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41화
느긋한 오후. 일찍이 농사일을 끝낸 이들이 새참을 먹기 위해 삼삼오오 모였다. 아저씨 무리가 뒤늦게 일을 끝낸 진효섭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어이, 진! 여기야!」
「예.」
「수고 많았어.」
진효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전 일이 끝나면 갖는 가벼운 새참 시간이었다. 저번에는 피쉬 파테였는데, 이번에는 빨간 딸기가 놓여 있었다. 진효섭은 동네 주민이 건네는 딸기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진도 스페인어 많이 늘었네. 이제 우리랑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잖아.」
「예. 전부 다 티나 가족 덕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언어에 재능이 있나 보네. 대단해.」
「감사합니다.」
이제 대충은 알아듣는 말에 진효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직접 부딪혀 가며 배우니 생각보다 더 빠르게 익히게 됐다.
스페인어는 영어와 비슷한 점도 있었지만, 예전에도 이렇게 영어를 배웠기에 더 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뭐든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쉬운 법이니까. 무엇보다 여가 시간에 할 게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것보다 진, 너도 그 소식 들었어? 지금 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는 일 말이야.」
소식이라는 단어에 진효섭은 눈을 끔뻑였다.
「소식? 뭘 뒤집습니까?」
「세계가 뒤집혔지. 아르헨티나에 비정상적인 게이트가 나타났거든.」
아르헨티나. 비정상적인 게이트. 단편적인 단어로도 진효섭은 눈치껏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말입니까?」
진효섭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 난리도 아니야. 특히 아르헨티나는 알다시피 위험한 곳이잖아. Argentina. Dangerous. 알지?」
「예.」
아르헨티나가 위험한 곳이라는 건 진효섭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탓에 관광지였던 이곳을 비롯해 남아메리카 나라들의 인구수가 절반으로 줄 정도였다.
게이트가 유독 많이 생기는 나라. 그래서 30년 전까지는 떨어지는 재화가 많았기에 여러 국가의 부러움을 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수십 개의 게이트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아르헨티나는 금방 황폐해졌다. 한국으로 따지면, 곡성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나라 전체가 침체됐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졌다. 진효섭이 바뇨스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곡성 주변이 그러했듯 아르헨티나 주변국 역시 사람이 살지 않고, 노인과의 생활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행히도 그 선택은 정답이었다.
「그 아르헨티나에서 변형 게이트가 나타났는데, 글쎄 사람들을 제멋대로 끌어당긴다던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잠도 못 자고 있다잖아.」
「……안으로 끌어당긴단 말입니까?」
「그래. 게이트에서 손 같은 게 나와서 주위의 생명체들을 콱, 잡아간대.」
몸짓과 함께 이어지는 설명에 진효섭의 눈이 커졌다. 역시 진효섭이 봤던 것과 유사했다. 남자는 놀란 진효섭을 두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듣기만 해도 무섭다니까. 그래도 아르헨티나에 생겨서 다행이야. 거긴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까. 다만…… 그게 다른 지역에 생기면 어떡하냐의 문제로 [SSS]가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다더라고.」
「맞아. 맞아.」
가만히 듣던 동네 주민들이 딸기를 베어 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한 번 변형 게이트가 생겼으니 또 다른 변형 게이트가 생길 것도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 생명체를 끌어당기는 게이트 말고 다른 건 또 어떤 게 생겨날지……. 하아, 걱정스럽다.」
「동감이야. 솔직히 에스퍼들이야 익숙하겠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이런 게이트가 생길 때마다 피해가 크잖아. 어느 신문에서는 게이트가 하나 생길 때마다 일반인 1,000명에게 피해가 가고, 평균적으로 세 명이 죽는다더라. 변형 게이트는 얼마나 더할지…….」
주민들의 얼굴에 미약한 두려움이 비쳤다. 아르헨티나와 한 대륙이라 그런지 더욱더 걱정될 수밖에 없는 듯했다.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자 그중 그나마 젊은 남자가 가볍게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뭘 그렇게 걱정하고들 그럽니까? 지금 그 이형 게이트를 맡은 게 SS급 에스퍼가 있는 노아피 길드인데.」
「아, 맞다. 그랬지?」
하나둘 굳었던 표정이 펴졌다. SS급 에스퍼를 향한 믿음이 커 보였다.
「지금도 세상에 있는 던전이라는 던전은 죄다 깨고 다닌다는데, 변형 게이트라고 뭐 다르겠어요? 그냥 하루 만에 쓱싹-!」
「그 에스퍼 이름이 오웬이었지?」
「지금은 안단테라는 이름으로 바꿨대요. 그리고 오웬 때보다 더 유명해졌죠. 이름 앞에 괴물이라는 말도 붙고.」
「으음,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좀 무섭긴 하잖아.」
너도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까 그 무서운 괴물이 우리 편이라는 게 다행이네.」
「그러니까요.」
진효섭은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예상치 못한 안단테의 소식과 함께 들려온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무서운 괴물……?’
분명 안단테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스페인어에 능숙하지 못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어째서 안단테를 그렇게 부르는 걸까. 진효섭이 기억하는 한 그는 모두에게 찬양받는 인기인이었는데.
‘하나같이 그를 우러러봤는데 왜…….’
바뇨스에 오고부터 진효섭은 에스퍼나 가이드의 일에는 의식적으로 귀를 닫았기에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진효섭은 오랫동안 손에 쥐고만 있던 딸기를 입안에 넣었다. 손끝이 조금 붉어진 듯해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궁금증이 샘솟았다.
물론 진효섭은 의문을 곧장 내리눌렀다. 무슨 일이 생기든 에스퍼와 관련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은 죽을 때까지 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도 절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잠자코 딸기를 씹어 넘기고 있으려니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네. 다시 일하러 가 볼까.」
「좋습니다.」
「네.」
진효섭도 그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기 위해 진효섭은 한층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그가 하는 일은 단조로웠다. 노인이 많은 시골이었기에 많은 이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기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진효섭은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대신 옮겨 주는 일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에 흠뻑 젖기 일쑤였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새카맣게 타기도 했고.
하지만 진효섭은 만족했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쉬웠으므로. 밤에도 잠이 더 잘 왔고, 힘들게 일하고 먹는 간식은 꿀처럼 달콤했다. 도시에서 먹는 예쁜 디저트가 아닌, 자연에서 나는 과일이나 투박한 음식들이었지만 행복했다.
그렇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겨울을 지나, 새해를 앞뒀다.
* * *
“단장님. 정보 얻어 왔어요.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선 플랫이 미묘한 표정으로 안단테를 훑었다. 던전도 다 돌았겠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는 겸 생각 정리하기를 바랐는데 안단테는 그가 정보를 얻으러 가기 전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플랫이 내심 한숨을 푹 쉬자 늘어져 있던 안단테가 나직하게 말했다.
“말해.”
“……진효섭이 JIN이라는 외국 이름으로 움직인 거 맞아요. 그리고, 단장님이랑 통화 후에 바로 뒷세계와 근접한 곳에 있던 고물상에게 갔더라고요. 그 고물상은 여러 가지를 파는데-”
“뭘 샀는데?”
안단테가 냉큼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빛냈으나 플랫은 그의 기대와 달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산 게 아니라, 맡겨 놨던 것을 가지러 온 것뿐이라고 했어요. 그 고물상, 물건을 맡아 주는 일도 하더라고요.”
“무슨 물건인지는 알아봤어?”
“고물상도 모른대요. 손님이 맡긴 걸 뜯어보지 않는다고. 대신 원통형 물건이었는데, 손가락 하나로 들어 올릴 정도로 가벼웠대요.”
곰곰이 생각하던 안단테가 소파를 툭 두드렸다. 이윽고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능력이 담긴 아이템 종류인가 본데.”
“그건 모르죠.”
“아니. 확실해.”
진효섭은 분명 안단테와 전화를 끝낸 그때, 당황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바로 전화를 끊어 버릴 정도로. 쫓기는 자가 제일 먼저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생각을 잇던 안단테가 중얼거렸다.
“그건 아마 몸을 보호할 물건, 아니면 도망칠 수 있는 데 도움을 주는 물건이겠지. 예를 들어…… 이동 게이트 좌표를 생성할 수 있다든가.”
안단테는 문득 진효섭의 과거를 떠올렸다. 두 에스퍼가 죽고, 진효섭은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다. 그때 필요했던 것이 도망칠 방법과 몸을 보호할 물건이었을 터. 그가 한국에 들어온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추측에 힘을 불어넣었다.
“둘 중 하나. 무조건 가지고 있었을 거야. 지금 상황과 맞는 건…… 후자겠지?”
이동 스크롤로도 불리는 좌표 아이템. 노인이 했던 말이 거짓이라면 딱 맞아떨어진다. 던전에서 진효섭을 찾지 못한 것도, 다른 던전에서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 안단테와 달리 플랫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던전에서 진효섭의 가방을 발견했다면서요. 그것도 괴물한테 반쯤 먹힌 가방을.”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예요.”
플랫이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진짜 진효섭이 던전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잖아요. 그렇다면 진효섭이 능력이 담긴 물건을 소지했었다 해도 사용하지 못해요. 특히, 이동 스크롤이라면 더더욱 그러겠죠. 단장도 알잖아요.”
기본적으로 던전 안에서는 또 다른 이동 포털을 열 수 없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죽는 에스퍼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해질 시 스크롤을 찢고 나오면 그만일 테니까.
하지만 던전 내 이동 아이템 사용은 불가능했다. 던전에 들어간 이상, 나오는 방법은 기존에 형성된 게이트를 찾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단테의 추측은 그저 진효섭이 죽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서 애써 상황을 꿰맞춘 것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