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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발린 S급 가이드 (132)화 (132/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31화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하고 감내하던 진효섭의 머릿속에 문득 한 명이 떠올랐다.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게.’

그 따스함에 기대고 싶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고 그를 택하고 싶었다.

“렌……. 렌…….”

절로 눈물이 났다. 그가 얼른 앞에 나타났으면 했다. 유일한 희망을 쥐고 싶었다. 이토록 누군가가 와 주기를 기다린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도 샘솟았다. 그가 진효섭을 이미 잊었을까 봐 무서웠다.

렌이 없을 때의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게 흘렀다. 한 시간이 하루로 느껴질 정도였다. 기다리는 마음이 큰 만큼이나 시간도 늘어지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디트리가 그날 거절당한 이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다. 렌이 냉장고에 만들어 둔 음식들이 있어 전처럼 그저 굶지도 않았다.

그렇게 3일 정도가 지났을 때, 다소 화가 나 보이는 디트리가 문을 쾅 닫으며 집에 들어왔다.

“진!”

풍겨 나오는 살기가 스산했다.

“진! 어딨어. 당장 나와!”

새벽 세 시였기에 진효섭은 잠이 덜 깬 얼굴로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진효섭 앞으로 디트리가 한걸음에 다가섰다.

철썩!

뺨에서 불이 났다. 얼마 전에 맞아서 겨우 가라앉힌 뺨이 다시금 새빨갛게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진효섭은 어안이 벙벙했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고 있자, 디트리가 강하게 진효섭의 어깨를 쥐었다. 그는 분노에 차 있었다. 최근 들어 가장 격해 보이는 모습에 생리적인 두려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왜…….”

“너, 내가 없는 사이에 렌을 꼬셨어? 대체 어떻게 꼬신 거야. 옷이라도 벗었어? 여기서 벗어나게 해 주면 그 알량한 몸을 팔겠다고 말했냐고!”

무엇 하나 사실인 게 없었지만, 진효섭은 입을 열어 결백을 주장하지 못했다. 몰아닥치는 분노가 무서워서 머리가 새하얘지고 손이 떨렸다.

“말해! 이 걸레 같은……!”

디트리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고, 진효섭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기다리던 아픔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슬며시 뜨니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가이드한테 손찌검하다니. 너 제정신이야?”

진효섭에게 향했던 손을 잡아챈 건 렌이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

“미친놈이 미성년자에 아무것도 모르는 가이드를 데리고 심장에 각인을 했는데 어떻게 끼어들지 않을 수가 있어? 심지어 폭력까지……. 너 이거 알려지면 징계감이야.”

“하. 징계를 어떻게 할 건데? 이미 심장에 각인했잖아. 그 누가 우리 사이를 떼어 내고, 그 누가 내 가이드한테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어?”

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디트리는 현 사회의 맹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심장에 각인한 에스퍼와 가이드. 절대 떼어 낼 수 없는 사이가 된 이상, 에스퍼가 가이드를 학대하거나 불합리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두 사람은 각인한 서로에게서만 가이딩을 취할 수 있으니까.

만약 억지로 떼어 놓게 된다면 에스퍼는 폭주할 테고, 일은 커진다. 그것을 알기에 여러 국가에서는 심장 근처의 각인을 권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장께에 각인한 이상 그 누구도 입을 댈 수 없다.

“게다가 진은 이미 국적도 없는, 사라진 인물이야. 그런 놈이 내 곁에서 벗어나면 어디서 살아가는데? 고작 며칠 본 게 다인 네가 평생 챙겨 주게? 웃기고 있네.”

디트리가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렌의 멱살을 잡아챘다.

“내가 부탁한 건, 밥을 챙겨 달라는 거였어, 렌. 내 각인 상대를 탐내라는 게 아니라.”

“탐을 내긴 누가 냈다는 거야. 이런 부당한 일을 봤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지랄하네. 우리 사이를 네가 왜 신경 써?”

디트리의 눈에 질투와 분노가 넘실거렸다.

“아무래도 부탁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네. 네가 가이드에게 관심이 없다는 소문 때문에 널 선택했었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아, 아니지. 그냥 진이 순진한 척 유혹해 댄 게 문제인가?”

“너 진짜…….”

“하루 이틀 본 상대를 평생 책임질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신경 꺼. 이건 내 거야.”

“넌 가이드가 물건인 줄 알아?”

“물건 취급하든, 사람 취급하든, 내 가이드라잖아! 네 철학은 네 가이드를 만들어서 관철하라고!”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렌이 덜덜 떨고 있는 진효섭의 손을 꽉 쥐었다.

“며칠 만에 친해져 버려서. 여기서 손 떼면 평생 후회할 것 같거든.”

“그래서 뭘 어떡하겠다는 거야. 확실히 말해.”

디트리의 눈이 어둑해짐과 동시에 바람 한 점 없는 집 안인데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풀럭였다. 그가 능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에스퍼는 각인한 가이드가 없으면 죽는다. 즉, 렌의 발언은 디트리에게 목숨을 건 협박밖에 되지 않았다.

“날 죽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돼?”

“너…… 대체 왜 그렇게 비뚤게 받아들여? 그 뜻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닌데! 네가 하는 행동은 어떻게 포장해도 협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디트리가 렌의 뒤에 있는 진효섭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뒀다.

“내 거야. 내 가이드라고.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고 꺼져. 안 그러면 더 이상 참지 않겠어. 싸울 수밖에 없다고.”

“하아…….”

피곤하다는 듯 렌이 이마를 짚었다.

“언젠가 후회한다, 너.”

“신경 끄라는 말이 그렇게 알아듣기 어려워?”

“…….”

렌의 복잡한 시선이 진효섭을 향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상황이 어려웠다. 심장께의 각인 탓에 두 사람을 떼어 낼 수도 없었다. 에스퍼가 각인한 자신의 가이드에게 얼마나 깊은 집착을 하는지는 렌 역시 에스퍼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에스퍼에게 각인한 가이드는 제2의 심장과도 같았다. 없으면 죽는다. 그것을 알기에 디트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덤빌 것이다. 둘 모두 A급이었기에 실력은 동등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덤벼 오는 놈을 상대하기는 힘들 터.

게다가…… 렌은 진효섭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한 팀에서 활동하는 디트리를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고민하던 렌은 지금 한발 물러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학대한다고는 하나, 진은 디트리의 가이드다. 화가 나더라도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진을 꽉 쥐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일단 신변에 위험은 없을 거라 확신한 렌이 제발 디트리가 알아먹기를 바라며 경고했다.

“너, 이 일은 단장한테 보고할 거야.”

“꺼져.”

“……쓰레기 같은 놈.”

렌의 비난에도 디트리는 흔들림은커녕 진효섭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주었다. 진효섭은 아픔을 참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렌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결국 렌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 밖으로 나갔고,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 개X발.”

쨍그랑,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는 꽃병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디트리의 분노 어린 시선이 다시금 진효섭에게로 향했다.

진효섭은 살면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렌이 떠나가는 순간, 그를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아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바지를 부여잡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두려우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진.”

“…….”

“너, 오늘 좀 혼나야겠다.”

표백제를 부은 듯 눈앞이 하얘졌다. 디트리는 진효섭을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딱, 죽이지만 않았다.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괴롭히는 방법이 수만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렌이 디트리 몰래 손에 쥐여 줬던 작은 종이가 버틸 수 있게 해 줬다.

[조금만 참아.]

그는 진효섭의 유일한 희망이 됐다.

* * *

디트리의 어긋난 집착과 괴롭힘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희망이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도 기다림의 날이 두 자리를 넘어가니 그저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바라게 됐다. 차라리 숨도 쉬지 못하고 감금되어 있던 그때를 말이다.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참으라고 했으니까.’

진효섭은 죽은 눈을 하고서 몸을 말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렌이 구하러 올 테니까.

인내의 시간은 이어졌고, 디트리의 괴롭힘은 한 달이 지나고서야 사라졌다.

디트리는 기분이 좋은지 조금 웃기도 했고, 딱딱한 빵을 주던 예전과 달리 새로 사 온 빵을 내밀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받아 오던 괴롭힘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진효섭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렌의 소식이 잠잠해서였다. 희망의 불꽃은 무척이나 작고 희미했다. 고작해야 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트리가 진효섭을 비웃으며 말했다.

“너, 혹시 요즘도 렌 기다리고 있어? 매일같이 문만 보네.”

“그, 그, 그런 적 없, 없어요.”

어수룩한 거짓말에 디트리가 피식 웃었다. 들키면 화낼 줄 알았는데,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진효섭은 차라리 그가 화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렌이 다시 너를 보러 올 일은 없을 거야. 일이 아주 흥미롭게 진행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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