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17화
덤덤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한 시간만큼의 노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 문득 안단테가 사직서를 발견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난감한 표정을 지을까. 아니면 다소 배신감 섞인 표정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진효섭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지…….”
기대하는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가이딩 문제는 해결됐다. 이제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말도 없이 일을 그만두고 떠난 진효섭을 책임감 없다 혀를 차는 게 다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몸의 상성이 잘 맞았다며 조금 아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곧 털고 일어나리라.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멍청이.’
진효섭은 다시금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올 것 같아서 눈을 꼭 감았다. 아직 덤덤해지는 건 멀고 먼일일 듯했다.
* * *
진효섭은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새벽녘, 하늘이 어슴푸레해지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이제 막 해가 온전히 뜬 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몸은 찌뿌둥하고 머리는 몽롱했지만, 움직여야 했다. 숙소를 잡고 푹 쉬면서 씻고 싶었다. 하룻밤 새 몸이 먼지투성이였다.
“그래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큰길을 따라 많이 걸어 들어왔으니 이제 슬슬 호텔이든 모텔이든 보일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침이니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터. 여러 가지 물을 수 있다면 편해지리라.
“조금만 더 힘내자.”
진효섭은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후가 돼서도 여전히 사람은 보이질 않았고, 진효섭은 점차 지쳐만 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다시 밤이 됐고, 또 노숙이 이어졌다. 그렇게 초콜릿이나 과자로 하루하루를 때우며 거리를 떠돌았다.
그러다 3일 후,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아……!”
함박웃음을 지은 진효섭이 냅다 뛰어 앞을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 실례합니다.”
“으, 으이……?”
고개를 돌린 이는 아흔이 가까운 듯한 노인이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지 연신 끔뻑이며 눈살을 찌푸리고서 진효섭을 바라봤다.
“누군교……?”
“예? 저 지나가던 사람인데…… 어…… 숙박 시설을 좀 여쭙고 싶어서 뛰어왔습니다. 여기 계속 떠돌았는데 사람이 살지 않아서…….”
“안 들리는디, 누구……?”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아……. 그런디 왜 날 부르는교……?”
“숙박 시설을! 여쭙고 싶습니다!”
“박 씨를 쭈워……?”
진효섭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아, 아뇨. 숙박 시설입니다! 숙박 시설.”
“으응……?”
아무리 말을 반복해도 노인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진효섭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굳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해야 할 방법이 뭐가 있을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진효섭의 몰골을 훑은 노인이 작게 혀를 끌끌 찼다.
“으이구……. 젊은 애기가, 우째 거지맹키로…….”
“아닙니다. 거지가 아니라-”
“건실하게, 살아야지, 으이?”
“……죄송합니다.”
어째서 사과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진효섭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머리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아 부끄러워졌다.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거지로 착각할 만큼 몰골이 더럽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떼잉, 쯧쯧.”
혀를 차던 노인은 진효섭의 손을 꼭 잡고 이끌었다.
“거, 밥이라두 먹고 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려. 애기가 세상이 을매나 험했으믄…… 그지 생활을 하것어…… 잉, 쯧쯧.”
“……감사합니다.”
“이리 와…….”
손을 잡아끈 건 노인이었으나 정작 진효섭이 부축하다시피 보좌하며 걸었다. 걸음은 느렸지만, 잡은 손이 따스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허름한 주택이었다. 진효섭은 멍하니 집을 바라봤다. 도저히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외관에 조금 굳어 있자 노인이 안으로 들어가며 손짓했다.
“어여, 들어와…….”
“아, 예. 실례합니다.”
진효섭은 조심스레 집 안에 들어섰다.
안은 어깨를 구부정하게 해야 할 만큼 천장이 낮았고, 어수선하니 깔끔하지 않아 생활감이 잔뜩 느껴졌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인이 혼자 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꺼려지지는 않았다. 3일 동안 밖을 헤맨 진효섭에게는 지붕과 따듯한 바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나중에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어르신.”
“으이……? 마당에서 잔다꼬……?”
“……아뇨.”
물론 말은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어여 씻기나 혀……. 밥을 허야것네.”
노인은 화장실이 어디인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대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진효섭은 구부정하게 서 있다가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은 특이하게도 밖에 있었는데, 욕실은 그 옆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보니 찬물이 콸콸 나왔다. 자신이야 씻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온도에 불만이 없지만, 노인이 이런 찬물을 쓴다고 생각하니 걱정스러웠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면서도 냉수를 끼얹고 나니 상쾌해졌다. 서늘함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후우…….”
진효섭은 수건도 없이 머리의 물기만 대충 쭉 짜고 욕실을 나왔다. 두피가 어는 듯했지만 씻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이 어렵사리 상을 펴곤 그 위에 밥그릇을 놓으려고 했다.
“아, 제가 하겠습니다.”
냅다 달려간 진효섭이 밥그릇을 대신 상에 올렸다. 노인이 먹으려던 것들인지 김치 한 통과 시금치 한 통, 그리고 방금 밥통에서 꺼낸 따끈한 보리밥이 끝이었다.
“어여, 들어…….”
진효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이 내민 수저를 받아 들었다. 조촐한 식단이었지만, 우습게도 최근에 먹은 밥 중에 가장 맛있었다. 허겁지겁 식사하자 노인이 또다시 혀를 찼다. 그러곤 주섬주섬 김을 꺼내 진효섭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으잉, 사내놈이…… 삐쩍 골아서는…….”
새삼스러운 말에 진효섭은 제 몸을 내려다봤다. 말랐다는 말은 몇 년간 들어 보지 못했었는데. 10대 때야 끼니를 거른 채 매일 앉아 있었기에 자주 들었지만, 성인이 되고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이든 뭐든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했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끼니는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자연스레 작았던 키가 쑥쑥 커졌고 어깨는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그런 과거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안단테의 옆에 있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저, 어르신.”
“으, 이?”
“여기서 하룻밤만 묵어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김을 더 꺼내 진효섭에게 내밀었다. 진효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최대한 또박또박 말해 의사를 전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서 잠을 자고 싶습니다. 괜찮습니까?”
“아……. 그려, 그려. 그리해……. 나흘이든, 닷새든…….”
그제야 노인은 제대로 이해하고 얼마만큼 묵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주름진 얼굴에 짜증이나 귀찮음은 없었다. 진효섭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는…….”
심드렁히 중얼거린 노인이 보리밥을 퍼먹었다. 반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는 그의 숟가락질은 꽤 느렸다.
“어여 먹어. 난 다 먹었으니께…….”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 한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그러곤 말없이 반대편 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이부자리가 보이는 게, 노인의 방인 것 같았다. 즉 노인이 가리킨 방향의 방은 진효섭이 묵을 곳이라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예기치 못한 인연이지만 정말 다행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진효섭은 상 정리를 비롯해 설거지까지 다해 두고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사람은커녕 슈퍼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조용했다. 현대 문물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지만, 방은 따듯했다. 듣는 귀가 어두운 노인이라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오히려 이런 것을 바랐을지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은 일일 듯했다. 진효섭은 거리로 나가 휴대폰을 사려고 했던 일정을 바꿨다. 실례만 되지 않는다면,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곳에서 조금만 더 쉬고 싶어졌다.
* * *
푹- 푸욱- 푹-
진효섭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에 삽을 찔렀다. 노인이 하는 것을 보고 넘겨받은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고됐다. 고작해야 삽으로 밭을 뒤집고 안에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런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허리가 뻐근했다. 어째서 노인이 그토록 허리가 굽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후우……. 어르신! 다했습니다!”
“오, 오……. 수고혔어.”
노인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 언덕을 내려갔다. 진효섭은 그를 뒤따랐다.
집의 뒤쪽에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도 노인을 쫓아다녀 알게 됐다. 첫날에는 이런 외진 곳에서 대체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고 혼자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이걸로 묻지 않아도 알게 됐다. 그는 먹는 것의 대부분을 직접 키웠다.
진효섭은 수확할 것들이 생각보다 다양해서 신기했다. 모든 게 현대 문물과 묘하게 차이 나서 그런지 좀 더 신기한 느낌이었다. 물은 차갑지만, 방은 따듯하고. 밥은 전기밥통으로 하는데, 또 음식은 이상한 구덩이에 불을 때서 만드니……. 참 신기한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모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