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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발린 S급 가이드 (134)화 (134/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33화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든 렌은 힘겨운 숨을 뱉어 냈고, 디트리는 어두운 밤도 밝힐 수 있을 만큼 환한 금빛에 물든 눈을 했다. 뺨 위까지 올라온 징그러운 핏줄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던 디트리가 돌연 진효섭을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삐뚜름히 치켜 올렸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비틀린 웃음과 함께 단도가 진효섭에게 쏘아졌고, 바닥에서 숨을 고르던 렌이 그를 지키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진효섭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지만, 렌의 어깻죽지에는 단도가 깊숙이 박혔다.

“렌, 렌……. 나, 지, 지키지 않아도…….”

“쉿. 괜찮아.”

렌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레 웃었다.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할 리 없잖아.”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디트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디트리는 피가 솟아나는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렌은 보라색으로 물든 오른팔로 어깻죽지에 박힌 단도를 빼 들었다. 진효섭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둔한 움직임이었다.

“괜찮아. 이제 안심해도 돼.”

“렌…….”

“말했잖아. 조금만 기다리라고.”

렌이 낮은 숨을 뱉어 내더니 피식 웃었다. 전혀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보라색으로 물든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어 진효섭은 안도해 버렸다. 디트리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렌이 괜찮다는 사실에 온 세포가 집중했다.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이어서일까. 아니면 다정함을 받아 보지 못한 세월이 길어서일까. 그 작고도 따스한 웃음에 소름이 돋을 만큼 마음이 풀렸다. 안도하자 이제 그만 안주하고 싶었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결심한 진효섭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그를 마주하려 할 때였다. 푹, 렌의 목젖을 무언가가 꿰뚫었다.

“어? 렌……?”

흔들리는 눈이 제 품으로 쓰러진 렌을 멍하니 바라봤다. 쿵, 쿵, 쿵, 심장이 귀로 옮겨 간 것 같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으나 상황은 멈추지 않았다. 피 묻은 단도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저 멀리에서 피를 울컥 쏟아내던 디트리가 낄낄 웃어 댔다. 가래가 끓는 듯한 쉰 목소리였다.

“멍청하긴. 그놈이 진짜 널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널 지켜 줄 거라고 믿어?”

빛나는 두 개의 금안이 진효섭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대단한 착각이야. 그저 네 야한 몸에 홀렸던 것뿐이지. 에스퍼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가이드에게 집착을 느끼거든. 내게서 벗어나 봤자, 네 말로는 똑같아. 어떤 에스퍼 옆에 있든 너는 감금될 테고, 자유 없이 살아가게 될 거야.”

그의 말은 저주처럼 진효섭의 심장 깊숙이 새겨졌다.

“그러니까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 내 가이드니까. 이미 그렇게 새겨졌으니까. 렌도 죽었으니 이제 우리 앞을 막을 사람은 없다고.”

“죽어……?”

진효섭이 멍하니 밑을 내려다봤다. 보라색으로 물든 렌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를 확인하자 진효섭의 심장도 멈춘 듯했다.

“이리 와.”

움직이는 게 쉽지 않은지 디트리는 발을 끌며 진효섭에게 어렵사리 다가왔다. 멱살을 잡아채는 손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진효섭은 멱살을 잡힌 채 속절없이 끌려가면서도 시선을 렌에게 고정했다. 반짝거리던 눈이 텅 비어 그 어떤 것도 담지 못하고 빛을 잃었다. 또다시 에스퍼가 죽은 것이다. 자신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진효섭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당장 가이딩해.”

디트리가 무어라 말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세상이 까맸다. 멍하니 있자니 철썩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았다. 욕설이 귓가를 스쳤다.

“안 들려? 가이딩하라고 말하잖아!”

한계에 달한 건지 디트리는 괴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헉헉 숨을 내뱉었다.

“X발. 가이딩해. 당장.”

“…….”

“가이딩하라고!”

디트리가 급하게 입술을 맞췄으나 가이딩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디트리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효섭은 가이딩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몸이 굳어서 그 어떤 것도 불가능했다. 가이딩은커녕 움직이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텅 빈 시야에 선명한 금안이 박혔다. 살벌한 금빛이 진효섭을 저주스럽게 바라봤다.

진효섭의 얼굴에 두려움이 피어오르자 디트리가 입술을 뒤틀었다. 진효섭이 두려움 때문에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하……. 그러고 보니, 넌 형이 죽어 갈 때도 현실을 외면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었지? 하하, 그래. 그럼 가르쳐 줘야지. 아주 친절하게.”

디트리는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진효섭의 눈에 제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피눈물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그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 같았다.

“너 그거 알아? 에스퍼가 극한으로 독이 쌓이면 눈에서 황금빛이 나와. 그리고 X발. 내가 이렇게 된 건 네가 날 버려서고.”

“…….”

“감히 각인한 상대를 두고 다른 새끼랑 눈이 맞아? 다 네가 만든 거야. 우리 형을 죽인 것처럼, 너도 날 죽이려고, 이렇게 만든 거라고! 또다시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빨리 가이딩을 해!”

진효섭은 손을 벌벌 떨었다. 그의 변화가 폭주의 전조 증상이란 건 알아들었다. 가이딩을 하지 않으면 또 에스퍼를 죽이고 마리란 것도.

‘가이딩을…… 가이딩을 해야 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가이딩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네가 있는 곳은 약육강식이야.’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힌다. 그것이 바로 약육강식.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렌이 목숨 바쳐 만든, 두 번은 오지 않을 기회였다.

‘진. 잘 들어. 지금부터 이어질 전투에서 너는 절대 디트리를 가이딩해 주면 안 돼.’

이제는 유언이 된 그의 말이 가이딩을 얽매고 있었다.

끝내 황금빛이 넘쳐흐르다 못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눈에서부터 목으로, 목에서 심장께로 이어진 황금빛 줄기가 디트리의 몸을 옥죄었다. 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여전히 손을 부여잡고 있지만, 가이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결국 디트리는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일렁이는 황금빛. 터지는 핏줄. 눈과 코, 입에서 새어 나오는 피. 지옥을 연상케 하는 비명. 그것은 죽어 가는 자의 모습이었다.

“흐, 흐으. 진. 너, 이, 살인자 새끼…….”

디트리는 지옥의 번견과도 같은 모습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 진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미 폭주한 건지, 폭주 직전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성을 잃은 듯한 모습에 두려움보다 체념이 먼저 들었다.

진효섭은 차라리 다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럼 더 복잡한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다렸던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다. 체념하듯 감았던 두 눈을 뜨자 폭주로 인해 죽은 디트리, 아니, 목덜미가 반쯤 물어뜯겨 널브러진 디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입을 붉게 물들인 채 선 렌도.

“후우…….”

렌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진효섭을 바라봤다. 흐리멍덩한 시선은 거의 죽어 있었으나 진효섭은 희망을 느꼈다. 그가 살아 있다. 숨을 쉬고 있다.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다고.

“레, 렌……!”

커다란 몸이 휘청거리며 진효섭을 향해 무너졌다. 진효섭은 떨리는 손으로 렌을 안아 들곤 그의 심장께에 귀를 가져갔다. 심장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기, 기다려요! 내가 가이딩해 줄게요. 그럼 나을 거야. 그, 금방……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에스퍼는 가이드의 가이딩으로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러니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살려야만 했다.

진효섭은 힘이란 힘은 모두 끌어내 렌에게 들이부었다. 디트리에게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힘이 몸 안에서 크게 요동쳤다. 힘이 모자란다면 무작정 입을 맞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할 필요도 없이 가이딩은 렌의 몸에 조금도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

“어, 어째서?”

당혹스러움을 담고 흔들리던 시선이 디트리를 향했다. 각인 상대 중 한쪽이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가이딩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디트리가 미약한 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진효섭은 그가 죽음의 직전에 도달했을 뿐, 아직 숨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스퍼의 생명 줄이 질기다는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진효섭은 눈앞에 놓인 갈림길에서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렌의 생명이 스러져 가는데,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주인을 잃고 날뛰는 힘과 가이딩을 하지 않았는데도 차가워진 손끝에 진효섭은 그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품 안의 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죽기 직전의 에스퍼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였다.

“렌. 나, 나는…….”

고민은 금세 끝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단도를 집어 들었다.

‘내 손으로 디트리를 죽이고…… 그리고, 렌을 치유해야 해.’

그러나 보라색이 된 손이 느릿느릿 움직이더니 진효섭의 손을 감싸 쥐고 밑으로 내렸다. 마치 생각을 읽은 듯, 그 행동을 저어하는 듯.

“내가, 했던 말…… 기억해?”

“해, 했던 말……?”

“그래.”

낮게 한숨을 쉰 렌이 그새 걸걸해진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투는 여전히 똑같았다.

“길드원들의 신뢰는…… 강하다는 거.”

기억났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길드원이나 길드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끼리의 신뢰는 가족보다도 강하다고. 진효섭이 기억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렌이 옅게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됐어.”

“…….”

“새로운, 길드에 들어간다면…… 너도 그렇게, 해 줘.”

그의 잔잔한 말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 흘러 들어왔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외부적인 여러 요인에서 길드원을 보듬어 주어라, 그럼 신뢰하는 그 이상으로 신뢰받을 것이다. 너는 분명 따스한 아이니까.

달싹이는 입술이 만들어 내는 말을 한 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자 손끝이 진효섭이 흘린 눈물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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