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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발린 S급 가이드 (124)화 (124/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24화

“……누가 그래요?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어떤 새끼인지, 잡히면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을 때였다.

“형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안단테는 또다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저게…… 무슨 말이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건지, 안단테는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진효섭이 괜히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사실이기도, 아니, 사실이었기도 하고.

하지만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제정신인 이상, 저런 말을 지껄이고 잊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언제……. 안단테가 기억을 곱씹고 있자니 진효섭이 말을 이었다.

“저, 형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경직된 채 떨고 있었다. 두려워서 눈도 못 마주치면서, 입술은 쉼 없이 움직였다. 그래야만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다 이해합니다. 이용하려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그만큼 아노가 소중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않습니까.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효섭아.”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저, 너무 힘듭니다. 형 곁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런 게 만약 사랑이라면…….”

“진효섭.”

“저는,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놓아주십시오. 좋은 짝사랑이었다고 간직할 테니까, 그냥 제발…….”

흐릿해지는 말끝에 안단테는 여전히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 말문이 막힌 적은 처음이었다.

살면서 가장 원하는 것이 생겼는데, 하필 그걸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후회하지만 어디서부터 뭐를 해명하고 상황을 바꿔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까지. 하나같이 처음 마주해 본 감정이라 안단테는 그저 멍청하게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깊어짐 없이, 딱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익숙했다. 상대가 매달리며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많이 봤었지만, 멀어지고 싶다고 밀어내는 적은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한 걸까.

……아니, 그는 밀어내면 밀어내는 대로 으쓱하고 말았을 터다. 그럼 어째서 진효섭의 감정에는 사무치도록 동화되는 걸까.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래도, 저는 형의 본디지 파트너였지 않습니까.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많이 노력했으니까…… 그러니까 부탁, 드립니다. 이대로 절 놔주십시오.”

그 순간, 애처로울 만큼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유독 선명히 들렸다.

“……놔 달라고?”

안단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진효섭을 놓으라니. 손안에서 떠나는데 가만히 놔두라는 건가. 멀어지는데도 두고 보라고. 다시 그가 없는 시간을 견디라고. 가이드가 떠난다는 것은 곧 다른 길드, 다른 에스퍼에게 간다는 것인데. 그걸 가만히 지켜보라는 의미다.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반짝이는 눈으로 올곧게 부딪혀 오는 진효섭. 수줍게 웃으며 손을 맞잡고, 혀를 얽고, 달뜬 상태로 좋아한다 속삭이는 진효섭. 그 상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떠오르자 안단테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안 돼.”

그 단호한 말에 진효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절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안단테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아니, 바꾸지 못한다는 게 더 맞았다. 진효섭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놓아 달라니.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안 돼.”

단순히 가이딩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힘들다는데 굳이 잡아 두지 않았을 터다. 가이딩 증폭기도 얻었겠다, 그냥 놔줄 수 있다.

‘그래. 가이딩만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안단테는 이제야 알아차렸다. 필요한 게 가이딩이 아니었다는 걸. 그가 원했던 건 진효섭 그 자체였다는 걸.

진효섭이 겁먹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뻗은 안단테가 보호막에 손을 댔다. 파지직, 불꽃이 튀고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데도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현재 안단테에게 있어 보호막은 진효섭과 그, 둘 사이를 가로막은 벽에 불과했다.

“다 들어줄게. 뭐든 다 해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라면. 가지고 싶은 거라면 전부. 하지만 떠나는 것만큼은 안 돼.”

안단테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감정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더욱 놓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이대로 떠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내 옆에 있어. 남부럽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저는, 싫습니다. 형. 저는, 싫어요.”

“왜? 왜 싫은데.”

“제가…… 제가, 형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됐잖아. 나도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안단테가 방금 깨달은 제 진심을 올곧이 전했다.

“사랑해, 효섭아.”

그러나 진심이 담긴 고백에도 진효섭은 구겨진 표정을 펴지 못했다. 오히려 건조하기만 했던 눈가가 붉어졌다. 동시에 마치 수치라도 당한 듯 진효섭의 표정이 다소 격해졌다.

“형은, 제가…… 바보인 줄 압니까?”

“내가 언제 널 바보 취급했어. 이건 진심이야.”

그 진심을 들먹이는 것이 바로 바보 취급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꽉 막힌 목이 열리지 않아 진효섭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이 사랑이라니. 아무리 자신이 멍청하다고 해도 사랑과 집착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노는 그다지도 아꼈으면서, 자신에게는 이런 질척하고 더러운 집착을 보기 좋게 포장해 내민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남았던 일말의 미련조차도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필사적으로 참았던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토록 바랐던 사랑이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퇴색되어서, 분노가 울컥 솟아나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소리치고, 화내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역시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효섭은 이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집착입니다.”

더럽고, 질척거리는. 상대의 마음 따위 생각지 않고 짓밟을 수 있는 그런 감정.

“제가 가장 혐오하는…… 집착.”

진효섭은 꽉 막힌 목구멍을 혹사하듯 움직여 잘 나오지 않는 말을 꾸역꾸역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제 그만해 주십시오.”

그 말에서 감정이 온전하게 드러난 탓일까. 항상 오만하고 느긋하던 안단테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효섭은 그저 놀란 거겠거니, 치부하고 넘겼다. 저 대단한 인물이 싫다는 말을 얼마나 들어봤을까. 그의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배우지 않았던가. 더 이상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아슬아슬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이가 완벽하게 어긋났다는 것을 둘 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진효섭은 부디, 그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먹고 뒤돌아 가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바랄 것이 없을 텐데. 미워할 일도, 더 슬퍼할 일도 없을 텐데.

그러나 안단테는 움직이지 않았다.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는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진효섭은 문득 안단테가 자신을 놓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앞으로의 일이 훤히 그려졌다.

‘분명 SS급 에스퍼라는 대단한 족쇄에 붙잡혀 철저히 말라 갈 거야.’

어슴푸레했던 하늘은 어느새 밝아졌는데, 진효섭의 앞날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진효섭은 차츰 절망으로 물들었다.

밝아진 하늘에 감정이 까발려진 진효섭과는 달리, 햇살을 등진 안단테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윽고 역광 속에서 어두워진 안단테가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기긱- 하고 기이한 소리가 뒤따랐다.

어디선가 들어 봤던 소리에 진효섭이 멍하니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봤다. 허공에 기다란 금이 가 그 틈이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기이한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이트……?’

몇 번이고 봤던 적이 있지만, 이렇게나 가까이서는 처음이었다. 눈처럼 벌어진 타원의 게이트. 그 안은 끝이 없는 검은 늪과도 같았다. 블랙홀처럼 일렁이는 내부에 진효섭이 주춤, 움직였을 때였다.

“움직이지 마!”

다급한 목소리에 진효섭은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안단테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말라고.”

안단테는 진효섭이 본 모습 중 가장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여유롭던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진효섭은 다시 고갤 돌려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봤다.

‘SS급 던전이나 이제껏 마주했던 던전들에 비하면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진효섭이 위험한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소 초조한 안단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거기서 떨어져. 천천히. 응?”

“…….”

“진효섭. 아니, 효섭아. 어서.”

안단테의 재촉에도 진효섭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여전히 게이트를 바라봤다.

‘만약, 저 안으로 걸어간다면……. 그럼 적어도 과거와 같은 일은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이상한 충동이 몸을 잠식하는 듯했다. 그때, 안단테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빨리 게이트에서 떨어지라고 하잖아.”

그는 무서울 정도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조함이 눈에 보일 정도라 무섭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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