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29화
그와 만난 지 2주가 되는 날.
렌은 이제껏 그랬듯이 오후 한 시가 되어 진효섭을 보러 왔다.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든 채였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는 그의 손은 신비로웠다. 진효섭이 식탁에 앉아 멀뚱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그는 홀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풀어냈다.
“우리 길드는 단장이 S급 에스퍼인데도 대부분이 B급이라 아직도 A급 타이틀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문제야. 그러게 내가 A급이나 S급을 더 영입하자니까 단장이 뭐라 그랬는지 알아?”
“…….”
“돈이 없대. 내 참. 열심히 벌어 둔 돈을 맨날 이상한 데다가 퍼 주니까 그렇지. 그러다가 언젠가 빈털터리 되고 후회할 거라니까, 멍청하다 얘기 들으면 기분이 좋다지 뭐야. 그게 착하다는 말 같대. 진짜 웃기지?”
남자는 피식 웃으며 빨간 고기볶음을 식탁 위에 내려 뒀다.
“자, 다 됐다. 오늘은 두루치기야. 한국에서 유명한 음식이라던데. 먹어 본 적 있어?”
도리도리.
“그럼 이번에 먹어 봐. 내가 이번 기회에 한국 식료품점에서 양념들을 좀 사 봤거든.”
끄덕끄덕. 진효섭은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렌 또한 숟가락을 들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크게 한 숟갈 밥을 푸고 입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진효섭이 커다랗게 눈을 뜨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맛있어.”
“맛있어?”
끄덕끄덕. 둥그렇게 커진 눈과 뽀송뽀송한 볼이 발그스름해진 게 사랑스러워 보였다. 렌은 아이 같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뚝뚝한 줄 알았더니. 착하네.”
렌이 부드럽게 진효섭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 손짓에 진효섭의 머릿속에 순간 의문이 치켜들었다. 어째서. 대체 왜.
“……왜 칭찬해요?”
“응?”
“난 잘한 게 없는데.”
이상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해 준 대로 밥을 얻어먹은 것뿐인데. 그는 언제나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착하다고 칭찬을 했다. 디트리는 매일같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했기에 진효섭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잘한 게 왜 없어. 밥해 준 걸 맛있게 먹어 주면 착한 거지. 너 맨날 내가 해 준 거 깨끗하게 비웠잖아.”
“그건…… 맛있으니까.”
“그렇게 말해 주는 것도 착한 거고. 남을 칭찬할 수 있다는 건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증거거든.”
렌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지만 진효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얼른 먹어. 식겠다.”
“……네.”
하지만 더 물었다 미움받을까 봐 진효섭은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기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아, 맞다. 디트리가 오늘 아침에 던전에서 나왔다더라. 정리를 끝내면 돌아온대. 아마 3일 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쨍그랑-! 포크가 바닥을 뒹굴었다. 유난히 붉고 진한 고추장 소스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옷을 너저분하게 물들였다. 진효섭은 벌떡 일어난 채 당황스러워했다.
“아…….”
두 눈이 정처 없이 떨렸다. 덩달아 렌 역시 놀란 눈치였다.
“왜 그래?”
“아니…… 아니요. 아무것도…….”
눈에 띄게 당황한 진효섭이 다시 자리에 앉으려다 붉게 물든 옷과 바닥을 뒤늦게 발견했다.
“죄, 죄송합니다.”
떨리는 손이 휴지를 뜯어 옷을 문질렀다. 그러나 붉은 소스는 사라지기는커녕 번지기만 했다. 자국이 더 커지자 당혹스러움도 함께 커져 온몸이 점점 떨렸다.
그때 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고, 커다란 손이 뻗어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렌이 디트리와 겹쳐 보인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진?”
“실수였어요. 전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오, 옷 제가 빨게요. 청소도 할게요. 그러니까…….”
진효섭은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작게 말았다.
“때, 때리지 마세요.”
제일 먼저 머리를 보호하며 몸을 웅크리는 그에게서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학대의 흔적이 드러났다. 정신 깊숙이 새겨져 숨길 수 없는 종류였다. 손을 뻗었던 렌은 딱딱하게 굳었다.
“때리다니. 내가 왜 널 때려. 아니, 에스퍼가 가이드를 왜 때려.”
“잘못했으니까…….”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인대도 에스퍼가 가이드를 때려도 되는 일 따위는 없어.”
진효섭이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데구루루 굴리자 렌이 찌푸려진 미간을 지압하듯 꾹꾹 눌렀다.
“아, 말도 안 되는 상상인데,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진, 너 디트리한테 맞았어?”
언제나 친절하고 밝았던 렌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디트리가 화났을 때와 무척이나 흡사한 눈빛에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네, 네에…….”
“그 X새끼가…….”
분노를 담은 중얼거림에 진효섭은 몸을 더 웅크렸다. 나이치고 왜소한 체구가 둥글게 말리자 평소보다 더 작게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너한테 욕한 게 아니라, 그 디트리 새끼가…….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고 점심 먹고 얘기하자.”
렌은 자꾸만 굳어지려는 얼굴을 펴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으로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리 와.”
그는 진효섭의 손을 이끌어 욕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는데 왜 욕실에 가나 하는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렌은 엉망이 된 손을 흐르는 물에 씻긴 후 턱에 튄 붉은 자국을 수건으로 닦아 줬다. 많이 화났다고 생각했는데, 자상한 손길을 받고 있자니 착각이었나 싶었다.
진효섭이 잠자코 눈만 끔뻑이고 있는 사이, 렌은 티셔츠를 벗기곤 새로운 옷을 들고 왔다. 시선은 진효섭의 상체 구석구석을 살폈다. 특별히 상처가 남아 있지는 않았으나 맞는다고 생각한 순간, 감싸 쥐었던 부위가 머리였던 것을 미루어 착각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더 말랐잖아. 열아홉 살이랬나.’
그 정도면 성장기가 거의 끝날 때쯤이다. 대부분의 아이가 성장을 마치고 큰 키와 탄탄한 덩치를 하고 있을 시기. 대다수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키나 몸집이 작다지만 진은 특히 더 작고 말랐다.
‘……디트리 새끼. 어쩐지 밥만 챙겨 주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하더니.’
기실 렌은 디트리가 처음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난히 자신의 가이드에게 신경을 쓰는 게, 걱정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했으니까. 특히 말도 걸지 말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딱히 그 이유를 파낼 생각은 없었다. 그 비밀이 이런 쪽이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이제야 알겠네.’
처음, 디트리는 진을 부탁하며 열아홉 살이지만 정신연령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했었다. 그렇기에 다 큰 가이드를 챙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고작 이주일 남짓, 렌은 진의 인지능력이 뒤처지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모자란 게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뿐. 휴대폰도 가지고 있지 않고, 밖과 소통하지 않는다. 집에는 흔한 TV나 컴퓨터 하나 없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다. 알려 주지 않았기에 그는 사회를 겪어 보지 못한 채 자란 아이 같았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정신은 여전히 10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자물쇠가 걸리지 않은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는 걸까. 그것만큼은 정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설명되지 않았다. 열 살만 되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우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솟을 테니까.
렌의 시선이 문득 진의 심장께로 향했다.
‘저것 때문인가…….’
깡마른 몸 위에 덩그러니 새겨진 어울리지 않는 문양. BETEL의 문양과 디트리 이름이 어우러진 각인 자국이었다. 렌은 그 위치가 심장 바로 위라는 것을 지금 알아차렸다.
“그거, 동의하였어?”
“네?”
새로운 옷에 머리를 끼워 넣은 진효섭이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나 앳된 얼굴이 아직도 아이 티를 벗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열아홉 살에 각인이면 많이 어린 것 같아서. 게다가 그 위치가 심장이기도 하고……. 동의하에 한 거야?”
렌의 생각과는 달리 진효섭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래? 그럼, 심장께에 한 것도 마찬가지로 네 의지고?”
진효섭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심장에 하면 안 돼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보통 그렇게 안 하잖아. 깨지도 못하는데.”
“깨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각인을 나중에 깨지 못한다고.”
“각인은 원래 깨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뭐?”
렌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진효섭은 아무것도 몰랐다. 멍청해서? 아니. 디트리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너…… 언제 각인했어?”
“4년 전에…….”
4년 전이면 열다섯 살이다. 렌은 새어 나오려는 욕설을 꾹 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데리고 심장에 각인을 새기다니. 평소에도 음흉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돌아 버린 놈인지는 몰랐다. SS급 던전에서 형을 잃었기에 어두워졌다고 불쌍하게만 생각했더니.
까득, 이를 갈자 진효섭은 치아가 부딪히며 나는 그 작은 소리에도 몸을 움찔거렸다. 온 신경이 상대의 기분에 맞춰져 있었다.
그제야 렌은 그가 말수가 적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말은 애초에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
한편, 길어진 침묵에 진효섭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렌이 이렇게나 말을 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나 과할 정도로 말을 붙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