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꿀 발린 S급 가이드 (126)화 (126/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26화

‘만약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난 무어라 말했을까.’

미안하다고 빌었으려나. 너무 괴로워 보이는 진효섭의 감정에 동감하지도 못하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려나. 아니면…… 그래도 놓지 못하겠다고 말했을까. 솔직히 안단테는 어떤 것을 택했을지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조금이라도 상황을 전으로 돌리고자 했다. 그와 이야기할 수 있도록. 솔직하게 속내를 말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진효섭이 가지고 있는 보석 덕에 위험은 덜했다. 그 보호막의 능력 정도면, 20분 남짓 동안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안단테가 제안할 방법으론 이게 최선이었다.

“내가 이 상황을 전부 해결할게. 원한다면 집도 복구해 줄 수 있어. 넌 나랑 이야기만 해 주면 돼. 어렵지 않잖아. 응?”

“…….”

하지만 진효섭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고민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저 이야기뿐이라는데도 과할 정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안단테는 괜스레 더 초조함을 느꼈으나 재촉하지 않고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이윽고 진효섭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안단테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면, 진효섭은 다소 묘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어. 다녀올 테니까, 위험하지 않게 그 보석 꼭 잡고 있어. 알았지?”

“예.”

그대로 안단테는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끌어당기는 검은 손 따위는 무시한 채 스스로 들어가는 안단테의 표정에는 희망이 어려 있었다.

‘그래, 이야기만 하면 충분히 풀어 갈 수 있어.’

기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 둘의 사이는 좋았다. 오해를 풀면 행복해질 테니 멀어질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효섭이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날의 밤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어.’

지금 깨달은 진심을 이야기하면서 부딪힌다면, 진효섭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질 테니,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밝아진 표정의 안단테가 단번에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보라색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독기를 품은 안개를 보아하니, 독 계열의 A급 던전인 듯했다.

보통 이런 던전에는 위험한 괴물이 많이 없었다. 숨 쉬지 않고 해결해야 하는 게 조금 힘들 뿐, 에스퍼에게는 간단한 던전에 속했다. 심지어 안단테처럼 디퍼프 계열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에게 이 정도는 간단했다.

혼자이다 보니 굳이 디버프를 써서 독을 정화할 필요가 없다 판단한 안단테가 곧장 직선으로 달렸다. 목표는 가장 안쪽에 있는 숨은 방이었다.

‘보아하니 10분도 안 걸리겠네.’

좋은 일이었다. 그는 던전을 빨리 끝내고 진효섭에게 원하는 것을 쥐여 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펴진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낯설던 얼굴을 뒤바꾸는 데 이 정도의 일이 다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만했다.

새로 나타난 변형 게이트. 최대한 여기저기를 확인해 봐야 하건만 안단테는 그러지 않았다. 진효섭을 찾는 한 달가량이 생각보다 더 초조했던 탓인지 마음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안단테는 대충 보이는 괴물들을 베어 넘기며 안쪽으로 계속해 뛰어 들어갔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를 사로잡았다.

-괜찮겠어? 그러다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잠깐 멈춰 선 그가 주위를 훑었다.

‘환청?’

독은 흔한 특성이지만,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는 환청은 다소 독특했다. 보통은 던전 안 괴물을 해치워야 하는데, 여기는 던전 자체가 괴물같이 느껴졌다. 역시 게이트도 그렇고, 던전도 그렇고,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특이하고도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안단테는 괘념치 않고 달렸다. 그러자 환청이 다시 이어졌다.

-도망칠지도 모르잖아. 너를, 버리고, 도망치고, 너는 또 그 초조함을 느껴야 할 것 아니야?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서 손에 쥐어야지. 가이드를 손안에 넣어야지.

마치 머릿속을 읽은 듯한 환청이었다. 하지만 안단테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괴물을 베어 나가며 안쪽으로 향했다. 괴물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건 D급 에스퍼도 아는 상식. 어차피 인간의 말을 짜깁기해서 뱉는 것뿐이다.

그러나 환청은 키득키득 비웃기 시작했다.

-아아, 멍청한 에스퍼. 가이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한 에스퍼. 그렇기에, 가이드를 죽여 없애야 하는 거지. 멍청한 에스퍼. 에스퍼.

“아, 시끄럽네.”

안단테가 짜증스럽게 귀를 후비적거리며 눈앞의 문을 열어젖혔다. 오던 길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스산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안을 쭉 훑어본 안단테는 던전의 가장 안쪽 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던전에 들어선 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도착할 줄이야. 비웃음을 닮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위험해 보이는 내부 분위기였지만, 안단테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던전을 드나든 그에게 이 정도는 그저 조악한 던전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성큼성큼, 중앙을 향해 걸어 들어간 그는 곧바로 괴물을 찾기 위해 안을 훑었다. 빨리 찾아내서 죽여 버리고 진효섭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괴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끌 듯이.

본래라면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렸을 안단테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오지 않는다면…….”

안단테의 손에 투명한 일렁임이 생겼다.

“바로 핵을 뜯어 버리지, 뭐.”

질릴 만큼 쌓은 경험 덕에 핵이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는지는 뻔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 안쪽의 바닥을 발끝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벌써 찾았네.”

안단테가 바닥을 잡아 뜯으려는 순간, 위에서 괴물이 떨어졌다. 안단테는 기다렸다는 듯이 괴물과 눈을 마주치곤 곧장 그것을 향해 뛰었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괴물이 안단테의 손에 잡혀 바닥에 처박혔다. 발버둥 치는 괴물은 괴로워 보였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지르지 못했다. 커다란 입이 두꺼운 붉은 실에 지그재그로 꿰매졌으므로.

안단테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시끄럽지 않은 건 마음에 드네.”

이것만 해결하면 오해를 풀 기회가 온다. 그리 생각하니 이 괴물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안단테가 치켜든 손을 그대로 괴물의 심장에 박아 넣으려던 때였다.

-혀, 형…….

진효섭과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칫, 가속도가 붙은 손끝이 괴물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에 멈췄다. 그러자 환청이 다시금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픕, 아픕니다……. 제발, 그만……. 도와주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한 안단테가 뒤를 돌아봤다. 방문이 안단테의 퇴장을 환영하듯 활짝 열려 있었고, 던전의 어두운 길은 그가 만든 레드카펫으로 질척하게 이어져 있었다.

-형, 어서요, 어서…….

안단테는 손아귀에 틀어잡은 괴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실로 박음질 된 입은 미동이 없었지만, 커다란 눈이 그를 비웃듯이 휘어져 있었다.

“하.”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특이한 구석이 있는 던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개같네, 이거.”

-형, 혀엉…… 형…….

“X같이 생긴 게, 누구보고 형이래.”

안단테는 같잖은 괴물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역시 A급답게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소름 끼치는 외형을 해서는 진효섭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다니. 심지어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인지라 묘하게 현실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뻔히 보이는 속임수에 넘어갈 리는 없지만.

“역시, 지능이란 게 없다니까.”

푹- 안단테가 손을 망설임 없이 휘둘러 괴물의 명치를 꿰뚫었다. 손목이 묻힐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안단테의 손이 그대로 한 바퀴 돌며 심장을 뽑아냈다. 두근, 돌처럼 딱딱한 심장이 손안에서 뛰었다.

동시에 던전이 함께 울렁이며 환청이 다시 들려왔다. 애절하게 안단테를 부르며 진효섭의 목소리를 흉내 낸 환청은 분노에 절어 있었다.

-무능한 에스퍼. 가이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놈들 주제에……. 가이드가 없으면……. 가이드를 죽이면…….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안단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능 없이 뱉은 말이라지만 기분이 더러워지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아직도 진효섭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하. 가이드를 죽이기는커녕 만나지도 못할 것이 아무렇게나 뱉어 대는 꼴이라니.”

-죽일 수 있어.

순간, 안단테의 눈이 커졌다. 괴물이 말을 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방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안단테의 말을 듣고 이해한 듯한 되물음이지 않나.

‘말이 통하는 건가?’

-그래서 죽여 보려고. 죽이려고. 그래서 다 죽일 거야. 죽어. 죽일 거야. 죽여. 죽어 버려. 죽어. I’LL KILL YOU. KILL YOU. 죽어. 死, 死ね, 死亡, 死, 死んじまえ, 死, 去死吧, KILL. 죽어. 죽어 버려.

‘아닌가.’

그저 유난히 이 던전의 언어 패치가 뛰어난 걸지도 몰랐다.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것에 이어서 언어 패치가 뛰어나기까지. 난이도와는 별개로 두 번은 들어오고 싶지 않은 던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