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22화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에 진효섭은 대답 대신 주춤,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러나 안단테는 조금도 멀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곧장 간격을 좁혔다. 날카로운 시선은 진효섭이 대답하기 전까지 절대로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효섭은 차분함을 되찾기 위해 애쓰며 어렵사리 입을 달싹였다.
“도, 도망친 게 아니라……. 저는, 그, 직접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그래서 사직서만 두고 나왔던 겁니다.”
“아니지. 그게 도망친 거잖아요. 다른 누구한테 협박받은 것도 아니면서, 내가 찾을까 봐 휴대폰도 버리고 사직서만 두고 간 거잖아.”
“그, 건…….”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라면서. 아니에요?”
진효섭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와 잠깐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도망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안단테를 만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니 마음을 최대한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안단테는 마치 죄라도 저지르고 들킬까 무서워서 숨은 사람 취급을 했다.
그는 언뜻 보면 침착한 듯했지만, 분노를 꾸역꾸역 참아 넘기는 기색이 선연했다. 진효섭은 혼란스러움에 결국 고개를 떨궜다. 떨리는 입술이 그의 분노를 제멋대로 해석했다.
“화, 화를 내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제가 너무 책임감 없이 그렇게 떠났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서연 가이드도 새로 들어왔지 않습니까.”
“……서연?”
안단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서연 가이드 때문에 도망친 거예요? 걔가 새로 들어와서?”
“그게 아니-”
“하. 그딴 같잖은 것 때문에.”
안단테는 뿌득, 이를 갈았다. 그런 같잖은 가이드 때문에 그간 진효섭을 찾아 헤맸던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효섭은 안단테의 말을 다르게 해석했다.
“가, 같잖다니…….”
마음이 처참하게 짓밟힌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가이드와 잠자리를 가지는 게 그렇게나 슬플 수 없었는데, 안단테는 그것을 두고 같잖다고 표현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오늘 당장, 아니, 지금 당장 김서연 가이드는 내보낼게요. 이제 다시는 내가 그 여자를 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럼 길드 가이드는 진효섭, 그쪽뿐이에요. 이러면 된 거죠?”
진효섭이 입술을 짓씹었다. 역시 그의 곁에 있어 봤자 자신만 마음 아프다. 상처받은 진효섭은 서럽게 내려간 입매로 처음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돌아갈 생각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 나가고 싶습니다.”
“안 돌아오겠다고?”
확실하게 전해야만 했다. 마주하는 게 어렵다고 해서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다짐한 진효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진효섭이 안단테를 저버린 듯한, 이상한 얼굴이었다.
“……대체 왜?”
진효섭이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자 안단테가 참지 못하고 이어 물었다.
“뭐가 문젠데요? 김서연 가이드도 내보내겠다잖아. 이제 남은 건 행복한 일밖에 없어요. 던전도 들어가지 않을 테니 위험도 없다고요.”
LEOM의 재건도 없다. 랭킹 싸움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던전도 들어가지 않는다. 모든 게 진효섭이 그리던 것들, 원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진효섭은 마음을 바꿔 먹지 않았다.
“저는 이제 노아피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길드가 문제예요? 그럼 길드에서 나와. 잘됐네. 마침 나도 권할까 싶었는데. 길드에서 나오고, 내 옆에만 있어요.”
“예……?”
“내 옆에만 있으라고요. 길드 따위 그만둬도 되니까.”
진효섭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왜 떠나려고 하는지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걸까. 진효섭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기를 바랐던 것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드는 듯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형 옆에…… 있으면 힘듭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거, 나랑 헤어지겠다는 뜻이에요?”
안단테의 말에 진효섭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당혹스러웠지만 진효섭은 안단테의 집착에 대한 의심을 내리눌렀다. 이것은 모두 오해 탓이 분명할 테니까.
‘역시 확실하게 전했어야만 했어.’
허울뿐이라지만 연인 관계였다. 아무리 안단테가 진효섭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갑자기 사라지면 당혹스러울 터. 그가 이렇게 찾아와서 화를 내는 것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진효섭의 탓이다.
그러니 진효섭에게는 이 관계의 끝을 확실하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예. 헤어지고, 싶습니다.”
“……왜?”
“그건-”
말을 끝맺기도 전, 안단테가 진효섭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왜 헤어지고 싶은데.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사랑한다고 말했잖아요.”
어느새 황금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흉흉하기 그지없는 기색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진효섭에게는 다소 느긋하던 한 달 남짓이 그에게는 달랐던 걸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애써 눌렀던 불안이 다시 고갤 치켜들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서연 가이드도 보낼 거고, 원하는 건 다 얻어 줄 건데. 대체 그 머리통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길래 날 떠나려는 거야.”
“혀, 형…….”
“떠나기 전만 해도 나한테 더 안아 달라며 매달렸잖아요. 좋다고 울었잖아. 나밖에 없는 것처럼 굴어 놓고, 떠나겠다고? 이제 헤어지고 싶다고?”
안단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간 들끓은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읏-”
“내가 그걸 받아들일 것 같아요?”
어깨를 옥죄는 미세한 통증에 진효섭이 신음을 흘렸지만, 초조함과 함께 몰아치는 그의 분노 앞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를 보는 진효섭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되뇌었건만.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을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번들거리는 황금빛이 과거의 잔재를 떠올리게 했다.
소름이 돋고 몸이 제멋대로 떨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저것을 피해야 한다며 비명을 질렀다.
안단테가 드러낸 건 분명한 집착이었다. 에스퍼가 으레 그렇듯, 가이드에게 느낀다는 집착. 언젠가 전 각인 상대인 디트리도 저런 눈을 했었다. 그리고 말했었다.
“웃기지 마요. 나는 그쪽, 어디에도 안 보낼 거야.”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
“내 가이드니까.”
‘내 가이드니까.’
쿵, 심장이 떨어졌다. 그에게 디트리가 겹쳐 보였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아노에게 보였던 따스한 시선, 죽음까지도 아껴 주었던 마음이 티끌만큼도 느껴지질 않았다.
진효섭은 딱딱히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단테가 그런 진효섭의 허리를 끌어당겨 곧장 입술을 겹쳤다. 커다란 안단테의 손이 진효섭의 목덜미를 잡았고, 두 입술이 비틀려서 맞물렸다. 거칠게 비집고 들어온 혀가 진효섭의 혀와 얽혔다.
그와의 키스는 수없이 많았고, 이보다 거칠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만큼이나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입천장을 쓸고 지나가는 감각에 진효섭이 몸을 움찔거리자 안단테가 허리를 더 강하게 고쳐 쥐었다.
진효섭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먹먹한 향에 몸이 절로 떨렸다. 스모크 향을 맡으니 그에게 몸을 비비고 싶어졌다.
‘안 돼…….’
머릿속에 깜빡이던 빨간불이 켜졌다.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의 향에 넘어가면, 지금 끌려가면, 과거를 되풀이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진효섭이 품 안의 스크롤을 떠올리며 옷자락을 꽉 쥐었다. 다행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다만 스크롤을 쓰기 위해서는 잠깐이라도 상대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지금의 안단테는 절대로 그 틈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혹시라도 아이템을 들키게 될까 봐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잘게 몸을 떨었다. 그냥 아이템을 손에 넣자마자 도망쳤어야 했건만. 안일함이 후회를 자아냈다.
바보처럼 안단테가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 분명 이상한 낌새에 두려워했음에도 눈으로 본 안단테를 믿어 버렸다. 그는 보이는 대로 판단할, 그런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상황을 타개할 작은 방법조차도 떠오르지 않으니 두렵기만 했다. 진효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힘을 주어 안단테를 미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단단한 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목덜미와 허리를 붙든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퍼부어 대는 키스가 더 거칠어졌다. 치아가 맞닿아 소리가 날 정도였다.
“혀, 읏, 그, 그만-”
잠시라도 그를 멈추기 위해 소리를 내 봤지만, 안단테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에 더 흥분한 것처럼 깊게 혀를 집어넣고 입천장을 쓸어내렸다. 등허리가 쭈뼛하다 못해 딱딱히 굳는 듯했다.
‘무, 무서워.’
아무리 밀어내도 그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완벽히 사로잡힌 것 같은 느낌에 패닉이 온 진효섭이 결국 입안을 핥는 혀를 콱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