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30화
“렌.”
결국 진효섭이 처음으로 렌을 불렀다. 아주 조심스럽게 뻗어진 손끝이 그의 옷자락을 손톱만큼 붙잡았다. 별거 아닌 접촉이었지만 진효섭으로서는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렌은 생각을 거두고 진효섭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렌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곤란하네.”
“뭐가요?”
“널 그냥 놔둘 수가 없어져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한숨을 푹 쉬는 렌이었지만, 분노가 느껴지지 않아 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일단 밥부터 먹자. 얘기는 그다음이야.”
그들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두루치기는 이미 식어 있었지만, 맛은 여전했다. 조금은 매콤한, 그러나 달짝지근함 또한 느껴지는 다채로운 맛에 진효섭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한국을 돌이키며 오랫동안 음식을 씹어 넘겼다.
밥을 다 먹은 뒤, 렌은 언제 사 온 건지 달콤한 과일 주스를 내밀었다. 진효섭은 소파에 앉아 처음 먹어 보는 과일 주스를 열심히 꼴깍꼴깍 마셨다. 발그레한 볼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진. 넌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가 어떤지 알아?”
진효섭은 주스를 마시다 말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물음은 대답할 수 없는 것들 천지였지만 이번만큼은 쉬웠다. 매일같이 듣는 말이니까.
“가이드는 에스퍼의 말에 복종해야 해요. 에스퍼는 세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니까.”
“하아……. 디트리, 이 미친놈.”
“네?”
렌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확실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 에스퍼는 가이드에 의해서 존재하는 거야. 그들이 없으면 에스퍼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존재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만약을 가정해 보자.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어떻게 될까?”
곰곰이 생각하던 진효섭이 대답했다.
“폭주해요.”
“맞아. 이성을 잃고 폭주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봐야, 그 힘으로 세상을 파괴한다면 빌런에 불과하지. 결국 전 세계는 그들을 적으로 판단하고 죽이게 될 거야. 그게 불가능하다면 어디로도 갈 수 없도록 가둬 둘 테고.”
평생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독방에서 살아가게끔. 하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폭주한 에스퍼들의 손에 의해.
어둑한 눈을 한 렌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효섭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시선은 올곧았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 주는 존재가 바로 가이드야. 그들이 있기에 에스퍼는 살아갈 수 있고, 그들이 있기에 세상은 지금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왜 네가 그들의 말에 복종해야 해?”
“그건…….”
진효섭의 눈이 흔들렸다. 말문이 막혔다.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또한 가이드가 소중한 존재임을 돌이켜 본 적 역시 없었다.
“진. 너는 좀 더 확실하게 세상을 알아야 해.”
렌의 손이 천천히 진효섭을 향해 뻗어졌다. 커다랗고 따스해 보이는 손이었다.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게.”
“저, 저는…….”
그의 손이 너무나도 따스해 보여서 잡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매일같이 따스하게 살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진효섭은 손을 마주 잡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스스로 각인에 얽매이고 디트리의 곁에 있는 이유가 분명한 탓이다. 속죄를 위해서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홀로 편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진효섭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약점 잡혔을 거란 예상을 하긴 했다. 다만 생각보다 그것을 깨는 게 어려울 듯했다.
“……당장 대답하기 어려우면 좀 더 생각해 봐. 디트리가 돌아오더라도 종종 찾아올 테니까.”
“저, 정말요?”
진효섭의 표정이 밝아졌다. 앞으로의 일은 복잡해서 선택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또 찾아온다는 사실만큼은 기뻤다. 렌을 만난 기간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 손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천천히 결정해. 급할 필요는 없어.”
렌은 진효섭을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도닥였다. 언제든 옆에 있어 줄 듯한 행동이었다.
가슴께에서 따스함이 퍼졌다. 처음 받아 보는 따스한 온기는 죄를 용서받은 기분이 들게 했다. 처음으로 던전에서 돌아올 디트리가 두렵지 않았다.
* * *
3일 후, 디트리가 돌아왔다. 진효섭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이제껏 많은 던전을 오갔지만, 이번만큼 길었던 날은 없었다.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오, 오셨어요.”
진효섭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디트리의 발끝만 바라봤다. 그에게서 미약한 피 냄새가 풍겼다.
“쓸데없는 짓을 하진 않았겠지?”
“네, 네.”
쓸데없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진효섭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디트리의 표정을 살필 기세도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자, 디트리가 낮은 한숨을 쉬며 소파로 향했다.
“멍청하게 뭐 하고 섰어. 에스퍼가 왔으면 빨리 가이딩할 생각을 해야지.”
“아, 네.”
진효섭이 잽싸게 그가 앉은 소파 옆으로 다가갔다. 두 손이 조심스레 디트리의 손을 감싸 쥐었다. 몸이 안 좋을 때의 디트리는 언제나 예민했기에 진효섭은 손을 잡자마자 한계까지 힘을 불어넣었다. 주춤거리다가 혼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일련의 과정이 재빨랐다.
“여전히 더럽게 차가워. 다른 가이드는 기분 좋은데, 넌 심장을 얼려 버릴 것 같아서 불쾌해. 어쩌다가 이런 놈이랑 각인해서.”
“…….”
디트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뱉은 말에 진효섭은 움찔거렸지만, 힘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힘의 온도는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거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진효섭은 말없이 힘을 계속해서 들이부었고, 디트리는 가이딩의 감상평 외에는 더 폭언을 내뱉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얼추 가이딩이 완벽하게 이뤄졌다. 그에게선 여전히 피 냄새가 났지만, 상처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소였으면 이쯤 디트리가 손을 털어 낼 텐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효섭은 손을 빼내지도 못하고 난감함에 눈만 굴렸다. 그때, 디트리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열아홉 살이었던가.”
“……네.”
“이제 성인이네.”
“…….”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이 끈적거리는 게, 평소와 달랐다. 손안에서 디트리의 손이 천천히 빠져나가더니 진효섭의 목을 틀어쥐었다.
“으…….”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탓이다. 디트리는 손을 물리지 않았다. 손끝이 목을 더듬으며 쇄골을 쓸었다. 주변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해 진효섭이 몸을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왜. 기분 더러워? 하긴. 넌 다 죽어 가는 에스퍼를 앞에 두고도 순결이나 지키고 있었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죽은 형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사이 디트리의 손은 쇄골을 지나 그 밑으로 내려갔다. 복근을 스치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귀에서 환청과도 같은 경보가 삐- 하고 울렸다.
진득한 음심이 가득한 시선. 끈적한 손길.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진효섭은 바로 알아차렸다. 전까지는 혐오스럽다며 손을 잡는 게 아니면 접촉을 삼갔는데. 오늘은 왜. 진효섭이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손길이 상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진효섭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가, 가이딩은 끝났어요.”
“그래서?”
“……접촉은 이, 이제 안 해도…… 돼요. 닿는 거 별로 안 좋아하셨으니까…….”
“그래서?”
“…….”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다물자, 디트리는 그대로 진효섭을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올라탄 그가 진효섭을 내려다봤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슬슬 너도 연습해야 해. 나중에 내가 오늘보다 더 다쳐 오면 어쩌려고. 그때도 손만 잡고 가이딩 받을 수는 없잖아.”
“하, 하지만 지금은-”
“막상 몸이 안 좋아졌을 때, 네가 전처럼 싫다고 내빼면 어떡해. 우리 형에게 그랬듯이 나도 죽이려고?”
진효섭이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마치 목이라도 졸린 듯한 표정이었으나 디트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도 너 싫어. 너랑 닿는 거 혐오스럽고. 그래도 위험할 때가 오면 어쨌든 해야 하니까. 지금부터 연습해 둬야지.”
“하, 하지만-”
“닥치고 얌전히 있어. 찢어발기기 전에.”
거듭된 거절에 디트리가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전에는 그가 깊은 관계를 바라지 않았기에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소름이 끼쳐 간헐적으로 몸을 떨던 진효섭이 디트리를 밀어냈다.
“시, 싫어요……. 하지 마세요. 제발…….”
“닥쳐.”
“하지…… 하지 마세요.”
“닥치라고!”
디트리의 언성이 높아졌다. 동시에 손바닥이 진효섭을 내려쳤다. 짝!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이 터졌다. 골이 띵하고 울려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흐, 으……. 흐…….”
진효섭이 돌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대자 상체에 입술을 대고 있던 디트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결국은 디트리가 욕설을 내뱉으며 진효섭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다. 디트리의 시선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바라는 것 역시 그에 따라 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