, 옳았던 탓이다. 진효섭은 이미 안단테에게서 등을 돌렸고, 신해창과 손을 잡았다. 이미 결정한 일. 선택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 이리저리 휘둘려서는 주위에 민폐를 끼칠 뿐이다.
게다가 내심 이 길뿐이라 생각해서 했던 선택이지 않나. 더는 안단테에게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가이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이상, 더 확고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의 집착에 괴로워질 미래만이 있을 테니까.
잠시 후, 두 사람은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양쪽 문을 천천히 열자 드넓은 홀이 보였다. 커다란 샹들리에는 눈부셨고, 빛을 받은 대리석을 타고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진효섭은 멍하니 내부를 둘러봤다. 적당한 규모를 생각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화려했다. 과하게 멋을 낸 모습에 걱정했건만, 그럴 필요 없었다. 평소처럼 하고 왔으면 오히려 더 튀었을 장소였다.
“가시죠.”
신해창은 진효섭을 능숙하게 이끌었다. 뚜벅뚜벅. 대리석에 구두 굽이 닿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꽂히는 시선이 적나라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고정한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신경 쓰였지만, 진효섭이 할 수 있는 건 덤덤한 표정을 가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내, 신해창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홀의 중앙 소파 앞이었다. 모임에 온 이상, 한번은 스쳐 지나갈 만큼 눈에 띄는 자리였다.
“앉으십시오. 국가안보국 자리입니다.”
진효섭이 난감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가장 눈에 띄는 자리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원래, 지정석이 있는 모임인가 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말하지 않아도 정해지는 것들이 있잖습니까. 그것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그를 향해 고개 숙인 신해창이 보이지 않도록 오른쪽을 슬쩍 가리켰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꽤 가까이서 들려왔다.
“가장 오른쪽, 이 모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인맥이 많은 길드가 차지합니다. 여러 길드에 도움을 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길드죠.”
그의 말대로 오른쪽에는 한 층 턱이 있는 낮은 단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몇몇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가이드 하나에 에스퍼 셋. 나른한 표정에 살짝 치켜올린 턱 끝이 그들의 위치를 알려 주는 듯했다.
이어서 신해창은 왼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왼쪽,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많이 끼치고 있는 길드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진효섭도 몇 번인가 듣고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앙. 모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길드가 차지합니다. 우리 국가안보국이 근 2년 사이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말처럼이나 오른쪽과 왼쪽, 강인해 보이는 길드가 모두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놓고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흘끔거리는 시선을 미루어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홀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지던 시선이 착각이 아니었다.
신해창은 너른 소파로 진효섭을 이끌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같은 소파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게 됐다. 신해창은 꽤 기분 좋아 보이는 낯으로 나른하게 앉아 뻣뻣한 진효섭을 바라봤다.
“그럼 저기, 노아피는…….”
진효섭의 입술이 간헐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충분히 물어볼 만한 질문이었으나, 꼭 관심을 가지는 모양새로 비칠까 봐 머뭇거리게 됐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신해창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궁금증을 풀어 줬다.
“노아피는 예외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들은 교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던전에만 있으니, 그들의 자리를 일부러 비워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건…… 지금 노아피가 오면 자리를 비켜 줘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진효섭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순간 움찔했다. 신해창이 기분 나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국가안보국이 노아피에 밀린다고 대놓고 지적한다 느껴질 법했으므로.
하지만 신해창은 또 예상을 어긋난 반응을 보였다. 그가 흔쾌히 대답했다.
“예. 맞는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괜찮습니다. 타당한 말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신해창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여전히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아직 세상은 첫 번째가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절대로 첫 번째를 차지하지 못할 거라며 국가안보국을 은연중에 불쌍하다고도 보더군요.”
“저는 그런 뜻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저는 그래서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디, 모든 상황은 고난과 역경이 함께해야 더 빛나지 않습니까.”
미소에 묘한 열기가 서렸다.
“그렇기에 많은 이야기에는 악역이 존재하는 겁니다. 지나고 보면, 오히려 극적이리만큼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될 테니까요.”
아주 묘한 말이었다.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의문스럽게 둘러 표현했지만, 진효섭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신해창 에스퍼는, 1위를 차지하고 싶으신 겁니까?”
“예.”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숨기고자 하는 기색 따위는 없었다.
“누구나 위를 노리지 않습니까. 저 역시 그럴 뿐입니다.”
타당한 이유다. 반박할 이유도, 이상하게 볼 이유도 없다. 그러나 신해창은 그저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한 극적인 결과가 마치 눈앞에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 돋보였다.
‘분명 그는 등급이 곧 권력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국가안보국이 안단테를 치고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S급과 SS급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왜 반드시 꺾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걸까. 안단테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하지만 안단테의 상태는 언젠가 좋아지기 마련이다. 진효섭의 가이딩만 있다면 분명…….
‘아.’
깨달음을 얻은 듯 진효섭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공교롭게도 안단테의 상태를 좋게도, 좋지 않게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국가안보국의 소속이 됐다. 신해창의 장담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진효섭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날……. 그런 거였구나.’
언제나 정의롭고 덤덤하게만 보이던 신해창의 속내를 처음으로 엿본 듯했다. 신해창의 목표는 처음부터 안단테를 향해 있었다. 진효섭이 마음에 들어서 돕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던 거다. 그의 머릿속에는 안단테가 있었다. 좋은 감정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진효섭 가이드.”
갑작스러운 부름에 진효섭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가앉은 건지 신해창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놀란 진효섭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등을 단단하게 받친 신해창의 손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에 진효섭이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옵니다.”
신해창의 속삭임에 무엇이, 라는 물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곧이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커다란 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쾅-! 삐걱거리는 문 너머 엄청난 존재감이 드러났다. 입구부터 시작된 작은 술렁거림이 순식간에 커졌다. 홀에 은은하게 퍼진 클래식을 단번에 잡아먹을 정도였다.
뚜벅, 뚜벅,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미리 말을 맞춘 양 갈라섰고, 그 사이로 안단테와 오랜만에 보는 노아피의 길드원 몇 명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거침없이 걷던 안단테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 효섭……?”
분명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걸 텐데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느새 술렁거림이 잦아들었다. 주위에는 잔잔한 클래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조용해진 홀에 침묵이 잠식했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진효섭 역시 그 침묵에 동조하듯 숨소리를 낮췄다. 이윽고,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 안단테가 진효섭 앞에 당도했다.
“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이 진효섭을 내려다봤다. 갈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진효섭은 그를 가까이에서 보자마자 안도해 버렸다.
‘이제…… 괜찮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