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51화
“그, 제 고향에 한국인 가이드가 있어서 생각났을 뿐입니다. 한국어도 원래 연습하긴 했는데, 그 형한테 회화도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경어 부분이요! 형이 다·나·까를 아주 잘 썼습니다!”
존댓말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아주 잘 배우고 오게 돼서 다행이라며 테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해창의 표정은 아까보다도 더 오묘해졌다.
“……한국인 가이드?”
테디의 고향은 한국과 정반대 대륙에 있다. 그런데 그런 곳에 한국인이, 그것도 가이드가 산다는 게 신해창은 유독 이상하고 거슬렸다.
“조금 드문 일이군요. 가이드가 그런 시골에 있다니.”
“들어 보니, 등급이 낮아서 그냥 시골 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등급이 낮은 가이드는 대우가 별로 좋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신해창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론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거짓말이군.’
그따위 것이 마땅한 대답이 되질 않는다는 걸 테디는 모르는 듯하지만, 신해창은 바로 눈치챘다. 낮은 가이드는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시골에 틀어박혀 산다? 대충 뱉은 변명에 불과했다.
일반인들이야 그럴듯하게 들릴 테니 넘어가겠지만, 조금이라도 에스퍼나 가이드 생활을 해 봤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가이드가 등급에 따라 대우를 받는다는 건 사실이지만, 낮은 등급의 가이드가 대우받지 못한다는 건 아니므로.
가이드는 에스퍼보다 현저히 숫자가 떨어지기에 낮은 등급이라고 해도 가이드면 다 좋다는 길드가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특히 한국이라면 더욱더 편했을 것이다. 서양권과 달리 보수적이라 무분별한 가이딩을 요구하는 일도 적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범죄자인가.’
아무리 하급 가이드라고 해도 그런 곳에 박혀 있다면 그것밖에 없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가이드. 신해창은 현상 수배 중인 한국인 가이드 몇몇을 떠올리며 테디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가이드, 이름이 뭡니까?”
“아, 그게…….”
테디가 한 번 더 고민하듯 말을 끌었다. 그러나 대답까지는 길지 않았다.
“JIN입니다.”
순간, 신해창이 걸음을 멈췄다. 어떤 상황이든 표정 하나 쉬이 흐트러지지 않던 신해창이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평상시 그를 알던 사람이라면 놀랄 일이었지만, 처음 보는 테디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JIN이라고요.”
“네? 네.”
“남자입니까?”
“네.”
“검은 머리입니까?”
“그거야 한국인이니까…… 그렇습니다?”
테디는 의아했다. 형이라고 했으니 남자고, 한국인이니 특별히 염색한 게 아니라면 색색의 머리카락을 가졌을 리 없다. 모두 특별하지 않은 물음이고, 당연한 대답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오랫동안 말을 잇지 않고 멈춰 섰던 신해창이 잠깐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신해창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떠오른 의문이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었음을 알아차린 탓이다.
진효섭은 BETEL의 가이드였던 시절, J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그래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에 남자, 가이드, JIN. 하나같이 진효섭을 가리키는 조합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흔한 특성일 뿐이었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 봐야겠군.’
진효섭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알아본 바로, 그는 던전에 들어간 게 확실하고, 살아 있지 않을 확률이 극히 높았으므로.
그래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었다. 굳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 숨어 있는, 도망친 가이드. 범죄자로 추정되는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신해창은 곧바로 손에 든 휴대폰으로 직속 비서직 에스퍼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테디의 고향에 있다는 한국인 에스퍼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문자였다.
* * *
남아메리카 전역에 긴급 명령이 떨어졌다.
[남아메리카 전역에 사는 사람 모두, 다른 나라로 피신할 것을 권고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는 언제나 활기차던 바뇨스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아르헨티나에 생긴 변형 게이트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전부를 통제하겠다는 말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사람들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긴급 비자 발급이라든가 보상금 등. [SSS]가 내린 결정이기에 준비는 철저했지만,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특히 바뇨스에 사는 어르신들은 혼란의 정도가 더했다.
남은 생을 바뇨스에서 보내려던 사람들에게 남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적응하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바뇨스에는 곧장 이민 준비하는 사람이 반, 죽더라도 여기서 살겠다는 사람이 반이었다.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에는 티나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마침, 테디가 국가안보국에 들어갔으니 한국으로 이민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반면, 진효섭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난감해졌다. 떠날 장소는 여러모로 알아봤다. 적당한 곳도 발견했고,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방법이었다.
현재 [SSS]는 남아메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원활하게 갈 수 있도록 각 지역에 이동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하지만 게이트를 지나기 위해서는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데, 진효섭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동 게이트가 있는데 굳이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이동하려고 들면 쓸데없이 시선을 끌지도 몰랐다. 즉, 진효섭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에콰도르에 남아 있는 것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말고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기를 선택했기에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티나 가족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진. 정말로 같이 안 갈 생각이야?”
셀레나의 걱정에 진효섭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험하면 어쩌려고 그래. 테디한테 들어 보니까 그냥 겁주는 말이 아니래. 남아메리카 전역이 위험하다고 했어. 변형 게이트가 아르헨티나에서 열릴 거고, 그 크기에 따라 여기까지도 피해가 넘어올 확률이 높다고.”
이전, 진효섭이 한국으로 함께 떠나지 않겠다는 말에도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하던 셀레나가 이번에는 진효섭을 설득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이게 얼마나 이상한 결정인지 진효섭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동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도 껄끄러운데, 국가안보국이 열어 둔 한국으로 향하는 포털은 더욱더 탈 수 없었다. 자칫하면 진효섭을 알아보는 에스퍼가 있어 안단테에게까지 들킬 확률이 너무나도 높았다.
“정말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스운 변명이었다. 셀레나 역시 억지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에콰도르인의 절반이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데,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거기다 일생을 보냈던 이들이면 몰라도,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진효섭이 며칠 뒤면 쑥대밭이 될지도 모르는 농사를 신경 쓰는 건 이상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걸 알면서도 진효섭은 이런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셀레나는 곧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정이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긍정과도 같은 대답이었다. 셀레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행객도 아니면서 맨몸으로 이런 소도시에 와서 농사일하는 가이드. 사정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진짜 위험하니까. 꼭 다시 생각해 봐. 응?”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효섭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을 셀레나도 느꼈기에 그녀는 또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멀리서 티나가 커다란 가방을 멘 채 뛰어왔다.
“엄마!”
티나는 곧바로 셀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셀레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티나를 안았다.
“준비는 다하고 나왔어?”
“응! 우리 그럼 완전히 한국에서 사는 거지?”
“응. 그렇게 됐어. 이삿짐도 오늘 다 옮길 거야.”
“와, 신난다! 테디가 그러는데, 한국은 인터넷이 엄청 빠르대. 미드 보려고 한참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지 뭐야.”
“그래도 미드는 하루에 세 편 이상 못 보게 할 거야.”
“우씨.”
티나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뾰로통한 표정은 진효섭에게로 시선이 옮겨지자마자 바뀌었다.
“아, 맞다. 진. 우리 그럼 같이 가는 거야? 여기 사람들 다 나가야 한다며!”
금세 반짝이는 눈빛을 되찾은 티나가 진효섭을 빤히 바라봤다. 다시금 난감한 질문을 받게 된 진효섭이 뺨을 긁적였을 때였다. 셀레나가 그를 도와줬다.
“티나. 진은 잠깐 여기 있다가 미국으로 간댔어.”
“어? 정말? 왜? 한국으로 같이 가면 안 되는 거야?”
진과 떨어진다는 게 영 섭섭한지 티나가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진은 한국에서 잠깐 떨어져 있고 싶은가 봐. 미국에 좀 있다가 한국에도 오고 그러겠지. 아니면 우리가 미국으로 놀러 가도 되고. 안 그래?”
셀레나가 티나 몰래 진효섭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미국으로 간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둘러대 준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건 그래도…….”
티나는 섭섭한 기색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진효섭은 허리를 굽혀 티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놀러 갈게, 티나.”
“진이 한국으로 오는 거야?”
“응. 나중에…… 아주 나중에, 네가 성인이 될 때쯤에는 놀러 갈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그럼 5년 뒤인가?”
진효섭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5년.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면 조금은 자유롭지 않을까. 그제야 티나는 환한 표정으로 진효섭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상상하는지 눈동자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