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꿀 발린 S급 가이드 (133)화 (133/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32화

진효섭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디트리의 말을 듣고 싶기도 하고,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각인한 상대를 어떻게 할 수 없지. 너를 백날 구해야 한다고 말해 봤자 신원 불명의 가이드를 누가 지켜 줘. 결국은 에스퍼들의 싸움이 될 거야. 그리고, 우리 길드는 길드원 간 싸움은 금물이고.”

“…….”

“앞으로도 평생 넌 여기 있어야 해. 렌의 도움 따위는 없어.”

디트리가 나른하게 눈을 빛내며 진효섭을 끌어당겼다.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보였구나. 결국…… 그렇게 됐어.’

오래도록 기다려 왔건만, 그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고작 며칠 본 가이드를 구하기 위해 같은 길드의 에스퍼와 척질 수는 없을 테니까.

진효섭은 묵묵히 마음을 추슬렀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래부터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했었지 않나.

그가 도와주려고 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세상에는 그런 에스퍼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가 해 주었던 모든 이야기나 말은 어둠을 견디게 해 주었다. 그 모든 것이 앞으로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충분했다.

진효섭의 시간은 다시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어느 것 하나 바라지 않고, 매일 똑같은 하루를 숨죽여 가며 살았다. 그러다 어느덧 진효섭에게 렌이라는 인물이 다소 희미해졌을 때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 * *

“X발 새끼가……. 다시 말해 봐. 뭐라고?”

“내가 진을 데려가야겠다고.”

디트리의 얼굴이 스산해졌다. 몇 달 전, 분노를 쏟아 낼 때와 똑같았다.

“분명 오래전에 길드장이랑 얘기 끝냈잖아. 너, 내 일에 신경 끄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제 와 또 지랄이야?”

“그러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렌이 불안해 보이는 진효섭을 흘끗거렸다.

“도저히 신경 쓰여서 그냥 둘 수가 없네. 내 성격을 탓해야지 어쩌겠어.”

“하, 고작 며칠 같이 있었던 주제에 자기 가이드인 것처럼 굴어 대네. 역시 몸이라도 섞었어? 너도 꿀 냄새에 홀렸나 봐?”

“뭔 개소리인지.”

디트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렌이 진효섭에게 말을 걸었다.

“진. 잘 들어. 지금부터 이어질 전투에서 너는 절대 디트리를 가이딩해 주면 안 돼. 알겠어?”

진효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하는 말은 곧, 디트리가 죽더라도 가이딩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약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렌이 단호하게 이어 말했다.

“네가 있는 곳은 약육강식이야.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희생되지.”

“…….”

“내가 도와줄 때가 유일한 기회야. 네 앞길을, 네가 선택할 유일한 기회.”

두 번은 없을 유일한 기회. 렌은 그 단어를 강조하며 몸을 좀 더 낮췄다. 이윽고 그의 주위에서 아지랑이 같은 일렁임이 피어올랐다. 평소와는 달리 송곳니가 날카로워졌고, 두 눈은 짐승같이 변했다. 풍겨 나오는 살기가 오롯이 디트리를 향했다.

“이, 미친놈.”

디트리 역시 눈을 빛내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섬뜩했다. 주위가 한층 더 무거워지며 집에 걸려 있는 장식들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저 칼 모양의 장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이런 광경까지는 본 적이 없었기에 진효섭은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개자식.”

분노를 씹어뱉는 듯한 말이 시발점이 됐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주위는 어지럽게 망가져 갔다. 진효섭으로서는 누가 우위를 점하는지도 알 수 없는 고등의 전투였다.

에스퍼의 능력을 눈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상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1분 만에 주위가 박살 났고, 집이 무너져 내렸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때, 염력을 아낌없이 뿜어내던 디트리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이, X새끼가……!”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렌이 붉게 물든 입술을 움직여 퉤, 하고 무언가를 뱉어 내자 살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는 평상시와는 달리 야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디트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두 팔에 힘을 줬다. 양쪽 눈에 금빛이 넘실거리자 무너져 내린 벽의 잔해물들이 들썩거리더니 눈앞에서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렌에게 곧장 날아갈 듯이 회오리치는 힘은 무섭도록 강했다.

하지만 제어가 쉽지는 않은 듯, 돌이 중간중간 다른 곳으로 튀어 갔다. 일반인에 불과한 가이드였기에 진효섭은 눈먼 돌에 생채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에서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는 신음을 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커다란 돌멩이가 발가락을 부쉈을 때, 진효섭은 결국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읏…….”

진효섭이 주저앉자 렌의 주의가 산만해졌다. 디트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쐐애액-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스치며 렌을 찢어발겼다. 렌은 동물적인 감각 덕에 치명상은 피했지만, 상처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칫.”

다시금 두 사람이 재빨리 움직였다. 전투는 얼핏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실은 렌 쪽이 더 우세했다. 디트리 역시 그 사실을 느꼈는지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X발.”

궁지에 몰린 디트리가 결국 가쁜 숨을 내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허벅지에선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염력계인 디트리는 다수를 상대할 때 능력이 더 도드라지는 편이었다. 일대일은 렌보다 뒤처진다는 말이다. S급 정도가 되면 일대일에서도 빛을 발한다지만 A급은 그렇지 못했다. 이를 갈던 디트리가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때였다. 그 끝에 진효섭이 보였다.

디트리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동시에, 날카로운 단도가 그대로 진효섭을 향해 뻗어 나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진효섭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딱딱히 굳어 칼을 바라봤다. 그리고 오른쪽 눈동자가 꿰뚫리기 직전, 무언가가 진효섭을 뒤로 잡아당겼다.

얼굴에 뜨끈한 것이 튀며 코끝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퍼졌다. 상황을 이해할 새가 없었다.

“아무튼 쓰레기 새끼가 따로 없다니까…….”

뒤늦게 렌의 손에 시선이 갔다. 그는 단도를 손바닥 정중앙에 꽂고서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였다.

“역시, 진을 여기 둘 수는 없겠어.”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불가능할 건 없지.”

“하. 어디 한번 해 봐. 할 수 있다면.”

디트리의 손끝이 보라색으로 변하자 렌의 손바닥을 뚫은 칼끝도 똑같은 색으로 변했다.

‘독?’

렌은 덤덤하게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단도를 뽑아 들었다. 독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동물계처럼 몸이 변하는 에스퍼는 하나같이 일반 에스퍼들보다 두 배로 튼튼했기에 이런 걸로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레, 렌…….”

진효섭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렌을 불렀다. 렌은 시선을 움직여 진효섭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뒤로 물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곤 덤덤하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주위가 일렁이고 있었다.

순간 렌이 휘청거렸다. 그 모습에 진효섭이 놀라 다가가려 하자 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서 방관자처럼 그들을 내려다보는 디트리를 향해 있었다.

“동물계 에스퍼를 위한 특별한 독인데. 아무래도 비싼 값은 하나 보네?”

“마치 내가 이럴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한 말이네.”

“내 목숨이 걸린 일인데, 철저하게 준비해야지.”

빈정거리듯 낄낄 웃는 디트리의 손끝이 더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덩달아 눈 색도 진해졌다. 얼핏 진득한 핏물 같아 보이기도 했다.

렌은 아까 꿰뚫렸던 손바닥의 상처를 바라봤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변수가 생겼다. 디트리는 이미 힘을 한계까지 끌어 올린 상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몸이 너무 둔했다. 이러다가 디트리가 폭주 직전에 진에게 강제로 가이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대로 패배할 터.

전투 직전, 진에게 가이딩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죽어 가는 각인 상대를 두고 가만있기는 힘들 테니까.

‘곤란한데.’

렌의 표정이 처음과는 달리 다소 굳었다. 디트리는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는 것을 확신했는지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한계까지 힘을 끌어 올리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럴 때는 뒤로 물러나 재정비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렌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숨소리가 물러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렌은 이미 한 번 그에게 했던 약속을 저버리려고 했다. 버려 두고 가는 짓을 두 번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언젠가 이런 성격 때문에 일 칠 거 같다 했어.’

고작 며칠 본 동양인 남자 가이드. 앳된 그가 뭐라고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게 이다지도 힘든 일인지 몰랐다. 어쩌면 정말 디트리의 말처럼 홀린 걸지도 모르고.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내가 독에 중독돼서 죽는 게 빠를지, 네가 폭주하는 게 더 빠를지. 아직 모르는 거니까.”

“하. 미친놈.”

승기를 뺏기고도 계속해 보겠다는 말에 디트리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역시 무리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니 전투는 자연스레 재개됐다.

처음보다 훨씬 더 치열해진 전투에 진효섭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그들에게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고 피가 흩뿌려질수록 두려웠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든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무기력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제발 그만했으면, 끝이 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진효섭은 양손을 부여잡고, 수도원에서 그러했듯 믿지 않는 신에게 처음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 지옥이 끝나기를.’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 전투는 끝을 향해 치달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