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꿀 발린 S급 가이드 (118)화 (118/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118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노인이었지만, 그는 진효섭이 일을 대신해 주는 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3일 만에 네 가지로 늘어난 반찬 수가 그 방증이었다. 게다가 돌연, 집이 없다면 여기서 그냥 지내라고까지 말해 주었으니 고마울 뿐이었다.

진효섭은 민폐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물론, 그는 폐가 아프냐고 되물었지만…… 어쨌든 노인의 집에 있기로 확정 났다는 게 중요했다.

원래도 TV나 인터넷을 잘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것들이 없어도 특별히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의 생활이 체질에 맞아 웃음까지 나왔다. 그토록 원하던 평화를 이렇게 찾고 나니 좀 떨떠름하기도 했다.

“오늘은 고추를 땄는데, 제가 씻을까요?”

“으응……? 고추를 안 씻었다냐, 고럼, 씻어야지…….”

“예. 알겠습니다.”

“그랴. 그지라도 그건 깨끗해야 하는겨…….”

“예. 먹는 거니 깨끗하게 씻어 보겠습니다.”

진효섭은 직접 딴 풋고추를 물로 열심히 씻고 상을 차렸다. 고추가 더해지니 어느새 반찬 수는 다섯 가지가 됐다. 이쯤 되니 남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입이 짧은 노인도 오늘만큼은 밥을 남김없이 먹었다.

평화로워서 그런지 날은 매우 느리게 흘러갔다. 볕이 하루 내내 들었고, 해가 지면 풀벌레 소리가 잠식했다. 노인은 조용한 편이라 오가는 대화가 잦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진효섭은 종종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의외였다. 안단테를 보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힘들어서 허덕였는데. 그럼에도 떠났던 것은 그의 곁에 있는 게 더 힘들 거라 확신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그에게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벗어나고 보니 그리웠지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마음이었던가 떠올려 보면 분명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다.

‘이해할 수 없네.’

아무도 없으니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느낀 걸까. 자유에 취한 것 같았다.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진효섭은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을 맘껏 누렸다. 어지러운 현실에서 잠깐 벗어난 것 같았다.

매일이 쳇바퀴처럼 반복되었지만, 진효섭은 그 평화 속에서 점차 건강해져 갔다. 그리고 정확히 이 주일이 지난 날. 진효섭은 본인이 느끼기에도 몸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빠진 살이 다시 붙지는 않았지만, 기력은 충만했다.

그렇게 3주째가 되는 아침. 진효섭이 어김없이 장작을 잘게 패고 있을 때였다. 노인이 평소와는 다르게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어? 어디 가십니까?”

“시내에 가야 쓰것어…….”

“시내요?”

콰직, 진효섭이 하던 것을 그만두고 허리를 폈다.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렀다.

“시내도 가십니까?”

“사내지…… 암…….”

“왜 가십니까? 저도 같이 갈까요?”

“으, 이……? 너도 갈텨……?”

진효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웃옷을 챙겨 입고 나온 진효섭은 바로 노인을 부축했다. 노인은 가끔 시내에 나가는지 익숙히 경운기를 타 시동을 걸었다. 진효섭은 처음 보는 수상한 이동 수단에 떨떠름해하며 올라탔다.

덜덜거리는 경운기는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르신. 시내에 나가면 제가 옷가지랑 필요한 음식을 사 드리겠습니다.”

노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덜덜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물론 이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그간 일방적으로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는데, 다행이었다. 진효섭은 함께 시내로 나가 노인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제 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춥게 입고 있는 그에게 따스한 파카를 사 주고 싶었다.

‘늘 절뚝거리시니 발 편한 신발도 사면 좋을 텐데.’

진효섭은 이것저것 살 것을 생각하며 느릿하게 지나가는 주위 풍경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허허벌판에 작고 큰 주택이 나타나더니 이윽고 사람도 하나둘 보였다.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이 든 어르신이었다. 진효섭이 수상한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그들은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일곱 시간이 걸렸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한나절이 걸렸던 것을 떠올리면 엄청난 대장정이었다. 어째서 노인이 아침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여…….”

“도착했습니까.”

새로운 곳이었지만 노인의 집보다는 훨씬 더 익숙했다. 하나둘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진효섭이 익히 아는 것도 많이 보였다.

노인은 경운기에서 내려 한 가게로 향했다. 상점 간판에는 <진짜 쌀 상회>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 쌀 주소…….”

“어? 영감.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었는가?”

가게 주인이 껄껄 웃으며 나타났다. 다소 거친 모습에 이상한 안부 인사였지만 미소는 푸근했다.

“쌀은 한 포대만 주면 되는겨?”

“으, 이……?”

“이거. 하나?”

주인이 검지 하나를 치켜들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중지를 더해 브이 모양을 그렸다.

“엥? 두 개나 살겨?”

“그려……. 입이 둘이라…….”

그제야 주인의 시선이 노인의 뒤로 향해 뻘쭘하게 서 있는 진효섭을 응시했다.

“뭐여, 따로 온 손님인 줄 알았는디. 여기 아가 아닌가벼?”

“예. 그…… 타지에서 왔는데 어르신이 절 도와주셔서, 어쩌다 보니 인연이 됐습니다.”

“어쩌다 보니?”

갸우뚱하던 주인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거참 신기한 일이구먼?”

“예에.”

“아무튼 큰 키를 보니께 한 포대로는 부족할 듯허네. 두 포대 챙겨 줄 테니 단디 챙겨 가소, 젊은 청년.”

그는 지긋해 보이는 나이가 무색하게 쌀 두 포대를 번쩍 들어 올려 경운기에 실어 주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의 외부인인지라 신기하구먼. 거, 바깥은 얼마 전 일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든디. 그짝도 그것 때문에 왔는가?”

“얼마 전 일이요?”

“엥? 외부인이면서 그것도 모르는겨? 바깥 사람이 아닌가?”

쯧쯧, 혀를 찬 주인은 안쪽으로 들어가 조그만 휴대폰을 들고나왔다. 생활감이 느껴지는 휴대폰이었지만 작동은 잘되는지, 화면 위로 TV 영상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웅얼웅얼 들리던 휴대폰 소리가 볼륨을 높인 듯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뒤지는 중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대표 길드에서도 안단테, 전 오웬 에스퍼를 도와 미국 전 지역을 수색 중이라고 하는데요.]

진효섭의 눈이 커졌다. 놀란 표정은 이어지는 말에 점차 굳어 갔다.

[아직 안단테 에스퍼가 무슨 경위로 그를 찾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일부는 그가 안단테 에스퍼의 소중한 것을 훔쳐서 달아났다 의심하고 있습니다. 수색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그에게는 현상금까지 걸린 상황입니다.]

“이야, 아직도 찾는 중인가 보구먼. 대체 어떤 걸 훔쳤길래 매일같이 뉴스에 이 얘기밖에 안 나온다냐.”

“……찾, 는 중인 게, 뭡니까?”

“찾는 거? 오잉인가 뭔가 하는 에스퍼가 찾는 거 말인가? 으하하,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주인이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이어 말했다.

“그야 당연히 가이드지! 그 에스퍼가 있던 길드의 가이드!”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안단테가 있던 길드의 가이드.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주인은 지금 안단테가 찾고 있다는 인물이 눈앞에 있는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했다.

“대체 그 가이드가 어떤 걸 훔쳤길래 이런다냐. 이해할 수가 없구먼. 혹시 그짝은 뭐 좀 아는감?”

가늘어지는 주인의 눈에 진효섭은 움찔거렸다. 이 정도로 유명해진 일이라면, 얼굴이 알려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초조했다. 하지만 쌀가게 주인은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 가이드인가 뭔가를 찾으려는 거잖녀? 현상금까지 걸렸다니, 딱 고것을 바라는 게 아닌가 했는디……. 아, 하긴 이 이야기도 방금 들었는디 아니것네. 아무것도 몰랐응께.”

“……예. 아닙니다. 전, 그냥…… 쉬러, 왔을 뿐입니다.”

“탄탄해 보이는 것이, 에스퍼인가 하는 이들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이. 하하하! 그려. 쉬러 왔으면 푹 쉬고 돌아가. 도시로 돌아가믄 바쁘게 살아가야지.”

오랜만의 수다인지 바쁘게 말을 이어 가던 주인이 진효섭의 뒤를 흘끔 보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어어……! 이 노친네야! 어딜 가는겨! 돈을 내고 나가야지!”

“아, 아닙니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으응? 그렇다면야, 뭐.”

남자는 진효섭에게서 돈을 받아 들고는 흥얼대며 가게 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안경을 집어 들고 눈을 찌푸리며 작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휴대폰에서 계속해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진효섭은 더 듣지 못하고 노인을 따라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표정은 복잡함을 떨쳐 내지 못한 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