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38화
“어휴, 그렇게 웃지 마. 진짜…….”
“응.”
“아니, 진짜 웃지 말라는 게 아니라.”
당황하며 손을 내젓는 티나의 모습에 진효섭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티나도 함께 소리 내 웃었다. 정말 따스하고, 평화로운 한때였다.
“뭔가, 진은 첫인상이랑 좀 다른 것 같아.”
“어떻게?”
“그냥. 쓰러져 있을 때랑 눈을 떴을 때는 표정도 어둡고 그랬는데……. 피곤해서 그랬나 봐. 엄청 밝잖아.”
티나의 말에 진효섭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더 부드럽게 웃었다. 눈꼬리도 잔뜩 휜 채였다.
“다 티나 덕분이야.”
“핫, 정말? 내가 도움이 된 거야?”
“응. 엄청 많이……. 고마워.”
“헤헤. 별말씀을.”
티나가 코밑을 쓱 쓸었다. 역시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사실 티나 말고도 이 도시 사람 모두가 친절하고 좋았다. 한적하니 공기도 맑고,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이걸로 충분해.’
새삼 여기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다시 들었다. 그를 괴롭히던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게 됐다. 안단테가 마지막에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는 듣고 싶지 않았다. 진효섭은 그렇게 끝을 내고 도망치듯 바뇨스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조금도.
* * *
잔잔한 클래식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신해창은 약속 상대를 기다리며 방금 우린 차를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안단테가 얼굴을 비췄다. 신해창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몰골이 별로군.”
방금 던전에 다녀온 것 같은 모습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10분이나 약속 시간에 늦은 상대를 기다리지도, 저렇게 더러운 차림의 상대를 소파에 안내하지도 않을 신해창이었건만 이번에는 달랐다.
“앉지.”
“필요 없어. 본론만 말할 테니까.”
언제나 느긋하던 안단테는 없었다. 그는 잔뜩 날이 선 표정으로 신해창에게 다가왔다. 발자국마다 피가 묻어났다.
“신해창. 너, 진효섭의 과거를 알고 있다며.”
“그렇다면?”
“정보를 넘겨.”
제안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어투였다. 신해창은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삼키고서 대답했다.
“굳이 필요한가? 이미 너는 미국의 길드를 통해서 진효섭 가이드의 과거를 모두 알아봤을 텐데.”
이렇게까지 진효섭을 찾아 대는데, 그에 관한 정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신해창도 아는 것을 안단테가 놓쳤을 리도 없고. 하지만 안단테는 단호했다.
“상관없어. 다 아는 정보라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으니까.”
“철저하군.”
비록 다 아는 사실이라지만 티끌이라도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면 조금이라도 새로운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보를 요구한다는 의미였다. 철저한 점만큼은 전과 같았다. 물론, 몰골이나 기색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지만.
신해창은 초조해 보이는 안단테를 빤히 바라봤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확신했다. 진효섭이 안단테의 손에 없는 게 분명했다.
“진효섭 가이드가 던전 속으로라도 떨어졌나 보지?”
“그건 네 알 바가 아니고.”
“도와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개나 소나 던전 속 게이트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라서.”
국가안보국을 개나 소로 칭하는 안단테의 언변에도 신해창은 그다지 화내지 않았다.
“정보를 주는 대가는?”
“변형 게이트의 정보.”
“좋다. 보내 주지.”
원만한 거래였다. 특히나 신해창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거래. 그때, 안단테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
“뭐지?”
“진효섭이 BETEL의 가이드인 걸 네가 알아챘다는 사실을, 걔한테도 말했어?”
잠깐 말해도 되나 고민하던 신해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하. 그렇다면 이간질이나 협박도 영 없던 일은 아니었겠네.”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군.”
“그야 진효섭은 신해창, 네가 바라 왔던 가이드상이니까.”
그 말대로였다. 신해창은 오랫동안 진효섭 같은 가이드를 바라 왔다. 능력 좋고, 길드에 충성할 수 있으며, 우직한 모습에, 시키는 일을 잠자코 하는 가이드. 진효섭은 현 가이드 중에는 드문 타입인데다 신해창이 탐낼 성격이었다. 거기다 S급이기까지.
그의 욕심을 안단테가 완벽하게 파악한 듯했다. 신해창 역시 부정하지는 않았다. 진실이었으니까.
“글쎄. 진효섭 가이드는 내가 아닌 다른 에스퍼나 길드에서도 선호할 타입이라.”
아무리 불안정한 과거를 가졌다 한들 상관없었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전 길드인 BETEL의 일을 묻어 주겠다고, 그 대신 종신 계약을 하자며 계약서를 들이밀 길드가 널렸을 것이다.
신해창만 해도 진효섭 앞에서는 다르게 말했지만, 사실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는 가이드만큼 탐나는 건 없었다.
‘역시 아쉬워.’
안단테가 엮이지만 않았다면, BETEL의 전 가이드였다는 것을 알자마자 어떻게 해서든 놓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움을 다시금 곱씹고 있을 때였다.
“신해창. 한 가지 말해 줄게.”
안단테는 품에서 정보가 든 칩 하나를 신해창에게 던지며 말했다.
“효섭이한테 이간질했던 게 너든 유진이든, 둘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평생 후회하도록 해 줄 거야. 그냥 죽이지 않아. 국가안보국이라는 길드를 세상에서 지우는 걸로도 성에 차지 않을 거라고.”
싸늘함이 감돌았다. 짙은 안단테의 눈 밑이 유독 스산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그 대가를 확실하게 치르게 해 줄 테니까.”
켕기는 게 전혀 없지만은 않기에 긴장할 만한 경고였다. 하지만 신해창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유진이 이간질을 시도했다는 걸 알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그거, 마치 네게는 잘못이 없다는 듯한 발언인데.”
“뭐?”
“진효섭 가이드가 떠난 게 왜 죄다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신해창이 텅 빈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우리의 잘못이었다면, 진효섭 가이드는 널 만나기도 전에 떠났겠지. 하지만 진효섭 가이드가 떠난 건, 우리 길드에서 나서고도 한참 뒤였다. 널 만나고 나서였지.”
“…….”
“그건 결국 우리 탓이 아니라 안단테, 너 때문에 떠났다는 뜻 아닌가?”
처음으로 안단테가 신해창 앞에서 말을 잃었다. 멈칫한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고, 싸늘한 눈이 미약하게 떨렸다. 안단테의 당황한 모습이 신해창은 내심 신기했다. 저럴 수 있던 놈이었던가. 예전에는 그 누가 떠나가든, 그 누가 죽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놈이었건만.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는 건 좋지 않다. 진효섭이 떠난 건…….”
신해창은 안단테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오롯이 안단테, 너 때문일 테니까.”
이야기가 끝나면 곧장 떠날 듯이 굴던 안단테는 정작 자리를 뜨지 못했고, 느긋하게 있던 신해창이 그를 두고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안단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반면, 신해창은 처음으로 안단테에게 이긴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진효섭이 어떻게 됐는지 더 궁금해졌다.
‘정말 죽기라도 한 걸까. 아니, 사실 진효섭이 죽었다고 해도 저 반응은 이상하지.’
신해창은 이제껏 많은 죽음을 봐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에스퍼가 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본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에스퍼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안단테 역시 마찬가지다. 뒷세계에 오랫동안 소속됐던 만큼, 더 많은 범죄와 죽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거기다 전 가이드였던 아노,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다. 그가 진효섭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건 이상하기보다 신기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그는 동생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편안하게 웃었다. 그러다 보니 신해창은 그가 이제 어떠한 죽음에도 덤덤하리라 예상했었다.
‘대체 진효섭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안단테가 저렇게 망가지는 건지…….’
궁금증이 솟았다.
기실 신해창은 원래부터 진효섭의 일에 아닌 척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안단테가 말했던 것처럼 신해창이 원했던 인재였고,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가이드였으니까. 시험 삼아 가이딩을 받았던 그날,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진효섭을 국가안보국에 두기에는 안단테라는 방어막이 너무 견고했다. 그러던 와중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이야.
‘만약 지금 진효섭이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어쩌면, 그가 제 손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하던 신해창은 진효섭이 정말 던전에 들어간 건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확실하게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기왕이면 살아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가능하다면 안단테보다 먼저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언젠가 진효섭이 안단테가 아닌, 신해창에게 연락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심장이 제 존재를 알리듯 뛰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