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꿀 발린 S급 가이드 (136)화 (136/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35화

“난 티나(TINA)! 오빠는 이름이 뭐야?”

“나는…….”

진효섭은 방금 정신을 차려서인지 몽롱한 정신으로 말했다.

“진(JIN).”

“진(JIN)? 그렇구나. 진!”

티나는 진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흔하디흔한 이름이었는데 마치 특별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티나의 뒤에서 인자해 보이는 여인이 나타났다. 선명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이었다.

“어머, 영어 가능했구나? 진짜 다행이다. 동양인 같아서 말이 안 통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난 셀레나(SELENA)야.”

옆에서 티나가 자신의 엄마라며 말을 덧붙였다. 진효섭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진입니다. 그런데, 여긴……. 제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겁니까?”

“아, 맞아. 내 정신 좀 봐.”

셀레나가 손에 든 트레이를 옆 협탁에 두고는 침대 근처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너 쓰러져 있었어. 저 위쪽 언덕에 덩그러니 누워 있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게다가 우리 집에 와서도 거의 3일 동안 깨지 않았다고.”

“맞아, 맞아.”

티나가 맞장구를 치며 셀레나를 따라 명치를 쓸어내렸다.

‘쓰러져 있었다고…….’

아이템을 찢고 생성된 게이트로 급하게 들어갔을 때부터 기억이 없기는 했다. 왜인지 들어선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그때를 멍하니 떠올리던 진효섭이 물었다.

“그럼, 여긴 에콰도르(Ecuador)입니까?”

“응? 그야 당연하지. 여기는 에콰도르야. 그중에서도 작은 도시인 바뇨스(Baños).”

대답을 듣자마자 진효섭은 안도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이 잘 사용됐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그 당시, 그러니까, 안단테가 던전에 들어간 직후 진효섭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었다. 그대로 아이템을 찢고 설정한 좌표로 간다면 그는 더 찾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진효섭은 전처럼 주춤대다가 다시 붙잡히고 싶지 않았기에 곧장 노인에게 보석을 쥐여 줬다.

‘어르신. 저는 이대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걱정은 마십시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보석을 두고 갈 테니 꼭 쥐고 계셔야 합니다.’

몇 번이나 보석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를 했다. 그 뒤 진효섭은 이동 게이트를 생성했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찰나에 게이트에서 뻗어 나온 검은 손에 가방을 빼앗겼지만, 무사히 이동 게이트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이었을까, 원래는 약간의 울렁거림을 동반하는 게 다일 텐데 정신까지 잃어버렸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눈을 뜨니 예정했던 대로 에콰도르에 도착했다.

“하아…….”

깊은 안도가 한숨으로 내뱉어졌다.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고, 아이템도 전과는 다른 현상을 일으켰지만, 모든 것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다. 진효섭은 안단테가 이곳만큼은 찾을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에콰도르의 바뇨스. 미국에서 도망칠 장소로 고민했을 만큼 외지고, 또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 한국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진효섭이 좌표 아이템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안단테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 대단한 SS급 에스퍼라 해도 진효섭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거란 말이다. 안단테가 게이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아이템을 쓴 흔적조차 없을 게 분명하니까.

비로소 나직한 한숨과 안도가 속을 가득 채웠다.

“저…… 셀레나. 감사합니다. 절 도와주셔서…….”

“어머, 감사하기는. 사람이 쓰러졌는데 당연한 일이지.”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뭔데?”

잠깐 멈칫한 진효섭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다른 건…… 없었습니까?”

“다른 거? 뭐? 아무것도 없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진효섭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진효섭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닙니다.”

“왜. 중요한 물건이면, 내가 다시 가서 확인해 볼까? 어차피 그쪽으로 가 봐야 해서 어렵지 않아.”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었던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 됐지만……. 것보다 진, 얼굴이 좀 빨간데. 열 오르는 거 아냐?”

셀레나가 걱정스레 진효섭을 바라봤다. 듣고 보니 열이 많이 오른 건지 꽤 더웠다. 셀레나는 조심스레 진효섭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거기 쓰러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단 열이 내리고 회복할 때까지는 여기서 쉬어.”

“저, 정말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 우리 애들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녀의 말에 티나를 바라보자, 아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게, 진효섭보다도 빨갰다.

“내가 단호박 수프랑 약 준비해 줄 테니까, 푹 쉬고 있어. 알았지?”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하하하, 은혜는 무슨.”

셀레나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어 대며 방 밖으로 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는 건지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러다 돌연 그녀가 목청을 돋워 외쳤다.

“얘, 티나. 너도 얼른 내려와. 손님 쉬어야지.”

“아, 응. 알았어.”

옆에 서 있던 티나는 조금 아쉬운 듯한 기색이었지만 곧장 내려갔다.

혼자가 된 진효섭은 나직하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티나의 침대인 건지 이불은 분홍색에, 발이 침대 밖으로 반 뼘 정도 벗어날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하지만 진효섭에게는 더없이 안락했다. 물론 지금은 안단테의 옆만 아니라면 어디든 편안할 것 같지만.

진효섭은 이제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더는 그를 떠올릴 일도 없을 것이다. 만날 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은 더는 가이드로서 살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래……. 끝이야.’

길드에 대한 로망은 더 이상 없다. 앞으로는 가이드인 진효섭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 진으로 살아가리라. 두 에스퍼가 죽고, 그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을 찾는 에스퍼를 피해 이름을 숨긴 채 살아갔던 그때처럼.

그러나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힘들거나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에스퍼에게 쫓기듯이 숨어 살아야 하는 건 같았지만, 어두운 과거를 청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적당한 신분을 만들 필요도, 몰래 다른 나라로 향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고 고군분투하지도, 가이드면서 막노동을 뛰고 매일같이 땀을 흘릴 필요도 없다. 그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적당히 살아가면 될 터. 진효섭에게는 더 이상 청산해야 할 빚도, 이뤄야 할 유언도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옭아맬 것이 없다 생각하니 긴장이 탁 풀렸다. 그러자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는 말을 증명하듯 배고픔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진효섭은 굶주린 배를 감싸 쥐면서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보 같은 웃음과 함께 눈꼬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 * *

유진은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을 침대에 빨래처럼 늘어뜨리고는 손을 뻗었다.

“해창아. 나 저기, 휴대폰.”

하얀 셔츠에 커프스 단추를 채우던 신해창이 누워 있는 유진을 흘끔 보고는 휴대폰을 가져다줬다.

“땡큐.”

뒹굴, 몸을 돌린 유진이 하얀 이불을 몸에 감은 채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운을 만끽하려는 모습이었다. 유진은 엎드린 그대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상체를 벌떡 들어 올렸다.

“뭐야. 현 길드 랭킹 1위가 노아피야? 미친. 이거 뭐 잘못된 거 아니야?”

입을 쩍 벌린 유진이 신해창을 바라봤다.

“신해창. 이게 말이 돼? 얘네 어떻게 지금 랭킹 1위야?”

“어젯밤에 올랐다.”

“언제 올랐는지 묻는 게 아니잖아. 정식 길드로 인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순위에 들지도 않았던 길드가 2주 만에 1위를 탈환해? 이게 말이 돼?”

“전 1위 길드이니, 이상할 건 없겠지.”

“그거야 나도 아는데. 그 기간이 너무 심하잖아. 길드 서류에 인장도 안 말랐겠다. 이거 모종의 조작이 있는 거 아냐?”

유진의 눈에 불신이 스쳤다. 하지만 신해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길드의 랭킹은 그 어떤 것보다도 투명하게 관리된다. 그런 일은 없어.”

“그건 아는데, 너무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글쎄. 요즘 안단테의 행보를 보면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신해창은 반듯하게 다려진 셔츠 위에 정장 상의를 입으며 말했다.

“네가 말한 그 2주 안에 노아피는 100여 개의 던전을 돌았다. 어제 아침에 확인한 사항이니 오늘은 더 늘었겠군.”

100여 개라는 말에 유진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아무리 그 대단한 SS급 에스퍼 오웬이라고 해도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뭐? 그게 시간상으로 가능한 거야?”

“잠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돌면 가능한가 보더군.”

“잠도 자지 않은 채라니…….”

유진이 알기로, 전 LEOM 길드는 S급 던전만 다녔었다. 그들의 능력으로 A급 이하는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2주 사이 백여 개의 던전을 돌았다는 건, 전 세계의 던전을 A급이고 B급이고 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랭킹을 위해서?’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이상했다. 노아피는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차차 랭킹이 올라가 결국 1위를 탈환할 테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