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28화
딱딱하게 굳은 디트리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은 흥분으로 번뜩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슬픔과 욕망이 뒤섞인 듯한 기묘한 표정이었다.
-평생, 내 밑에서 가이딩으로 갚아. 그것만이 네가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당시에 그랬듯이, 진효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형이 폭주해 죽게 된 것이 진효섭 탓이 아니었음에도 멍청하게 죗값이라 생각해 받아들였다. 그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알지 못하는 게 많았던 탓이다.
진효섭은 멍하니 창문에 비친 심장께의 문양을 바라봤다. BETEL의 문양과 조금 닮았지만, 디트리만의 특이한 느낌이 더해진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는데 어느새 익숙해졌다.
기실 진효섭은 그를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속죄라 생각하고 죽었던 에스퍼의 동생인 디트리를 케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의 집착은 해가 지날수록 깊어졌다. 처음에는 버거웠던 것이 이제는 참을 수 없이 힘들게 느껴졌다.
그날이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진정제를 먹었으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침에 속옷을 더럽혔을 때.
‘……너,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각인한 이후 디트리는 향을 맡을 수 있게 됐는데,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이 걸레 같은……. 네가 아주 몸이 달았구나.’
디트리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이렇게 남자가 좋아서 못 참을 거면, 왜 그때는 형한테 안 대 준 건데?’
‘그, 그게 아니에요. 오늘은 그, 몸이 이상해지는 날이라서…….’
‘이상해? X발. 네가 무슨 발정기의 개야?’
바지 앞섶이 불룩해진 그가 욕설을 뱉었다.
‘역겨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밖에 나가서 남자 놈들을 보고 침이나 흘릴 거 아니야.’
‘그, 그런 게 아닌데…….’
‘안 되겠다. 너 이제 밖으로 나가지 마. 나갔다가 다른 새끼들이랑 붙어먹기라도 하면 내가 곤란하니까.’
‘하, 하지만-’
‘닥쳐. 내가 시킨 대로만 해.’
진효섭의 대답은 깔끔하게 묻혔다.
그 이후로 진효섭은 어느 곳도 가지 못했다. 어떠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휴대폰도 빼앗기고, TV도 없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하늘만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물론 그 또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점점 익숙해졌다.
그러나 4년 후, 진효섭은 인생을 바꿔 줄 에스퍼 한 명을 만났다.
“누, 누구?”
“디트리가 보내왔어.”
문을 열었더니 익숙한 디트리가 아닌, 낯선 사람이 있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타인이었다.
“그놈, 갑자기 길드에 급한 일이 생겨서 오랫동안 집에 못 돌아오게 됐거든. 그래서 각인 상대인 널 좀 챙겨 주라고 부탁받았는데. 얘기 못 들었어?”
“아.”
진효섭은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디트리가 다정했기에 한 부탁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달랐다. 진효섭은 디트리가 없으면 온종일 굶다가 결국은 죽어 버릴 것이다. 편리한 가이드를 잃기 싫어서 부탁했을 터.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진실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 너무 급해서 말을 못 했나……. 뭐, 좋아. 아무튼 앞으로 내가 하루에 한 번 들를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너, 배달이라든가 인터넷 같은 걸 사용할 줄 모른다며?”
“…….”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진효섭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디트리는 타인에게 그와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다. 어기면 벌을 내릴 거라고. 시간이 갈수록 디트리가 바라는 수위가 높아졌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한다면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정없이 깔아뭉갤 것이다.
진효섭은 그 순간이 너무나도 두려워 죽은 듯이 살아왔다. 숨도 잘못 쉬면 혼날까 봐 그의 앞에서는 인형처럼 눈만 조심스레 깜빡였다. 디트리는 드문드문 그런 진효섭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봤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난 렌. 넌 이름이 뭐야?”
“……진.”
“진? 나랑 비슷한 어감이네.”
렌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피식 웃으며 제집처럼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오늘 밥 먹었어?”
도리도리.
“좋아. 그럼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말해.”
“머, 먹고 싶은 거…….”
진효섭은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저었다. 먹고 싶은 게 없다기보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몰랐기 때문이다.
식사 시간은 언제나 디트리와 함께했다. 다만 그는 음식 이름을 가르쳐 준 적 없었다. 진효섭은 긴장해서 제대로 맛을 느낄 상황도 아니었고.
즉, 진효섭에게 식사란 죽지 않기 위해 먹는 거였고, 침묵을 견뎌야 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먹고 나면 언제나 위장이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껴야 했기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안 먹어도 돼요.”
“왜. 너 아침도 못 먹었을 거 아냐.”
“…….”
대답하지 않자 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그 시선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말라서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으면 어떡하게. 보니까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잘 먹어야지.”
렌은 작게 혀를 차며 진효섭의 머리를 꾹 눌렀다. 남자가 유난히 큰 거였지만 진효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이러니까 키가 작은 거야. 잘 먹어야 나처럼 키도 쑥쑥 크고 건강해지는 거라고.”
“…….”
“너 한국인이랬지? 기다려 봐.”
렌은 제멋대로 주방에 들어서 냉장고를 몇 번이고 여닫더니 안팎을 여러 차례 오갔다. 끝끝내, 그는 양손에 한가득 짐을 지고서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었다.
진효섭은 눈만 도르르 굴려 그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누군가 열심히 움직이는 걸 보는 게 몇 년 만이더라. 보고 있으려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잠시 후, 집안에는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자, 다됐다.”
렌은 진효섭을 향해 손짓했다. 몸을 작게 말고 있던 진효섭이 삐걱거리며 조심스레 식탁으로 다가갔다. 따끈한 볶음밥과 그 주위로 귀엽게 문어 모양으로 잘린 소시지가 꾸며져 있었다.
진효섭은 멍하니 식탁을 내려다봤다. 부모님이 살아생전에 만들어 주셨던 것과 똑같은 종류인지 언젠가 먹어 본 적 있는 모양이었다. 쌀밥에다가 여러 야채를 볶은 것. 그러나 이름이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렌이 진효섭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볶음밥이야. 한국인들은 밥이 주식이라고 해서.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먹어 봐봐.”
그는 숟가락을 쥐여 주며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내 룸메이트가 중국인이거든. 걔 집이 중화집을 하는데, 그 덕분에 볶음밥에는 좀 일가견이 있어. 한국 거랑은 다르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을걸? 걔도 나보고 소질이 있다고 했으니까.”
“…….”
“왜. 마음에 안 들어?”
진효섭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직접 해 준 따스한 밥을 오랜만에 봐서 놀랐을 뿐이다. 디트리와 있을 때는 언제나 다 식어 빠진 음식을 먹곤 했으니까. 게다가 쌀보다는 밀가루를 좋아하는 완벽한 서양인인 터라 그의 식사에 쌀은 없었다.
달그락, 진효섭은 어수룩하게 숟가락을 들어 올려 포슬포슬한 밥을 뒤적거렸다. 폴폴 새어 나오는 김을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디트리는 언제나 진효섭이 식사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기에 부담스러워서 음식이 무슨 맛인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턱 운동만 했었다. 그러나 렌은 다소 이상할 정도로 밥그릇에 코를 박은 채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리 깔끔해 보이지 않는 식사법이지만 진효섭에게는 더없이 다행이었다. 조금 더 편안하게 숟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눈치를 보다 한입 넣자 고슬고슬한 밥에 달걀의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다. 약간 짭조름한 채소가 한꺼번에 씹혔다. 뭘 넣었는지 코끝에 맴도는 향이 무척이나 고소했다.
“아…….”
진효섭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숟가락을 놀린 기억밖에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에 텅 빈 그릇이 있었고, 배는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렌이 보였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맛있다니까.”
너무 오랜만에 먹는 따스한 밥 때문인지, 아니면 사심 하나 없이 마주하는 웃음 때문인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흑…….”
입술에 밥풀을 묻히고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자 렌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잠깐, 너 왜 그래?”
진효섭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그날의 눈물은 다음 날이 되어 다시 돌이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였다.
렌이라는 남자는 처음 얼굴을 비춘 이후로 매일같이 오후 한 시가 되면 나타났다. 그리고 점심을 함께 먹으며, 저녁과 다음 날의 아침을 준비해 두고 돌아갔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것이 고작 나흘 만에 익숙해졌다. 어느새 눈을 뜨면 오후 한 시까지 그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됐다.
말이 없고 표정 변화도 드문 진효섭과 달리, 렌이라는 에스퍼는 말이 많았고 표정 변화가 다양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언제나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들고 왔다. 휘어지는 눈매가 신기해서 그것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끝내는 이야기에 정신을 뺏겼다.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길드나 가이드, 에스퍼에 대한 것이었다. 길드원들의 소속감. 던전 안에서 등을 맡긴다는 서로를 향한 신뢰. 모두를 보듬어 주는 가이드의 존재. 마치 동화를 듣는 것 같은 신비한 이야기들. 수도원에 있을 적 아이들이 생각하던 길드의 정석이었다.
진효섭이 겪었던 것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였지만, 그는 그것이 진실이라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얘기하는 렌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이야기에 빠지다가도, 반달로 휘어지는 그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빤히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알게 됐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