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36화
‘빠르게 랭킹을 올릴 필요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잠도 자지 않은 채로 던전을 돈다는 건, 가이딩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는 의미. 폭주의 위험까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유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는 씩 웃으며 추리에 성공한 탐정인 양 손가락 사이에 턱을 괴었다.
“알겠다. 안단테 지금 진효섭 때문에 빡쳐서 그렇지? 아직 효섭이를 못 찾아서 그런 거잖아.”
신해창에게선 그렇다, 아니다, 하는 대답이 없었지만, 유진은 안단테가 진효섭을 못 찾았다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분풀이하듯이 던전을 깨고 다닐 리가 없으니까.
전에, 그러니까 안단테가 국가안보국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진효섭을 숨기고 있냐고, 아는 걸 다 말하라고 이를 갈아 대는데 안단테를 오래 봤다고 자부했던 유진이 놀라서 황당해할 정도였다.
‘뭐, 뭐야, 이 미친놈아. 효섭이를 왜 여기서 찾아?’
‘보나 마나 네가 이간질이나 했겠지. 찢어발기는 건 내일로 미뤄 줄 테니까, 나 없을 때 무슨 개소리를 지껄였는지나 말해. 어디로 보냈어. 역에서부터 CCTV에도 안 잡히던데, 너희가 추적이 안 잡히는 곳을 알려 준 거 아냐? 그게 아니면 그 근처에 있는 비공식 루트를 알 리가 없잖아.’
다다다 쏟아지는 물음들에 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고, 신해창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침묵도 견디지 못한 안단테가 유진을 잡아채려고 하자 잠자코 있던 신해창이 제 가이드를 지키듯이 가로막았다.
‘우리는 가르쳐 준 적이 없다. 떠났는지도 몰랐고.’
‘아니면, 신해창 너야? 네가 효섭이한테 뭘 지껄였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하지.’
‘효섭이를 탐내는 게 뻔하지. 욕심 많은 놈인 건 알았지만, 사리 분별조차 못 할 줄은 몰랐네. 랭킹이 오르고 승승장구하니까 욕심이 눈앞을 가리기라도 했나 봐?’
‘안단테.’
‘내가 진효섭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지, 언제 가이드로 쓰랬어. 누가 너보고 내 가이드한테 가이딩을 받으랬냐고.’
안단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국가안보국을 진창에 처박아서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아는 걸 다 말해. 진효섭이 떠난 장소, 그리고 이유까지. 조금이라도 켕기는 게 있다면 다 뱉어야 할 거야. 숨기는 기색이 있으면 받은 걸 토해 내는 걸로도 모자라 내장까지 뱉어 내게 만들 테니까.’
그는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다. 진효섭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야,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이야기였기에 국가안보국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단테가 주로 미국을 잡아 뒤졌었기에 이 정도로 필사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사라져 조금 짜증이 났겠거니, 그런 생각뿐이었다.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지만.
그리 이어지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깨부순 건, 신해창의 휴대폰이었다. 거기다 정말 운도 없게 전화를 한 건 진효섭이었다.
그날, 유진은 진효섭이 잡히지 않기를 바라며 소리 질렀지만, 솔직히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단테는 흥분한 상태로 받은 짧은 통화 중에도 진효섭의 위치를 대략 파악했으므로. 소름 끼치는 놈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곧 잡히겠구나 싶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맹해 보이기만 했던 진효섭은 의외로 도망치는 데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흥, 효섭이가 잘 도망쳤나 보네. 여하간, 잘됐다. 이게 다 자업자득이야. 가이드 중요한지 모르는 놈은 좀 당해 봐야 해.”
소규모 길드에 새로운 가이드를 들이지 않나, 본디지 파트너를 두고 아무리 가이드라 해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지 않나. 역시 안단테는 하반신이 가벼운 에스퍼였다.
그와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유진은 내심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기뻤다.
“잘한다, 진효섭! 역시, 내가 옆에서 이것저것 말해 준 보람이 있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안단테에게 한 방 먹인 듯해 기분 좋았다.
유진이 다시 침대에 늘어져 뒹굴뒹굴하며 웃자 신해창이 다가왔다. 침대 귀퉁이가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신해창이 누운 유진의 옆에 손바닥을 짚었다.
“유진.”
“응?”
유진이 신해창을 올려다봤다. 언제나 진지한 표정의 신해창이지만, 지금은 한층 더했다.
“말조심해야 할 거다. 특히 방금과도 같은 말. 필요 없는 화를 불러일으킬 테니까.”
“무슨 뜻이야?”
“안단테가 진효섭을 찾는 게 심상치 않아. 방금처럼 네가 진효섭이 도망치는 데 동조했다는 듯한 말은…… 어디에서도 하지 않는 게 좋다.”
무조건 안단테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다. 운이 나쁘면 진효섭을 찾는 안단테의 집착이 분노로 방향을 틀지도 모르니까.
또한 유진은 모르겠지만 신해창은 알고 있었다. 안단테는 이미 진효섭을 찾았다는 걸. 정확히는, 찾았었다. 그날 곧바로 위치를 확인했으니 진효섭을 만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왜 던전을 전전하는 걸까.’
신해창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침, 한국에 변형 게이트가 출현했다는 이야기로 주위가 소란스럽다. 게다가 그곳이 하필이면 진효섭이 있었던 곳이다.
‘……설마. 그래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군.’
어떻게 생각해도 진효섭이 그 변형 게이트로 들어갔다는 결론밖에 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안단테는 여러 던전을 휩쓸며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으니까.
게이트는 각각 달랐지만, 던전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안단테가 SS급 던전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안단테가 저토록 찾아다니는 건, 그 변형 게이트의 입구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해. 어째서 안단테는 진효섭이 게이트에 빠지는데도 보고만 있었던 거지.’
그럴 만한 상황이었던가. 아니면 그 정도로 변형 게이트가 독특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따라 들어가서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더 알아봐야겠군.’
무슨 이유든 새로운 변형 게이트의 출현은 특이점이 큰 만큼 문제가 될 것이다. 다른 길드만큼이나 신해창도 현재 나타난 변형 게이트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아직도 생각을 이어 가던 유진이 뒤늦게 대답했다.
“으음, 고작 몇 마디 한 거로 뭐가 무섭겠냐고 말하고 싶긴 한데……. 뭐, 그래도 조심하긴 할게. 매일 속으로 효섭이가 안단테를 잊고 잘살고 있기를 빌어야지. 그놈 애타게.”
유진은 여전히 즐겁게 웃었다. 진효섭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전혀 모르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사실을 말해 줄 수도 있었지만 신해창은 그러지 않았다. 잠깐 길드에 같이 있는 사이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졌다. 나름 친해진 이의 죽음에 대한 추측을 굳이 언급해 봤자 좋을 것은 없을 터. 판단을 끝낸 신해창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다.”
유진도 따라 이불을 몸에 감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게?”
“아니. 사무실에 볼일이 있다.”
“사무실? 오늘 휴일이잖아. 길드 다 쉬는 거 아니었어?”
“길드 일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일이 있어서.”
“넌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신해창이 쉬는 날에도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는 것을 자주 봐 왔기에 유진은 별 대꾸 없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손을 휘적거리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누워서 휴대폰을 마저 들여다보는 유진을 두고 신해창은 밖으로 나왔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자 안단테와 약속한 시각 10분 전이었다. 지금 가면 3분 정도 일찍 도착하게 될 테지만 신해창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미리 가서 기다려 줘야겠군.”
기다리는 데 시간을 쓰는 건 질색이지만, 이번 일은 그럴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에콰도르. 남아메리카에 있는 나라 중 하나. 그중에서도 중부, 안데스산맥 쪽에 바뇨스(Baños)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관광하기 위해 들렀던 곳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적어져 작은 시골에 불과한 도시.
그러나 아름다운 전경은 여전했고, 평화로운 동네라는 인식도 있었기에 몇몇 노인이 생의 끝자락을 조용히 보내고 싶어 바뇨스에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바뇨스는 젊은 층은 없지만, 50대 이상이 많고, 아이가 몇몇 있는 소도시가 됐다.
그런 바뇨스에 수십 년 만에 젊은 남자가 등장했으니. 갑작스레 떨어진 듯한 남자는 동양인에다가 스페인어도 못했지만, 일주일 만에 바뇨스의 인기인이 됐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이 드문 곳이었기에 인기인이 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남자가 젊은 데다가 듬직하니 잘생겨서 그런지 아이들에게 특히 더 인기였다. 그래 봤자 소도시의 유명인이었지만…… 어쨌든 바뇨스의 아이들에게만큼은 그 동양인이 세계적인 가수보다도 더한 인기인이었다.
「아우, 좀 나와 봐. 잘 안 보이잖아.」
「너나 비켜. 너 때문에 가리잖아.」
「아, 좀!」
「들키겠다. 너희 다 조용히 좀 해.」
삼삼오오 모인 여자아이들이 서로 눈을 흘기더니 다시 앞을 바라봤다. 아이들의 시선은 유명인이 된 젊은 동양인을 향해 있었다.
구릿빛 피부와 유난히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 착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크고, 턱선은 날카로웠다. 얼굴은 곱상해도 키는 훤칠하고, 적당히 벌어진 어깨가 매력적이었다. 매력에는 인종과 성별이 상관없다는 말처럼 차별조차 생각나지 않는 훤칠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