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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발린 S급 가이드 (120)화 (120/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20화

어수선한 생각이 정리될 때쯤, 진효섭은 시내에 도착했다. 혹시 몰라 밭을 맬 때나 쓰는 꽃무늬 보자기를 머리에 뒤집어쓰곤 작은 정자에 경운기를 대고 앉았다. 와이파이를 켜 보자 아슬아슬하게 작동했다.

‘됐다!’

진효섭은 챙겨 온 가방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언젠가 신해창이 준 명함이었다. 웬만하면 유진에게 연락하고 싶었는데, 그의 번호가 원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어 아는 번호라곤 신해창밖에 없었다.

“후우…….”

신해창에게 전화해서 물건을 안단테에게 전해 달라 말하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진효섭은 할 말을 머리로 되뇌곤 결심을 끝냈다.

“좋아.”

진효섭은 인터넷을 통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유료 전화를 넣었다. 뚜르르- 긴장되는 단조로운 통화 소리가 세 번 정도 반복됐을 때, 신해창이 전화를 받았다.

-예.

깔끔한 대답에 진효섭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신해창 에스퍼.”

-…….

대답이 없었다. 설마 와이파이가 또 문제를 일으키는 건가 싶어 재차 확인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간당간당했지만 제대로 이어져 있었다.

“신해창 에스퍼?”

-……진, 효섭, 가이드……?

“예. 접니다.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

“제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좀 늦게 지금 사태를 알게 됐습니다. 형이 절 찾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실수로 가지고 오게 된 아노의 유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해창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진효섭은 덤덤하고도 깔끔하게 말하고 싶어 꿋꿋이 용건을 이어 나갔다.

“그 물건을 신해창 에스퍼의 길드로 보내려고 하는데, 형에게 전해 주시면 안 될까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이어 부탁드린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휴대폰 너머에서 우당탕,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숨죽였다. 이윽고 작은 신음이 흐른다 싶더니 유진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진효섭!

“유진 가이드? 옆에 계셨-”

-너, 당장 거기서 떠나! 죽은 듯이 숨어 있…… 윽!

다급하던 목소리가 이어지던 것도 잠시, 억눌린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진효섭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유진 가이드? 유진 가이드!”

-……진효섭 가이드.

“신해창 에스퍼, 방금 뭡니까? 무슨 일입니까. 유진 가이드는 괜찮은 것 맞습니까?”

초조함을 담아 쏟아지는 물음에도 신해창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차분하면서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진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어디십니까.

“예? 정말 괜찮은 겁니까? 아까 유진 가이드의 비명이-”

-어디십니까.

딱딱한 물음에 진효섭은 입을 닫았다. 지금 상황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탓이었다.

‘너, 당장 거기서 떠나! 죽은 듯이 숨어 있…… 윽!’

어째서 그렇게 말한 걸까. 왜 신해창은 기계처럼 대답 없이 묻기만 하는 걸까. 문득 진효섭은 뉴스에서 미국 대표 길드가 안단테를 도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신해창이라고 미국 대표 길드와 다르려나. 그렇게 생각하자 어디 있는지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진효섭이 어렵게 거절 의사를 표현했을 때였다.

-어째서?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목소리가 대번에 바뀌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응? 말해봐 봐, 효섭아. 어째서 말하기 어려워?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떨렸다. 옆에 안단테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안단테가 그들과 함께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혹스러웠지만, 안단테는 이유를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묻잖아. 효섭아.

어투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재촉하는 안단테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싸늘하게 식은 게 오히려 화가 잔뜩 났음을 와닿게 해 진효섭은 땀이 배어나는 손을 말아 쥐었다.

“저, 저는…….”

뭐라도 대답해야 한다 생각해서 말문을 열었지만,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안단테가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역시. 지금 누가 널 협박하고 있구나?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어 있는 거지?

“예, 예? 그게 무슨…….”

진효섭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협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사직서까지 쓰고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이 진효섭 스스로 나갔다는 증거다. 하지만 안단테는 진효섭이 어쩔 수 없이 떠났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하아……. 그럴 줄 알았어. 그게 아니면 네가 날 떠날 리가 없는데. 역시 국가안보국 놈들이 문제였던 거지? 신해창이 너한테 떠나라고 했어? 유진이 이간질이라도 했던 거야? 이 새끼들……. 그런 일 따위 없었다고 해 놓고서, 하나같이 입만 열면 거짓말들이라니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오해에 당황한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혀, 형.”

-응. 효섭아. 말만 해. 감히 우리 사이를 뜯어 놓으려는 새끼들은 내가 죄다 죽여 버릴게. 널 협박하다니. 죽어도 마땅한 죄잖아. 그렇지?

침착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는 이상하리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평소의 안단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조금도 절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이 부딪혀 오는 듯했다.

무엇이 이렇게까지 그의 평정을 무너뜨린 걸까. 복잡한 머리는 쉽사리 그 이유를 정의하지 못했다.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진효섭은 애써 그것을 내리눌렀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오해를 푸는 것이다. 유진이나 신해창에게 폐를 끼칠 수도 없고, 이상한 오해를 남겨 두고 싶지도 않았다.

“형……. 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니? 신해창이나 유진이 한 짓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누군데?

“아니요. 제가 말하는 건 협박이 아니라……. 그러니까, 저는, 스스로 나온 겁니다.”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안단테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까와 같은 분노는 한층 가라앉은 듯했다. 그에 진효섭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화가 난 건 오해 탓이었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차분히 이야기하고 끝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진효섭만의 착각이었다.

-그러니까. 누구도 협박하지 않고, 이간질도 하지 않았는데. 네 스스로 나간 거라고? 네 발로?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스산해졌다. 분노가 가라앉은 게 아니었다. 작게 헛웃음 짓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약간의 침묵 뒤, 안단테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어디야.

오해가 풀렸음에도 안단테는 여전히 차가웠다. 진효섭은 그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그저 불편한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 본론을 입에 올렸다.

“……그, 실수로 들고 온 물건은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십시오.”

-어디냐고 물었는데 왜 동문서답이야. 너 지금 어디냐고.

“저, 저를 만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냥 이대로 끝맺는 게 가장 좋-”

-누구 맘대로.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줄만 알았던 목소리가 델 듯이 뜨거웠다는 것을 진효섭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누구 맘대로 끝을 내. X발.

“혀, 형……?”

-말 안 한다 이거지. 그럼 내가 찾아갈까? 이대로 내가 직접 널 찾아내야 만족하겠어? 원하는 게 내가 미치는 꼴이야? 응? 효섭아.

진효섭의 동공이 확장됐다.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다소 날카로운 말을 할 때도 그는 약간의 장난기를 섞었고, 정말 위험할 때도 그는 어딘가 절제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럴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불안함에 진효섭이 말을 이으려고 할 때였다. 뚜, 뚜, 뚜,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겨 버렸다. 간당간당하던 와이파이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멍하니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보던 진효섭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화났어……. 그것도 엄청 많이.’

오해도 풀었고, 보석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보석이 목적이 아니라는 듯 오롯이 진효섭이 어디 있는지에 집착했다. 마치 화난 이유가 자신이 떠났다는 사실이라는 듯.

“……왜, 대체 왜?”

어째서 사라졌다고 화를 내는 걸까. 그의 곁에는 다른 가이드가 많을 텐데. 이제는 다른 이를 통해서도 완벽히 가이딩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러니 자신은 필요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 왜.

진효섭은 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었다. 말없이 통보해서 배신감이라도 느낀 걸까. 책임감 없이 떠나서? 아니면, 통제에서 벗어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 어떤 이유를 꼽아도 이거다 싶을 만큼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사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렇게 떠난 게 마냥 잘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불안에 잠식됐다. 초조한 와중에도 안단테가 아직 위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잔뜩 화가 난 안단테를 마주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없앨 수가 없었다. 통화까지 한 마당이니, 언제 알고 찾아올지 모르므로.

진효섭은 곧장 휴대폰을 끄고 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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