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50화
“나도 한국 간다! 야호!”
그제야 진효섭은 만약 테디가 국가안보국에 붙으면 티나 또한 한국에 가기로 했던 것을 떠올렸다. 동시에 티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진효섭을 올려다봤다.
“진도 당연히 같이 갈 거지?”
“……나?”
“응!”
진효섭은 잠깐 침묵하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나는 못 가.”
“어? 왜?”
“……수확 시기잖아. 할 일은 해야지.”
“에이. 대신해 줄 사람 많잖아.”
“아냐. 그래도 힘쓰는 일은 내가 해야 해. 다들 허리가 안 좋거든.”
티나의 표정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짧게도 안 돼?”
“응. 미안.”
생각보다 단호한 태도에 티나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유가 확실해서인지 더 보채지는 않았다.
“그럼 어쩔 수야 없지만…….”
“대신 내가 한국에서 즐길 맛있는 음식 같은 거 적어 줄게.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맛있었던 음식집 같은 건 있었거든.”
“정말? 좋아!”
티나 역시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터라 다행이었다.
“꺄! 지금 바로 집에 가서 짐 싸야지!”
“벌써?”
“응. 엄마가 오신다고 했거든!”
환히 웃은 티나가 쏜살같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진효섭은 그런 티나를 뒤따라가기 위해 분홍색 고무장갑을 벗었다.
“기다려 봐. 내가 데려다줄게.”
“아냐, 진은 이 뒤에 또 일 있잖아! 여기는 내 구역이니까 쉽게 갈 수 있어. 그럼 나중에 밤에 봐, 진!”
“그래도-”
“간다!”
진효섭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티나가 문을 열고 나섰다. 달칵,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식탁 위에는 티나를 위해 준비한 초코 머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혼자 먹어야겠네.”
그는 설거지를 마무리한 후 작은 포크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포크는 쉽게 머핀을 향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탓이다.
‘테디가 국가안보국에 붙었다면 저번에 말하려다 말았던 것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텐데.’
국가안보국은 진효섭과 인연이 닿았었다 보니 정말 운이 나쁠 경우 이곳에 숨어 있단 걸 들킬지도 모른다. 마침 신해창은 BETEL 길드에서 활동했던 진효섭의 과거를 알고 있다. JIN이라는 코드네임 역시 알고 있으니 혹시라도 정체를 유추할까 불안했다.
물론, 바쁘디바쁜 신해창이 일개 신입 에스퍼와 시시콜콜 고향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해창은 필요한 말만 하는 타입의 철저한 인간이고, 하루에 한 번 마주하기도 어려울 만큼 바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진효섭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파가 유독 잘 터지지 않아서 비어 있던 집이다 보니 문자나 전화도 광장까지 걸어가야 가능했다. 그 덕분에 드문드문 치솟는 궁금증을 내리누르기 쉬웠으니 불편하진 않았다.
고민하던 진효섭은 결국 광장으로 나갔다. 전파가 통하자 잠잠했던 휴대폰에 불이 들어왔다. 테디의 이름이 화면 위로 떠 올라 있었다.
[-TEDDY-]
장문의 문자였다. 눌러 확인해 보니, 국가안보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와 한국은 너무 좋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쭉 읽어 보던 중 타이밍 좋게 테디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진!
“테디.”
-문자 봤어? 나 국가안보국 합격했어!
“응, 봤어. 축하해.”
-엄청 대단한 거야! 계약직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내가 미성년자라서 그런 거지, 성인만 되면 정식 길드원이 될 것 같아!
잔뜩 들뜬 목소리에 진효섭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하네. 테디.”
-고마워.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나에게도 이렇게 해가 뜨네.
배웠던 속담까지 야무지게 써먹는 테디에게 진효섭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근데…… 테디,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부탁? 뭔데?
진효섭은 손톱을 문지르며 망설이다 끝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내 얘기는 하지 말아 줘. 예전에 살던 곳에 가이드가 있었다든가, 한국인이었다든가…….”
-응? 그건 왜? 여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움찔한 진효섭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응. 그…… 비슷한 이유인데, 아는 사람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아서……. 자세한 건 만나게 되면 차근차근 얘기해 줄게. 아무튼 너한테도 별로 좋지 않을 테니까, 내 얘기를 꺼내지 말아 줘. 그게 어떤 거든.”
-음. 그래? 말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뭐, 알았어. 어렵지 않지.
진효섭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
-근데 진은 내일 티나랑 같이 한국에 올 거야?
“아니. 나는 못 갈 것 같아. 티나만 보낼게.”
-왜? 일이 많이 바빠?
“응. 조금…….”
-에이, 아쉽게 됐네. 같이 여행이라도 하려 했는데.
“미안.”
-아냐. 시간은 앞으로도 많은데 뭘. 다음에 내가 그쪽으로 한번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때 보자.
그때, 휴대폰 너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진효섭은 순간 숨을 죽였다.
-아! 나 가 봐야겠다. 오늘 단장님이랑 중요한 얘기 나누기로 했거든. 예! 단장님! 저 지금 갑니다!
다행히 테디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국가안보국의 단장이면 역시…….’
진효섭은 바뇨스에서 오랫동안 살려고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테디가 신해창의 길드에 들어간 이상, 계속 이곳에 머무는 건 몸을 숨기고 싶은 진효섭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특별히 가고 싶은 나라는 없고, 생각해 둔 방법도 없었지만, 차차 떠날 준비를 해야 할 필요성은 느꼈다. 기왕이면 적당히 외진 곳, 말이 통하는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부디 도망치듯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한편, 테디는 통화를 끊자마자 신해창에게 쏜살같이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괜찮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니 가면서 몇 가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신해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안내했다. 동시에 국가안보국의 일과 한 달에 채워야 하는 실적, 조건 몇 가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계약직이라지만 일반 길드원과 다를 바 없었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현재 한국에는 B급과 S급 던전만 존재합니다. 디버프 계열 에스퍼는 S급 던전을 드나드는 것도 괜찮겠지만, 지금 테디 에스퍼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맡게 되는 던전은 B급 이하뿐이라는 걸 알아 두십시오.”
“어…… 그건 혹시, 제가 에스퍼로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신해창은 고개를 저으며 테디를 흘끔 바라봤다. 열아홉 살. 아직 미성년자의 티가 났다. 외모처럼 능력을 다루는 것 역시 미숙하겠지.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들였다고는 하나, S급 던전에 바로 투입되기에는 위험했다.
“한국에는 성인이 되지 않은 에스퍼는 S급 던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율이 있습니다.”
“어…… 그런 게 있습니까?”
“예.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은 원래 미성년자를 길드에 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특이 케이스로서 계약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해서, 계약은 하되 그 규율만큼은 확실하게 지키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아, 예! 상황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군요!”
테디는 환한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역시나 운이 너무 좋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S급 던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A급 에스퍼. 심지어 지켜야 할 규율도 많다. 어딜 어떻게 봐도 국가안보국에서는 굳이 그를 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입단이 가능했다.
테디는 지금이 비상시라는 건 알고 있으나, 정확히는 잘 몰라 그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의 기색이 잘 느껴졌기에 신해창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에스퍼에게 차차 들으라고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어쩐지. 그래서 내가 붙을 수 없다고 말했구나…….”
한국 법에 대해 아는 자가 근처에 있었나? 신해창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합격 전 들으신 적 있는 내용입니까?”
“아, 네! 제 고향에 있는 사람이 국가안보국에 지원한다고 하니 미성년자는 길드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게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그 법안 때문에 그런 말을 했나 봅니다.”
에콰도르, 그것도 시골에 그런 걸 아는 자가 있다고.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든 신해창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자연스레 물었다.
“고향에 있는 이가 같은 이능력자입니까?”
“네! 가이드- 아.”
신나서 말을 이으려던 테디가 순간 멈칫했다. 말하지 말라고 진이 부탁한 게 조금 전이었는데. 인터넷으로만 보던 인기 있는 세계적인 에스퍼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흥분한 것 같았다.
테디가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리자 신해창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뇨. 그게…….”
난감한 표정으로 테디가 뒷머리를 긁었다. 이미 가이드라 말한 게 있어서 갑자기 입을 다무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진은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냐는 물음에 긍정했다.
‘진은 가이드니까, 사이가 안 좋은 아는 사람이라면 같은 가이드겠지? 그럼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가 안 좋을 리 없을 거란 어린 생각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또 설사, 아는 사람이 에스퍼라고 해도 국가안보국의 길드장인 신해창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퍼뜨리고 있는 인물로, 낮은 등급의 가이드와 엮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래, 진과 단장님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 괜찮겠지.’
곰곰이 궁리하던 테디는 결국 편하게 생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